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1)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다
예수를 죽이려고 의논하다
(마태 26;1-16)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주간의 기사를 기록하고 있다. 전통적인 교회들은 이 기간을 소위
‘성 고난’(Holy Passion Week)이라는 이름을 붙여 절기로 지키기도 한다.
1.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1-5)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요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1-5)
먼저 유월절(Passover)역사와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자. 유대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이다(신 16:1-7). 유월절은 히브리어 ‘페사흐’(pesach)에서 파생된 단어로 ‘넘어간다’는 의미이다(출 12:27).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애굽의 초 태생은 모두 죽이셨으나 문설주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장자는 죽음을 면하게 하신 것을 기억하며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축제가 유월절이다(출 12:21-30). 이 축제는 7일 간 지속되는데 공식적인 희생 제물을 드리며 개인은 누룩 없는 빵을 일주일 간 먹는다(출 12:15).
첫 번째 유월절은 모세는 이스라엘 회중에게 각 가족대로 첫 달 10일에 양을 취하라고 명령하였으며 (출 12:3-4) 14일 밤에 그 양을 잡아(출 12:6) 우슬초 묶음에 피를 적시어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출 12:7) 고기는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먹고, 남은 것은 불에 태우도록 하였다(출 12:8-10). 그날 밤에 이집트 땅의 모든 첫 태생(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은 죽었으나(출 12:29-30) 피로 표시를 해둔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전하였다. 바로는 그의 교만이 꺾여 한 밤중에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출 12:31-33)”고 명령하였다.
유월절의 영적인 의미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이미 여러 번 예고하셨는데(마 16:21; 17:22-23; 20:18-19) 좀 더 구체적으로 십자가 죽음 사건이 유월절 기간 중에 발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6:2). 이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유월절을 연결시킴으로써 예수님 자신을 유월절 희생 양으로 상징화하신 것이다. 그리고 유월절 사건을 통해서 바로 왕의 압제 아래서 고통 받고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자유하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독생자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출애굽, 즉 새로운 구원의 때를 열어 가신다는 의미이다.
한편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이 된다는 것은 곧 최후의 유월절 양이 된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구약의 유월절이 신약의 십자가 사건과 성찬식으로 연결된 것이다(마 26:26-29). 그래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속죄 제물 어린 양이 필요 없게 되었고 예수님의 보혈을 믿음으로써 죽음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가야바(Caiaphas)라는 인물에 알아보자. 가야바는 대제사장 안나스의 사위로 로마의 가이사, 유대 총독 빌라도와 동시대 사람이다. 로마 정부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어 AD 18-36년까지 재직하였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AD 36년에 수리아의 총독 비델리우스에 의해 쫓겨났다고 한다.성경 속의 가야바라는 인물은? 많은 사람들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을 따르자 그는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예수님을 죽일 것을 모의하였다(요 11:47-48). 이때 그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 죽어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고 발언하였다(요 11:49-50). 그리고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어 왔을 때 예수님을 심문하고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막 15:1; 요 18:28). 그 후로도 가야바는 사도들을 핍박했다(행 4:6-7).
마태복음 26;1-5절까지의 내용은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네 번째 예고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가 지상에서 마지막이 임박했음을 알리되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4백년의 노예에서 출애굽 마지막 날 밤에 노예에서 벗어나게 되는 증거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해방 받던 날을 기념하여 유대인들이 지켜온 가장 큰 절기이기도 하다(출 12장).
이곳에서도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하신 말씀으로 유다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이지만, 한번 정해진 마음은 바꾸지를 못했다. 이러한 현상은 유다 뿐 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있음을 종종 경험한다. 한번 닫친 마음은 열지를 못하고 한번 가진 감정은 돌이키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 듯싶다.
예수님의 일행은 앞으로 닥쳐올 긴박한 순간을 놓고 공포심에 긴장하고 있을 때 다른 한편으로는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은 산헤드린 공의회로 가야바의 뜰에 모여 예수님을 죽일 계획울 하고 있었다. 회의 내용은 죽일 시기를 놓고 의논한 모양이다. 결과는 유월절을 피해서 죽이자는 의견들이 나왔다.
이유는 명절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데 예수는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사람인데 잘못하면 민란이 일어날 것을 염려해서였다. 이들은 백성의 최고 종교지도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자들이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닌가? 그것은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 즉 종교를 기반으로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의 모습이다. 이들이 결국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자들이 되어 스스로 지옥의 영벌에 처하게 되는 주인공들이 되었다.
2.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붓다(6-16)
(1)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의 사건(6-9)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먼저 베다니(Bethany)라는 지명에 대해서 살펴본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3km 지점 정도에 위치한 마을(요 11:18)로 감람산 기슭에 위치한 곳이다(눅 19:29). 히브리어로는 ‘베트 아니야’(Beth ‘aiyyah)로 ‘가난한 자의 집’, ‘고뇌자의 집’을 뜻한다. 탈무드에 의하면 ‘베트 히니’(beth hini)로 ‘푸른 과실의 집’을 뜻한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 사는 회교도 주민들은 나사로를 성인으로 모시고 이곳을 나사로의 이름을 따서 ‘엘 아지리예’(el-‘Azariyeh; 나사로의 곳)로 부른다. 이곳에는 나사로의 납골소가 있으며 비잔틴 시대와 십자군 시대에 세워진 교회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행하신 일들에 대해서 살펴보면,
(1)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월절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이곳에서 머무르셨다(마 21:17; 막 11:11).
(2)예수님과 절친한 관계를 이루었던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가 이곳에 살았으며(요 11:1) 예수님은 이곳에서 죽어 있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요 11:1-44).
