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2) 달란트 비유
달란트의 비유
(마태 25;14-30)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14-15)
여기서 '또'라는 말로 시작한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말은 앞의 열 처녀 비유이가에서 이어서 란 말과 같은 뜻으로 쓴 것이다. 열 처녀 이야기는 조용히 다음을 분비하는 일이고, 이곳에 나오는 달란트의 이야기는 적극적으로 활동을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이야기는 결산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영어로 달란트(Talent)라는 단어는 재능을 말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달란트는 저울로 무게를 다는 최대의 단위를 말한다. 달란트는 ‘한 덩어리’를 뜻하는 히브리어 ‘키카르’(kikar)의 음역이며 헬라어 ‘탈란톤’(talanton)은 원래 ‘저울’, ‘계량된 것’의 뜻으로 무게를 재는 단위의 명칭이 되었다. 무게와 화폐의 단위를 나타내었던 달란트(talent)가 재능, 능력을 나타내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마 25:15-28 참고).
구약 시대에는 무게를 재는 최대의 단위로 많은 양의 금과 은의 무게를 재는데 사용되었다(출 25:39; 37:24; 38:24; 삼하 12:30; 왕상 10:10, 14; 대상 22:14; 스 7:22). 1달란트의 무게는 약 34kg으로 3,000세겔에 해당되었다. 달란트의 무게는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바벨론의 경우는 약 60kg이었고 가벼운 달란트의 무게는 30kg 되는 것도 있었다.
신약 시대로 오면서 헬라 계통의 달란트가 사용되었는데 무게를 재는 단위와 화폐의 단위로도 사용되었다(마 18:21-35; 25:15-28). 신약 시대 1달란트는 약 20.4kg정도 되었고 6,000데나리온(드라크마)에 해당되었다. 예수님은 용서에 대한 교훈을 하실 때 6,000만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과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대조하여 말씀하셨다(마 18:21-35).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를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 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 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16-30)
여기 달란트를 받은 사람들은 지나가는 사람도 아니고, 이 일과는 무관한 사람들도 아니다. 주인에게 속한, 주인에게 소속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에게 달란트를 맡긴 것이다. 열 처녀 이야기에서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 목표로 설정되었으면 주인의 명령을 따라 맡은 재능을 가지고 설정된 일을 위해서 열심히 뛰어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주인은 누가복음에서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간 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눅 19;12). 주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을 때 달란트를 받았던 종들이 열심히 활동해서 많은 변리를 남겼다면 왕은 이 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열처녀 비유이야기에서 다음을 준비한다는 뜻은 주인이 왕으로 돌아와서 통치할 영역이 준비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전통적 성경해석으로는 이해를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앞 단락에서도 말했지만 전통해석이란 지금의 교회당교회구조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말하고,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은 다음을 준비하는 것으로 본 성경 해석이기 때문이에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래서 대화가 안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서로 다른 입장차라는 것 때문이다.
오늘 즉 지금을 생각하는 사람과 다음 즉 훗날을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의 차이가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유대교 사람들과 예수의 무리들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었던 것과 같고, 또한 중세교회 사람들과 개혁교회 사람들의 시각에 차이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해석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ㅇ와 같이 기존시각과 새 질서의 시각의 차이도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왜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를 못하고 그렇게도 무자비하게 배척을 했을까? 그것이 바로 구약의 시각과 새로 임할 신약의 시각의 차이에서 오는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중세교회 시각과 개혁교회의 시각차가 성경해석도 달리한 것과 같은 것이다.
앞장인 24장에서부터 끝 날의 징조들을 생각해야 한다. 다음을 준비하지 아니한 자는 신랑의 혼인 잔치에 참여를 못하고 낙오자가 된다. 현재 목회하는 사역자들에게는 심기가 좀 불편 할 수도 있는 말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대로는 안 되기 때문에 지금만 생각하지 말고 앞날을 위해서 양해를 구해야 한다. 성경이 왜 있는 것인가? 그리고 성경이 다음의 세대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단순히 성직자들의 활동하는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서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이제는 전통적으로 배워온 지식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성경으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주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을 때의 왕의 역할은 다음 단락에 기록된 양과 염소를 갈라놓은 심판에 대한 구체적인 일을 하셔야 한다. 그 무대를 만드는 것이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의 역할이고 달란트를 받은 종들이 해야 하는 일들은 변리를 남기는 일 곧 새 질서에 참여할 백성을 부르는 일이 종들이 해야 하는 일들이다. 그래서 종들의 역할은 계시록 19장 7절에서 20장 6절까지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왕국 건설에 관한 일들이라 할 수 있다.
그 중에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그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다? 만일 이 사람이 ㅇ외부인이었다면 처음부터 달란트를 맡기지도 안 했을 것이고, 심판도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혹은 종들이라 했기 때문에 달란트를 맡긴 것이다. 그런데 부여받은 임무를 땅에 묻어 두어 버렸던 것이다. 부여된 책임을 유기한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지금 믿는 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