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4
아담의 실패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 방식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구원이 필요한 인간, 성경이 기록될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 아담의 실패에 있었다. 창세기 2:7은 최초의 인간 창조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이 구절에서 사람에 대하여 몇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1)사람의 근거지는 땅이라는 것이다. 땅(아다마)과 사람(아담)은 ‘붉다’는 의미를 가진 같은 어원을 가진다. (2)사람의 재료는 흙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흙이라는 번역된 정확한 의미는 먼지(dust)다. 인간의 연약성을 보여준다. (3)그러나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창조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기다. 이는 단순히 숨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은 피조물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창조되었다. 창세기 2:19을 보면 다른 피조물들은 단지 흙으로 지으니 생물(living soul)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은 흙에다가 하나님의 생기가 더해져서 비로소 생령(living soul)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생물이나 생령의 원어는 같다. 사람의 강함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 때 나타난다. (4)원문에서는 ‘아담’으로 기록되었으나 번역할 때는 보통명사인 ‘사람’으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곧 아담은 하나님 창조한 최초의 인간의 고유명사이면서, 단지 사람을 지칭하는 보통명사로도 사용되고 있다. 성경은 약 500회를 보통명사 사람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인류의 대표자 아담
아담은 전 인류의 조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아담 안에 앞으로 태어날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인간을 품고 있다. 인간은 누구인가고 물을 때는 아담을 들여다보면 된다. 아담의 창조와 삶을 들여다보면 내가 보인다. 인간이 보인다. 그렇게 아담은 전 인류를 대표하고 있다. 병원에 가면 가족력을 기록하라고 한다. 가족 중에 어떤 질병을 가지고 있는지 기록하라고 한다. 왜냐면 가족이 그러하면 나 역시 그 질병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다. 아담의 행보는 그래서 중요하다. 모든 인간은 아담이 걸어간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것이 때문이다.
아담은 땅을 다스릴 자로 창조되었고 혼자가 아닌 너와 내가 더불어 살아갈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아담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었고 에덴동산에서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도록 준비되었었다. 그런데 아담의 행보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아담은 자신이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아담이 아담다울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임을 잊어버렸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아담의 실패, 그렇게 인간에게서 에덴동산을 사라져 버렸다. 영원한 삶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선언을 들어야 했다. 육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 그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은 지옥이다. 다시는 행복을 바랄 수 없는 그곳이다. 다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는 곳이다. 그래서 인간은 구원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렇게 최초의 인간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로서 완벽하게 창조되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길을 걸어갔고, 아담 이후 전 인류는 아담과 같은 일을 걸어간다.
아담의 실패
(1) 아담의 실패란 무엇인가?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의 선언이 있다. 그 선언은 창세기 1:1에서 보여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하나님은 그 만드신 모든 것의 주인이시라는 것이다. 곧 창조주 하나님로서의 선언이다. 주인으로서의 하나님, 창세기 1장은 이를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는 하나님의 주인되심의 권리 곧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언이다. 아무리 인간에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맡겨졌다고 해도 인간 역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어야 했다.
(2)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에덴동산이란 행복의 울타리란 의미다. 인간은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그 행복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사는 울타리 되시는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울타리를 걷어차기로 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의 삶이 아닌 자신이 보기에 좋은 삶을 살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이 바로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어버린 타락 사건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상징이다. 최초의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이 앉아버린 것이다. 인간의 삶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겠노라고 선언한 사건이 바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어버린 사건이다.
(3) 하나님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인간 각자가 주인이 되어 사는 삶에는 더 이상 에덴은 없었다. 에덴(행복)의 삶을 대신하여 고통과 땀이 동반된 수고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결국은 죽음으로 인생을 마쳐야하는 삶이 주어졌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인간에게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류의 새로운 대표자 예수 그리스도
(1) 전 인류를 대표했던 아담은 인간에게 죄를 끌어왔다. 이는 단순히 윤리적인 죄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근본적인 죄를 말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모르는 채로 태어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인이 아닌 자신이 주인된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 채로 살다가 죽는다. 이는 비극이다.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다.
(2) 이에 하나님은 스스로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을 성경을 통하여 제시한다. 성경은 인간을 구원할 자를 보내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예수님은 성경의 약속을 따라 마침내 인간의 땅에 오신다.