(3)예수님은 이곳에 사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는데 그때 한 여자가 값진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대접하였다(막 14:3-9).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가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하셨으며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이 행한 일도 말하여 기념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막 14:8-9).
(4)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 이곳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셨다(눅 24:50).
향유(Perfume)는 향이 나는 기름을 말한다. 방향 물질을 감람유에 섞거나(출 30:23-24) 나드 처럼 그 자체이 향기가 있는 기름이다(막 14:3). 본문에는 예수님의 머리(마 26:7), 발(눅 7:38; 요 11:2)에 향유를 부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으며 예수님의 시신을 위해 향품과 향유를 예비한 여인들도 있었다(눅 23:55-56).
(2)예수님께서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셨다(10-12).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3)유다가 은 삼십 때문에 결국 배반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14-16).
"그 때에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위의 말씀들은 예수께서 베다니에 살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있을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 이르신 말씀이다. 요한복음에는 베다니 마르다의 집이라 했고 향유를 예수님께 부어드린 여자는 마리아라고 했다. 여기서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요 12;3-)고 했다. 이곳에서 불평했던 제자들이 모두 불평한 것이 아니라 가룟 유다라고 이름이 명시되어 있고 사실은 가난한 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돈 궤를 맡은 자이기에 돈을 훔쳐가는 도둑이라고 명시되어 있다(요 12;4-6).
여기서 우리는 똑같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그 대표적으로 가룟유다와 향유를 예수께 부어드린 마리아의 유형으로 구분이 되는 것 같다. 예수를 한평생 혹은 수 십 년 믿는 분들 중에는 유다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상당수가 있을 것이다. 유다의 유형인 사람들은 항상 머리에서 돈을 계산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예수를 열심히 섬기면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부류는 주를 위한 삶에는 계산도 없이 자기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아낌없이 주께 부어드리는 사람의 유형이다. 마리아가 부어드린 향유는 처녀가 시집가서 첫날밤에 신랑에게 부어주는 유대인들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것을 부어드린 것이라 한다.
이 사건을 놓고 항상 돈을 탐하고 살아왔던 유다는 허비했다고 분개하면서 마리아를 책망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마리아를 칭찬했다. 그래서 ‘이 여자를 괴롭게 하지 말라 이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함이라’고 했다.
돈을 탐하며 살아왔던 유다는 이 일로 인해서 예수님과 의견차이가 생겼고 마침내 돈만을 생각해온 유다는 자기 선생마저 돈을 받고 팔아넘기는 짓을 했다. 그렇게 돈을 탐했던 유다가 부자로 잘 살았는가? 돈을 탐한 그는 결국 돈으로 인해 영원히 멸망의 자식이 되고 말았다. 예수를 따라 살겠다, 혹은 어디든지 가오리다라고 결심하면서 살겠다는 사람들은 돈이냐 예수냐를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 이유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와 마리아의 사건은 믿는 자들에게는 큰 교훈을 우리에게 넘겨 준 사건이라고 본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13)
여기서 예수님의 교훈에는 모순이 있지 않는가? 하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가난한 사람을 챙기라고 하셨던 예수님, 그리고 25장에서 양과 염소의 비유 이야기 가운데서도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를 챙기는 것이라고 하셨던 예수님이 어찌하여 마리아의 사건을 놓고는 가룟 유다와 정 반대되는 견해를 가지셨는가?
필자가 지금까지 ‘신본주의 사상’은 구약개념에서 온 것이고, 신약의 개념은 인본주의다‘란 말을 해 왔는데, 이 사건을 놓고 보면 잘못된 판단이 아닌가? 하고 반문을 제지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복음서 전체의 기본적 흐름이 사람을 사랑하고 챙기라는 것이 주제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신약시대에는 ’인본주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사건에서 더 명확하게 확인 할 수 있다.
왜 사람을 챙겨야 하는가? 라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다. 예수가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사람을 사랑해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머리로 해서 예수님의 몸에 연결된 지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마리아의 사건은 예수와 우리가 한 몸이 되는 일 즉 죽으심을 위해 준비한 사건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마리아가 자기에게 향유를 부은 것은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해를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이 사건 역시 시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우리와 한 몸이 되기 위해서 앞으로 몇 시간 후에는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와 예수가 한 몸이 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첫 번째 봉사가 마리아의 향유 사건이 된 것이다. 이 과정을 겪지 아니하면 우리는 예수와 한 몸이 될 수가 없는 일이다.
이 사건을 놓고 유다와 예수님과의 시각차가 생긴 것은 유다는 표면적 사건을 놓고 판단을 한 것이고, 예수님은 감추어있는 내면적 사건들을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유다를 책망하신 것이다. 이런 사건을 보면서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고 비판하고 배척하고 죄인으로 몰아가는 행동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바른 태도는 아니다.
이 사건으로 나타난 결과는 결국 돈을 탐냈던 유다는 자기의 갈 길을 가는 모습이 목을 매고 멸망으로 생을 마감했고, 소중한 자기 소유로 예수님의 마지막 길을 예비했던 마리아는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이 기념되는 일이 되었다.
모든 일에는 타이밍(timing)이라고 하는 표현하는 때가 있다. 그래서 때가 주어 졌을때 그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 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예수님은 고난을 겪고 십자가를 지셔야하는 시점에 있었다. 겉으로 들어 낼 수는 없지만 그 속마음은 두렵고 슬프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일을 앞에 놓고는 너무나 외롭고 처절함이 있었을 것이다. 이 때 마리아의 옥합향유는 예수님에겐 너무나 큰 위로가 되셨을 것이다. 배부를 때 진수성찬보다 목마를 때 냉수 한 잔이 평생을 잊을 수 없는 감동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