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3) 양과 염소 심판- 이응주 목사

by wgma posted Jan 05, 2018 Views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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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장(3) 양과 염소 심판

    양과 염소로 분별의 심판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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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31-34)

1. 염소와 양

염소(Goat)는 양과 같이 되새김질하는 포유동물이다.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존력이 뛰어나 일찍부터 사육되었으며(창 15:9), 그들의 고기와 우유 그리고 치즈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어린 염소들은 최고의 고기로 여겨졌으며(신 14:4; 삿 6:19), 그 가죽들은 물병 또는 술병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고, 그들의 털은 노끈과 섬유로 엮어 쓰였다. 또 염소 머리털은 성막 덮개를 만드는 데 쓰였다(출 26:7). 염소들은 희생 제물로 쓰였으며 특히 속죄 제물로 합당하였다(레 1:10; 4:28).

팔레스타인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방목하지만 밤이 되면 양과 염소를 분리시키는데, 이는 양들은 바깥을 좋아하는 데 비해 염소들은 따뜻한 곳에 있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염소는 때로 죄와 난폭함, 불순종을 상징하기도 했다(레 16:8-26; 마 25:31-46).

마지막 때의 '양과 염소에 대한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에서 천국에 대한 세 번째 비유이다(마 25:31-46). 이 비유는

(1)첫째, 심판은 반드시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히 9:27).

(2)둘째, 심판 때에는 양과 염소로 구분이 되며, 중간 지대는 없다는 사실이다.

(3)셋째, 천국과 심판은 결국 현재의 삶의 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즉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봉사하고, 어떻게 섬기느냐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비유이다.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여기서 상속(Inheritance)이란 신분, 재산, 지위 등을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구약에서 상속(잠 19:14)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할라’(nachalah)는 기업(신 4:20), 유업(잠 17:2), 산업(잠 20:21)으로도 번역되었다. 구약에서 상속은 토지를 분배받는 일이나 재산을 물려받는 일을 의미하는 뜻으로 주로 쓰였다(잠 19:14).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말하는 의미로도 쓰였지만 성도가 들어가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는 의미로 본문에서 쓰여 졌다.

25장에서 첫 부분은 열 처녀 비유는 다음에 오게 될 나라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였고, 달란트 비유는 다음 무대를 위해 열심히 장사하는 자들처럼 왕국의 백성답게 부름에 합당하게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와서는 결산하는 장면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른편 양들이 받는 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청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 된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것이었다.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다는 것은 왕이 자기 아들 왕자에게 왕위를 물러줄 때 쓰는 말이다.

2. 나그네 되었을 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5-36)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37-39)

일반적으로 나그네(stranger)란 집을 떠나 여행길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지만 성경에서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를 나그네로 보았다(히 11:13; 벧전 2:11). 천국을 본향으로 삼는 사람은 이 땅에서 나그네의 모습으로 삶의 길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모두 이 땅에서 나그네로서의 삶의 자세를 견지했으며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갔다(히 11:13-14).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라 칭함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해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하신다고 하셨다(히 11:16). 나그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으로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애굽에서 나그네로 지낸 것을 기억하라고 명령하셨다(출 22:21; 23:9; 레 19:33-34; 신 10:19; 23:7). 그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는 나그네들을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쉬는 것(출 23:12), 공평한 재판을 받는 것(신 16:18), 추수 때 이삭과 열매를 남겨 두는 것(레 19:9-10),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의 소산을 주어 먹게 하는 것(신 26:12) 등을 나그네에게 행하라고 명하셨다. 선지자들도 나그네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백성들에게 가르쳤다(사 58:7; 겔 18:7).

