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4)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기도
겟세마네에서 마지막 기도
(마태 26;36-46)
1.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36-38)
예수님은 최후의 기도를 하시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을 찾으셨다. 유다는 떠나고 11명의 제자들 중에 일곱 명은 동산아래서 기다리게 하시고 베드로와 세배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셨다. 이 세 사람은 지난번(마 17:1) 변화 산에도 데리고 갔었고,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현장에도 데리고 갔던 사람들이다(막 5:37-41).
세 사람만 선발해서 데리고 간 것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있어 달라고 하는 부탁을 하기위서였다. 그래도 세 사람만이라도 고민하여 죽게 된 예수님 자신이 정신적으로 서로 의지 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 다오' 얼마나 슬퍼하고 고민이 되었으면 그렇게 하셨을까?
절박한 상황이 닥쳤을 때 단 한사람만이라도 곁에서 위로해 주고 작은 말 한마디라도 격려해주고, 대화라도 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보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중에 한 사람도 없는 밧모 섬의 외로운 고독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지금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고 두렵고, 슬프고, 견딜 수 없는 애절한 마음에서 세 명의 제자들을 바라보면서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성을 가지신(요 1;14) 예수님의 측은하신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지금 여러분 곁에는 슬퍼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는가? 여러분으로부터 위로의 말 한마디라도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는가? 둘러볼 필요가 있다. 만일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39-41)
'아버지여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인간 예수님의 기도였다. 하나님의 계확을 뻔히 알고 계셨던 예수님, 얼마나 두렵고 고민이 되셨으면 이렇게 기도하셨을까? 그러나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과연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구체적인 기도를 하신 것일까?
2.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다시 오사 보신즉 저희가 자니 이는 저희 눈이 피곤함 일러라"(42-43)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는 같은 내용 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이미 각오하고 하나님께 위임하신 기도였다.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다시 왔을 때 제자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렇게 당부했지만 제자들은 육신의 피곤을 못 이겨 잠들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깨우지 않고 다시 돌아가 기도하셨다.
우리가 기도하는 본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믿는 자들의 기도란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다, 내 자신이 설정해 놓은 것을 성취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세 번의 기도는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 자신에게서 성취되기를 위한 기도가 된 것이다.
3. 이제는 자고 쉬라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44-46)
'이제는 자고 쉬라' 더 이상 깨어 있어도 별 의미가 없다. 이유는 이미 깨어 기도해야할 때는 다 지나 갔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부탁하신대로 제자들도 깨어 기도했었다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실수는 하지 안 했을 것이다.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제자들은 잠자고 있을 때 유다를 비롯한 원수들은 예수를 잡기위해 밤잠을 포기하고 흉측한 무기들을 준비하고 역할을 분담하고 군호를 짜고 마침내 유다의 인솔로 횃불과 몽치들을 들고 예수님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요즈음 성화들이 많이 그려져서 신자들의 가정에 벽에 걸려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 예수님이 바윗돌 위에 두 손을 맞잡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기도하는 모습이 있는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림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세 명의 제자들은 저 만치 떨어진 바위틈에서 잠자는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그리고 저 멀리서 횃불을 밝혀들고 큰 무리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함께 그려진 것을 보게 된다. 나는 그 그림을 보는 순간 마음이 뜨거워지는 동시에 잠들어 있는 제자들이 그렇게도 좋지 않는 것으로 미워 보일 때가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오늘 이 말씀을 읽게 되면 그러한 성화들을 기억하게 된다. 그러면서 내가 나 자신에게 스스로 마음의 다짐을 해보면서 어떤 위기를 만났을 때 잠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예수님은 여러 장면에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자기를 믿는 백성들에게 수차례 하셨다. 물론 바쁜 세상이지만 전통에 묶여 잠들지 말고 각자의 영혼이 항상 깨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45). 예수는 죄를 범치(벧전 2;2)도 아니하시고 또한 죄가 없으신(요일 3;5) 분이시지만 지금 죄인들의 의해서 도리어 당신이 죄인의 모습으로 끌려 가셔야 한다. 이러한 모순이 어디 있는가? 대제사장, 서기관, 백성의 장로들, 바리새인들이나 사두개인들은 산헤드린 공의회 위원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죄인으로 끌려가신 것이다.
이와 같은 모순은 인간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모순이기도 하다. 중세 때, 영국의 개혁자 위클리프(Wycliffe, John/1329-1384)은 교황의 모순을 지적하고 나섰다. 성찬식의 '화체설'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인의 신앙 표준은 교황청의 교지가 아니라 성서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교황청에 도전 했다가 마침내 그의 저서는 모두 불태워지고, 심지어 그가 죽은 후에도 무덤을 파서 그의 뼈까지도 화형을 당하는 참담한 일도 있었던 것이다.
위클맆의 영향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그의 영향을 받은 이가 체코의 요한 후스(Johannes Huss/1370-1415)였다. 그는 성직자들의 토지소유의 세속화를 반대하는 등 성직자들의 비리와 모순을 지적하고 반대하다가 교회 세력에 의해서 파문을 당하고 마침내 화형을 당했다. 역사는 이들을 가리켜 개혁 전 개혁자들이라고 한다. 요한 후스의 영향을 받은 이가 바로 루터였다.
교회 안에 기득권 세력이 형성되면 어느 순간 하나님은 교회에서 손을 떼시고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활동에 의해서 운영되지 않고, 전통적 유산만 남아 그 유전에 의해 유지하게 된다. 유전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완되고 깊이 자리를 잡으면서 마침내 유전은 전통이 되어 성경의 권위를 뛰어 넘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전통을 보전하고 유지시키기 위해서 교회의 시녀(侍女)로 전략이 된다.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교회의 비성서적인 모순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고 지적하는 사람들은 기존 교회세력에게는 죄인 취급을 받게 된다. 이와 같은 일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에게도 있었던 일이고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중세 때도 있어 왔고, 지금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라 죄인의 손에 팔려 간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구속사 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