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
예수님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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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 방식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성경의 인물들을 구속사 중심으로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보게 된다. 그 첫째는 예수님의 실제 족보에 나타난 인물들을 통해 구원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지는 않지만 앞으로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 것인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인물들이 있다. 인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전에 먼저 인물구속사에서 다루게 될 인물들을 통한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예수님의 족보에서 나타난 인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방식을 이야기 할 것이다.
두 족보의 공통점
두 족보에 있어서 공통점은 예수님은 마리아의 아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태복음 족보는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인 요셉의 족보이고, 누가복음 족보는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족보이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이었고 헬리의 사위였다. 족보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남성 위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마리아의 족보인 누가복음 족보 역시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족보로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족보는 그러기에 예수님은 혈통적으로 마리아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마태복음 족보도 보면 1:16에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기록함으로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나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요셉은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이지 마리아와 육체적인 관계를 통해 낳은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둘 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처녀였던 마리아에게서 예수님이 태어나셨음을 선포하고 있다. 이로서 창세기 3:15에서 언급한대로 앞으로 태어날 구속자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리라는 성경의 약속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한 것이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은 마리아가 낳은 첫 번째 아들(first born son)임을 분명히 선언함으로 마리아가 평생 처녀로 지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마태복음 1:25에서 “아들(a son)을 낳았다고 한글 성경은 번역하고 있지만, 킹제임스영어성경(KJV)은 첫아들(first born son)을 낳았다고 번역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이 누가복음 2:7에서는 마리아가 첫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족보의 차이점
마태복음은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왕으로 오셨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왕의 족보 곧 다윗 왕의 족보를 다루고 있다. 당연히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 요셉의 족보를 다루고 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실제적인 육신적인 어머니인 마리아의 족보를 기록함에 있어서 다윗과 아브라함을 넘어서서 인류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예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까지 거론하고 있다. 이 두 족보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인 것은 요셉이나 마리아나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는 성경이 약속한대로 오셨다는 것이다.
두 족보는 다윗 이후에는 조상이 달라지는데 이는 요셉은 이스라엘의 3번째 왕 솔로몬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고, 마리아는 다윗이 낳은 아들 나단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이나 나단은 다윗이 밧세바를 통해 낳은 아들들이었다. 다윗 이후로 나누어진 요셉과 마리아의 조상은 다시 스알디엘에게서 하나로 합쳐지는데, 스알디엘은 여고냐의 아들로 네리의 사위였다. 그리고 역대상 3:19에 따르면 스룹바벨은 브다야의 아들이었는데 스알디엘의 사위가 되었든지 아니면 스알디엘이 아들이 없어서 브다야의 아들 중 스룹바벨을 법적인 아들로 삼았을 수도 있다. 스알디엘이나 브다야는 둘 다 여고냐의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스룹바벨 이후 요셉과 마리아의 조상은 다시 갈라진다. 스룹바벨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는 아비훗과 레사는 스룹바벨의 아들들이었거나 어쩌면 사위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요셉과 마리아에게서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예수님은 요셉을 법적인 아버지로 마리아를 육적인 어머니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구원방식
아담,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사람이다. 그렇게 아담은 전 인류의 대표자가 되었다. 모든 인류는 아담안에 있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모든 인류는 함께 타락했다.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하여 전 인류의 대표자로 오신다. 그리고 아담이 실패한 그 처음에서부터 인류을 회복시켜 나아가 사람을 처음 창조된 그 자리로 돌려놓을 것이다.
아벨과 셋, 아벨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건으로 인해 가인으로부터 죽음을 당한다. 예수님도 그리 되실 것이다. 그러나 셋은 아벨을 대신하여 주어진다. 예수님은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부활 할 것이었다.
에녹과 노아, 하나님과의 동행이 인간이 살 길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을 거절했다. 그래서 홍수를 통해 인간은 전멸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의 가족을 은혜로 구원하신다. 구원의 방식은 방주 안에서였다.
아브라함, 아브라함이 등장하기 전에 바벨탑 사건이 있었다. 바벨탑 사건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구원은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이다. 구원의 방식은 인간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아브라함을 불러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신다. 성경 이야기는 이제 인류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로 무대를 좁힌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 구원은 믿음으로 주어짐을 선언한다.
이삭, 이삭은 화해의 아들이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화해의 조건으로 이삭은 화해의 제물로 드려진다. 물론 이삭은 결국 죽지 않았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것이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다.
야곱, 야곱의 삶을 보여주는 인간구원의 흐름은 하나님의 참으심이다. 인간이 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참아 주신다. 야곱이 구원받은 자로서의 온전한 삶으로 변화되기 까지. 그렇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손을 붙잡고 하나님나라로 이끄신다. 예수님은 자신에게로 오는 자를 결코 쫓아내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셨다.
유다와 다윗, 앞으로 주어질 메시야 구주는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에게 주어졌다. 유다는 문제를 외면하는 자가 아니라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자였다. 유다로부터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다윗을 상징으로 하는 이스라엘의 왕의 개념은 하나님께 대하여 백성을 책임지는 대표자였다. 이것이 하나님 구원방식의 절정이다. 예수님은 전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께 책임지는 왕이었다. 그렇게 예수님의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었다.