(3) 예수님은 최초의 인간 아담이 실패한 그 자리에서부터 전 인류를 대표하여 회복시켜 가신다.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 기도하신 후 주어진 사탄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신다. 승리의 삶은 예수님의 살아가는 삶의 발자취에서 계속 이어진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모든 취약함은 다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죄에 대하여 승리하셨다. 히브리서 4:15에서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4) 예수님은 이제 모든 인간의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다. 이에 대해 베드로전서 3:18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5) 성경은 예수님을 제2의 아담이라고 선언한다. 최초의 사람 아담이 실패한 것을 회복시키는 자로서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으로서 인류의 대표자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성경은 선언한다. 로마서 5장은 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그 일부분을 보자. “한 사람(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로마서 5:19)
인류의 대표자로 실패한 최초의 사람 아담을 택하여 여전히 자신이 주인인줄 착각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길을 걸어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가는 창조세계의 원래 모습 곧 땅을 바로 다스리며 사는 아담을 회복하여 살 것인가?
김성철목사의 기독교와 종교 5
고통인가, 죄인가?
창세기 5장에는 오래 산 사람들의 기록이 나온다. 제일 오래 산 사람은 969세 그러니까 거의 천세(1000년)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창세기 5장은 오래 산 사람의 기록이 아니라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데 살고 죽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죽음을 선택하는 자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태어나고 죽는 것은 신에게 맡긴다. 그래서 사는 것이 문제다. 어떻게 사는가?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며 살아간다고 말씀한다(마태복음 11:28). 창세기 3장에서는 고통이 있는 수고와 땀을 흘리는 수고를 말한다.
고통이 문제다
태어나고(生) 늙고(老) 병들고(病) 죽는 것(死) 자체가 고통이며(苦苦), 사랑하는 자와 헤어지는 것(愛別離苦),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것(怨憎會苦),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는 것(求不得苦)은 무너지는 고통(壞苦)이다. 그리고 ‘나’라고 하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五陰 또는 五蘊盛苦)으로 인해 오는 행고(行苦)도 있다. 곧 산다는 것 자체 모두가 고통이다(一切皆苦)고 함으로 인간의 문제는 고통이라고 불교는 말한다.
불교의 교리는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와 많이 닮아 있다. 곧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이를 불교에서는 시간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은 변하며(諸行無常), 공간적인 관점에서 고정불변의 실체인 나는 없다(諸法無我)고 말한다. 한마디로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하는 것들에게 집착함으로 고통이 온다고 설파한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다른 각도에서 말하는데, 전도서에 보면 모든 것의 실체는 있지만 그것을 잡으려고 하면 안개를 잡는 것처럼 헛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죽음을 전제한 말이다. 그러니 결국은 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고 수고하다가 죽음 앞에서 허무해지는 자신을 보게 된다. 이러한 것이 고통이라는 것이다.
불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집착을 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통의 원인은 실체가 없이 변하는 것들에게 집착함으로 오는 것이므로 집착을 멸하고,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 길을 닦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라고 말한다. 이를 고집멸도(苦集滅道)라 하며 이를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 하여 사성제(四聖諦)라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소원한다. 석가모니는 인간의 문제인 고통은 어디에서 오며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서 해탈에 이를 수 있는가를 깨달았다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깨달은 자 부처(붓다. 산스크리트어: बुद्ध, Buddha)가 되었다. 이렇게 종교는 인간의 문제를 고통으로 본다. 그래서 인간에게 고통이 없는 낙원을 목표로 삼는다.
죄가 문제다
기독교에서도 고통의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간의 문제를 죄에서 찾는다. 기독교는 죄의 문제를 관계의 관점에서 다룬다. 죄 때문에 너와 나의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당연히 고통과 땀이 동반된 수고로운 삶이 시작된다. 고통이 동반되지 않는 관계의 행복은 없다. 그러므로 고통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인간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라고 본다. 살아가는 삶 자체가 수고롭긴 하지만 태어나 ‘나’라는 실체가 어떠한 존재임을 바로 알면 그것은 복이며, 아름답게 늙어 죽음을 가치있게 만들어 가는 삶을 사는 것의 소중함을 기독교는 말한다. 기독교 문명의 서양세계는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여긴다.
특별히 기독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다. 하나님과 관계 회복이 없이는 천국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문제는 죄이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렇게 죄의 장벽은 무어지고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 이야기다.
성경은 인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고 선언한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인간에게 희망은 없다. 왜냐면 지금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하나님과 화해 이것만이 인간의 살 길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라. 죄에서 구원을 받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것이 기독교 메시지다. 어떻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죄의 문제에서 해방된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곧 영원한 생명이 약속으로 주어진다.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