심지어 나그네들도 할례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있었으며(출 12:43-44, 48) 이스라엘의 절기와 희생 제사, 율법에 관련된 조항들을 준수해야 할 의무가 주어졌다(출 12:49; 레 16:29; 17:8-9; 18:26; 민 15:29). 성경에는 아브라함(창 18:1-8)이나 롯(창 19:1-3), 욥(욥 31:32) 등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예수님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중요하게 가르치셨으며(마 25:35-40) 예수님의 제자들도 나그네를 대접하는 삶을 강조하여 가르쳤다(롬 12:13; 갈 6:10; 딤전 6:18; 딛 1:8). 그리고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은 감독과 장로, 참 과부의 자격 요건 중 하나였다(딤전 3:3; 5:10; 딛 1:8).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갈 때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권면하였다(벧전 1:17).

그리고 여기서 특징은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만왕의 왕 그리스도) 한 것이란 뜻이고 '선을 행한 자나, 악한 자'는 자신들은 소자가 왕인 것을 모르고 살아온 것뿐이란 것이고, '작은 소자에게 행한 일'로 의인과 악인으로 신분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작은 자에게 행한 일로 영벌과 영생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31)

이곳에 언급한 내용들은 연구 주제로 제시해 본다. 구약의 개념은 하나님을 섬심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신약에서의 구원은 사람을 섬겨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구역에서는 '신본주의' 신앙을 요구한 것이고, 신약에서 예수님의 요구는 '인본주의'신앙에 대해 가르침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는 기존교회에서 신앙을 배워 온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만왕으로 오셨지만 짧은 생애동안 섬기시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까지 지시고 인류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지금 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라고 한 것이 아니고, 지극히 작은 소자에게 초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본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전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말씀을 드려야 하는가? 왜 구약개념과 신약개념이 다른 것이라고 하는가? 그것을 먼저 이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구약에서의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는 객관적 관계였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을 섬겨서 구원은 받는 것이었고, 신약에서는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는 주관적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섬기는 대상도 바꾸어져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멀리서 섬겼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하나님(예수님) 안에'(요 15;7) 있어서, 나와 하나님(예수)이 한 몸이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섬기는 댕상도 달라진 것이다. 왜, 우리가 사람을 섬겨야 하는가? 이것은 우리가 예수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우리 몸이 성령이 거하는 전(고전 6:19)으로서 교회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사람을 섬기는 자로 이 세상에 오셨고(막 10;45), 우리 곁에 섬기는 자로 계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눅 22;27). 본문에서도 소자를 섬기는 자에게 구원이 약속되어 있고(46), 예수를 사랑하면 사람(양)을 치라, 먹이라고 한 것은 섬기라는 뜻으로 말씀 하신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본다(요 21;15-17).

이러한 말씀들은 지금까지 전통 지식으로는 이해가 어려울지 몰라도,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말씀들이 아니라, 재조명에 의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깊이 검토해야 할 주제라고 본다.

지금까지 우리가 다니던 교회구조는 종교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신의 자리에서 섬김을 받는 대상이 되어 왔지만 성경대로라면 그리스도는 몸으로서의 교회여야 하고, 몸으로서의 교회일 때는 섬김의 대상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쉽게 이해 될 수 없기 때문에 연구 주제로 제시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가 구약개념의 형태에서 신앙을 배우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이해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적극적으로 검토를 해야 한다. 아직도 전통지식에 머물러 있다면, 좀 더 포괄적으로 성경의 역사와 내용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구약의 마지막 시대 때 400년 동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없어서 백상들이 방자한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 광야에 세례 요한이 나타났고 또한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서 나타나신 것이 아닌가?

예수가 오신 것은 '성전을 헐고' 새로운 몸으로 성전 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과 승천을 하시고,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었던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엄청난 사건을 그동안 종교주의 자들에 의해서 신약의 사건들을 교리로 만들고, 실제적으로 신앙생활은 구약의 시스템을 도입해서 종교로서의 교회를 만들어 가르치고 유지해 온 것이 아닌가?

21세기에 교회개혁이란 화두가 이미 나와 있다는 것은 결코 유연으로 넘기거나 모른 채 하고 지나칠 수 많은 없는 중요한 주제가 아닐까? 그렇다면 개혁의 대안으로 연구대상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관심을 가지고 함께 검토했으면 좋겠다.