솔로몬과 스룹바벨, 구약의 역사의 성전의 역사로 막을 내린다. 이스라엘의 목적은 왕국이 아니라 성전이었다. 성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이다. 당연히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제사가 드려지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것은 용서의 제단이었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는 용서가 전제된다. 예수님 오심의 목적은 바로 성전의 회복 곧 타락한 죄인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나님께 대한 예배 곧 성전이 회복된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3
예수님의 모형들
성경의 인물들을 구속사 중심으로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 흐름을 보게 된다. 그 첫째는 예수님의 실제 족보에 나타난 인물들을 통해 구원의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지는 않지만 앞으로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할 것인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인물들이 있다. 앞으로 등장하는 구원자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모형이란 예표, 유형 또는 그림자로 불리우는 것으로 예수님은 원형 또는 실제로 예수님의 모습은 이러할 것이라고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건, 물건 그리고 인물이 있다.
구원의 사건으로서의 모형
성경 이야기는 철저하게 구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성경의 시작을 장식하는 천지창조의 모습 역시 구원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단순하게 창조 이야기를 다루자면 1:2은 하나님이 창조할 당시 땅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고 기록하면 되었다. 그런데 땅에는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세 단어는 창조의 과정과 맞물러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어둠은 빛의 세계로, 혼돈은 질서의 세계로, 공허는 채움의 세계로 바뀌어진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죄인으로 판명되고 하나님은 인간을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을 은혜로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셨다. 하나님의 인간구원은 노아의 가족을 방주 안에서 구원하시기로 하고 노아로부터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시작하고 있다.
인류는 총체적으로 인간 스스로 자신들을 구원하고자 바벨탑을 쌓았다. 그러나 인간의 바벨탑은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면서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이루시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리고 그 구원은 아브라함을 주권적으로 부르시면서 시작하신다.
요셉 이야기는 구원의 사건으로 다루어진다. 요셉은 자신의 가족 곧 아버지 되는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애굽에 미리 보내어진 자로 기록되고 있다. 애굽에 들어간 과정은 형들에게 의해 상인들에게 팔려 애굽 보디발장군 집의 종이 된다. 그러나 요셉은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지만 결국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게 된다.
구원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으로의 최대 사건은 출애굽 사건이다. 이스라엘 역사는 구원의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방편이었다. 애굽의 종 그리고 구원자 모세, 10가지 재앙과 유월절, 홍해바다를 지나 시내산에 이르는 과정, 그리고 광야에서의 방황 후 마침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련의 이야기는 구원의 모형으로서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다윗이 왕이 되는 과정 그리고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그 성전의 역사를 통해 보여주는 이스라엘 왕국 흥망의 역사는 하나님이 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는가를 설명하는 모형으로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물건들
구약의 사건들의 중심에는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물건들이 존재한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보여지는 방주는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방주는 예수님의 모형으로 인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주어진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모형으로서의 성막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차 있다. 성막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막의 기구들을 보면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번제단, 그리고 언약궤의 덮개로서의 속죄소는 예수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주고 있다. 예수님은 번제단에서 죽게 되는 짐승처럼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속하게 되는 속죄소가 되신다. 이외에도 유월절 사건에서 보여지는 양의 피, 모세가 광야에서 들었던 놋뱀 등등이 있다.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인물
예수님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인간구원방식의 모형으로도 설명되지만 동시에 예수님의 모습을 설명하는 모형이 되기도 한다. 인류의 대표자로서의 아담, 새로운 인류 역사의 시작이 되었던 노아,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자로서의 모형이 되는 이삭 그리고 왕으로서의 모형이 되는 다윗 그리고 지혜의 왕 솔로몬이 있다.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마지막 인물로는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였던 의로운 자 요셉이 있다.
예수님의 조상은 아니지만 구원자 예수님의 모형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다. 인물 구속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인물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후에 구원을 설명하는 인물들 중에 등장한다.
이스라엘은 3가지 직분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메시아라고 불렀다. 히브리어 메시아를 헬라어로는 그리스도라고 한다. 선지자 왕 그리고 제사장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직분을 동시에 가지신 메시아 곧 그리스도였다. 물론 많은 선지자와 왕 그리고 제사장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같은 선지자,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 그리고 다윗과 같은 왕으로 오시게 된다.
예수님의 모형으로서 그려지는 인물 한 사람만 이야기하라면 그는 요셉일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점은 죄의 문제를 다룬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요셉은 예외로 제시된다. 요셉은 자신의 죄가 아닌 타인의 죄 때문에 종이 되고 감옥에 가게 된다. 특별히 요셉은 예수님이 은 삼십에 팔리었듯이 요셉은 은 이십에 팔리운다.
