[권혁승 목사] 말씀으로 양육하는 자녀(6)
이스라엘의 쉐마 신앙교육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하나님 사랑의 우선적인 실천 강령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생활 속에서 그것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개인적인 차원의 경건에 머무르지 말고,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래서 ‘쉐마’를 “가정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신앙교육의 강령”이라고 부른다. 자녀교육에 관한 강조는, ‘쉐마’가 오늘날 우리들이 신앙고백으로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과 구별되는 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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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런히 가르치며”로 번역된 히브리어 본문은 ‘부지런히’라는 부사가 따로 없다. 다만 ‘가르치다’를 의미하는 ‘샤난’이 강조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이 되었다. 본인의 학위논문 지도교수였던 히브리대학교의 바인펠트 교수는 이 강조형 동사를 ‘설득하다’ 혹은 ‘주입하다‘로 번역하였다.
‘가르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샤난’의 어원적 의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날카롭게 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반복하다’이다.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교육방법은 주로 구전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반복학습이 중요하였다. 그런 점은 오늘까지 지켜오고 있는, 이스라엘의 전통적 교육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전통적인 교육방법을 철저히 지켜오고 있는 정통파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학교를 ‘예시바’라고 부른다. ‘예시바’는 ‘앉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동사 ‘야사브’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곧 ‘예시바’는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서 구두로 가르치는, 전통적인 교육기관이다.
‘반복하는 것’이 교육의 방법론이라면, ‘날카롭게 하는 것’은 그 내용이 질적으로 새로운 것이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일수록 반복적으로 가르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반복하는 것만 강조하면 교육 자체를 망칠 수 있다. 반복하되 무디지 않도록 날카롭게 해야 한다. 말씀을 날카롭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상황에 맞게 잘 적용시켜주는 것이다. 진리인 하나님 말씀은 모든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원리이기도 하다. 원리는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적용될 때 실제적 가치가 드러나게 된다. 말씀을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다’(히 4:12)고 한 것도 그런 점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에서 ‘강론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딥베르’는, 어원적으로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나누는 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강론하다’는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전인적인 교육으로서, 무의도적인 것까지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강론하다’는 의도성을 지닌 ‘샤난’과는 대조를 이루는 신앙교육법이다.
삶을 통한 가르침이란 부모의 삶 자체가 자녀들에게 무언으로 전달되는 강력한 교육임을 의미한다.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라는 시간성(아침과 저녁)과 장소성(집과 밖), 그리고 행동양식(앉음과 행함/쉼과 일)을 말씀 강론과 연관시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서로 상반된 시간과 장소를 대비시키는 것은, 모든 것이 포괄됨을 표현하는 독특한 히브리적 수사기법이다.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루에 두 번씩, 곧 아침과 저녁에 각각 ‘쉐마’를 암송하고 있다. 잠언에서도 그런 강조점을 찾을 수 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명령을 지키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고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 그것이 네가 다닐 때에 너를 인도하며 네가 잘 때에 너를 보호하며 네가 깰 때에 너와 더불어 말하리라”(잠 6:20-22)
부모는 자녀들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는, 삶의 동반자이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적절히 활용하여 신앙교육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의도적인 교육 ‘샤난’과 함께 무의도적인 교육 ‘딥베르’가 적절하게 어우러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