3.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 24;31)

위의 내용들이 진리로서 실현이 되려면, 지금의 구조로는 불가능 할 수밖에 없다. 말씀의 실현을 위해서는 부득이 형태변화가 와야 한다. '하늘 이 끝과 저 끝에서 모은 다'는 말씀을 교회당 형식에서 실현될 수는 없다. '모은다'는 말을 어느 공간에 '모은 것'으로 이해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지구촌 전체가 만왕의 왕 되시는 주님의 통치 영역이 되게 하신다는 것으로 이해를 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된다.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27). 재림의 주로 오시는 왕은 공간도 시간도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부여된 마지막 사역으로 준비해야 할 일은 왕의 통치 영역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맡겨주신 달란트로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이다.

'양과 염소의 심판은 계시록 20;11-15절에 나타나 있는 소위 백 보좌 심판의 장면을 간략하게 미리 예언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4. 영벌과 영생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40-46)

영벌(永罰, Eternal punishment)은 죄인들이 지옥에서 받게 되는 영원한 형벌을 말한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는 영벌에, 양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마 25:46). 요한일서에서는 두려움에 형벌이 있으며, 사랑은 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했다(요일 4:18). ‘영원한 불’(마 18:8; 25:41; 유 1:7), ‘영원한 죄’(막 3:29), ‘영원한 결박’(유 1:6), ‘영원한 멸망’(살후 1:9) 등은 모두 비슷한 개념들이다.

영생(Eternal life)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 47절에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 복음서에 만 31번 기록되어 있다. 영생이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의 축약형이다. 이 말은 일반적으로 ‘생명’을 의미하는 ‘조에’(zoe)와 ‘영원한’의 뜻을 가진 ‘아이오니오스’(aionios)를 번역한 것으로, 신약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 있다. 영생은 살아있는 것이 끝난 후의 단순한 시간 연장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생각 속에서 그 시작을 갖기 때문에(엡 1:4) 끝이 없는 지속이다. 그리고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생명과 질적으로 같다(요일 5:11-12). 따라서 우리의 영생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예정하심과 선택하심에 있다 해도, 영생에 관한 우리의 경험은 우리의 참된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요 17:2-3; 갈 2:20) 얻는 거듭남과 함께 시작되는 것이다.

영생은 성경에서 요한복음(3:15-16, 36; 4:14, 36; 5:24, 39; 6:27, 40, 47, 54, 68; 10:28; 12:25, 50; 17:2-3)과 요한일서(1:2; 2:25; 3:15; 5:11, 13, 20)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영생의 시작을, 요한복음 6장에서는 그것의 계속을, 요한일서 1:1-4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영생의 근원이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영생은 일상적인 육신 생활과 대조되어 나타나 있다. 물론 인간의 삶은 무한히 계속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육신적 생명은 가졌지만 영생을 갖지 못한 것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이며, 정죄된 상태, 잃어버린 상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영생을 가진 사람들, 즉 구원받은 것으로 선언되고 멸망치 않을 것으로 약속된 사람들과 대조된다(요 3:15-16, 18, 36; 5:24; 10:9).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를 믿는 동시에 성령의 활동하심으로 부여받는다. 영생이란 중생과 동일시될 수 있으며 구원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이후에 영원한 친교에 들어가리라는 약속을 갖고 있는 것뿐 아니라 현재 영원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리는 것을 의미한다. 과학 시대에 영생을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생명이 육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 멸하는 것이 아니고 더 영원한 생명에 의해 덧입힘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롬 5:21). 지상의 삶은 영생과 연결된 삶이다(요 5:24). 기독교인들의 삶은 따라서 죽음을 뚫고 부활의 세계를 향해 가는 종말적 출애굽의 삶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 정착할 수 없고 세상의 행복에 안주할 수 없다. 다만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삶을 충성스럽게 성실하게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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