당연히 모세는 인물구속사에 빠질 수 없다. 모세는 예수님의 조상이었던 유다의 후손이 아니라 제사장직을 이어받게 될 아론의 조상 레위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중심으로 한 율법을 주셨다. 그리고 모셉의 율법 아래 구약 성경은 저주로 이야기를 마친다. 그리고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의 은혜로 인간은 구원을 값없이 받게 된다. 모세는 선지자의 으뜸이었다.
모형으로서의 인물을 다루다 보면 길을 닦는 자와 닦여진 길을 따라 구원을 완성한 자의 모형들이 보여진다. 길 닦는 자 세례 요한과 구원자 예수님처럼 말이다. 그러한 유형을 보여주는 자가 모세와 여호수아, 엘리야과 엘리사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맞은 편 모압까지 온다. 그리고 모세는 가난안의 벙복은 여호수아에게 맡긴다. 예수님의 이름은 여호수아의 헬라식 이름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예수아라고 부른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였듯이 예수님은 인류를 하나님나라로 인도하신다.
엘리사는 선생이었던 엘리야의 후계자로 북 이스라엘의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선지자로 등장한다. 누구보다도 기적을 많이 일으킨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왕국은 국가적 재난이 있을 때면 엘리사에게 의존한다. 성경은 세례 요한은 엘리야로 예수님은 엘리사로 비교된다.
구원의 방식으로서의 예수님의 조상들, 그리고 구원자의 모형으로서의 인물들. 이 두 종류의 인물들을 다음 호에서부터 한 인물 씩 성경의 인물구속사에서 다루게 된다.
김성철목사의 기독교와 종교 4
낙원인가, 하나님의 나라인가?
인간이 갖는 가장 큰 두려움은 죽음에 관한 것이다. 죽음 그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다. 죽음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이 인간을 두렵게 한다. 물론 어떤 이는 죽음 이후의 세계를 부정한다하더라도 죽음 이후 자신이 사람들에게 잊혀지는 것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가진 자는 죽음 그 자체가 두렵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죽음이 다가올수록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가진다. 여기에 종교의 탄생을 주장하는 이론도 있다. 누구나 죽음 이후 낙원에 가기를 소원한다. 어떤 종교도 모습은 달라도 낙원을 이야기 한다.
낙원(樂園 paradise)의 세계
어떤 종교는 죽음은 소멸이라고 주장하고 오직 선한 자들만이 부활하여 낙원에 간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인 종교의 특성은 낙원과 그 반대의 세계 곧 지옥을 함께 생각한다. 낙원과 지옥이 있다는 믿음이 선한 삶의 동기가 되게 한다. 어찌되었든 모든 종교는 자신의 종교에 귀의한 자들에게는 낙원이 주어진다고 설파한다. 낙원은 즐거움 곧 행복이 있는 동산이란 의미인데 성경에서는 에덴동산으로 말하고 있으며 서양인들은 이를 파라다이스(paradise)라고 부르는데 이는 낙원을 뜻하는 페르시아어의 'pairi-daeza'에서 왔다. 불교에서는 정토(淨土)를 극락(極樂)의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는 예토(穢土, 속세, 괴로움으로 가득찬 세상)의 반대 개념으로 쓰인다.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는 죽음 이후 최고의 경지가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깨닫는 자의 경지에 올라가지 못한 자의 사후 최고의 경지가 천상도(天上道)인데, 이는 마치 극락처럼 번뇌가 적고 평온한 세계이다. 정토교(淨土敎 · Pure Land Buddhism)에 의하면 극락(極樂)이란 아미타불의 서방극락정토를 말하지만 약사불(藥師佛)의 동방정유리세계(東方淨瑠璃世界), 미륵불(彌勒佛)의 도솔천, 관음보살의 보타락산(普陀落山) 등도 있다.
종교 중에서 최고의 낙원을 설파하는 곳이 이슬람교이다. 이슬람의 낙원은 황금, 그리고 커다란 눈을 가진 아리땁고 순결한 여성으로 가득 차 있다. 결코 취하지 않는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슬람의 최종 목적지라고 생각되는 낙원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기에 돈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하는 청년들이 낙원에 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지하드(聖戰)에서 순교하는 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낙원을 동경해 왔다. 지금의 세상에서 고통받는 자일수록 죽음 이후에라도 낙원에서 살고자 하는 소망을 안고 사는 것은 어쩌면 단순한 인간의 욕구일 것이다. 종교는 낙원을 목적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나라
기독교도 낙원을 말하고 있다. 성경은 낙원을 에덴동산으로 부른다. 에덴이란 행복이란 의미고 동산이란 울타리란 의미다. 곧 행복의 울타리다. 창조주 하나님이 울타리가 되어주시는 행복의 장소이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난 자들에게 주어진다고 약속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낙원이 아닌 하나님나라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낙원을 들어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나라가 에덴동산을 보장하기는 하지만 기독교인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나라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다. 내가 보기 좋은대로 살아온 삶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으로 바꾸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삶이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고 고백하기 전에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먼저 고백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기독교다. 마태복음 6:33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종교는 낙원을 목적으로 하지만 기독교는 하나님나라를 목적으로 한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종교와 확연히 구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