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6장(5) 공회 앞에 서신 왕

by wgma posted Apr 10, 2018 Views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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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6장(5) 공회 앞에 서신 왕

공회 앞에 서신 왕

(마태 26;47-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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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다의 입맞춤(47-56),

“말씀하실 때에 12명중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 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잡으라 한지라”(47-48)

몽치(Club)는 무기로 사용되었던 짤막하고 단단한 몽둥이를 말한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파송된 무리들은 검과 몽치를 갖고 왔다(마 26:47).


군호(signal)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암호를 말하는데 어떤 일에 대해 미리 정한 약속으로(사인으로) 알리는 것을 말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께 입맞춤으로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에게 예수님을 알려주는 군호를 삼았다(마 26:48; 막 14:44).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한 식탁에 앉아 빵을 스프그릇에 함께 손을 넣던 제자가 원수들을 이끌고 예수님 자기 앞에 나오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 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49-50)


랍비(Rabbi)란 이스라엘에서 율법사 혹은 학식 많은 교사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랍비는 ‘크신 분’이란 뜻을 가진 ‘라브’(rab)에 소유격 접미어가 붙은 형태로 ‘나의 주’, ‘나의 크신 분’이란 뜻이었다. 이것이 점차 ‘선생’이란 뜻으로 유대인의 율법 교사를 존경하여 부르는 칭호가 되었다. 성경에서 랍비라고 불렸던 사람으로는 바리새파의 교사(마 23:7), 세례 요한(요 3:26), 예수님(막 9:5; 요 3:2)등이 있다. 또한 ‘랍오니’라는 말은 랍비의 경칭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마리아가 예수님을 불렀던 호칭이었다(요 20:16). 예수님께서 랍비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당시 서기관들이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했던 것과 달리 제자들을 향해 랍비라는 말을 듣지 말라고 하셨다(마 23:8). 이 말은 단순히 문자적으로 ‘선생’이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의미이기보다는 교회 안에 종교적인 계급이 생겨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칭호에 따르는 영광에만 마음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유다는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라는 호칭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 적으로 선생으로만 호칭했다고 한다. 이것은 유다의 개인적인 신앙 인격이 바로 형성되지 못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 장면에서 누가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눅22:48)로 기록되어 있다. 입을 맞춘다는 것은 경의 표시로 혹은 신뢰 한다는 표로 입을 맞춘 거라 한다. 사탄의 사람이 되었을 때는 극치의 가증스런 행위가 표현 되는 것이다. 유다의 이 행동이 바로 그런 행동이 표현된 것이다.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 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꽃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 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51-54)


성질 급한 베드로 칼을 빼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뜨리니 예수께서 귀를 고쳐주시고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고 하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들고 왔는데 베드로의 그까짓 칼 한 자루? 칼로 싸운다면 가당치나 할 일인가? 그리고 이미 초기 산상수훈에서 바른 뺨을 치면 왼 뺨도 대 주라는 말씀을 이졌는가?


지금이라도 열 두 군단이라도 보내 달라 하면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예수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동안 인류를 이끌어 온 질서가 물리적 폭력을 기반으로 해온 것이기에 복음이라는 새로운 질서세계를 이루고자 하심에 본래의 뜻이었다.


이런 원대하시고, 인간의 행복을 위한 새 패러다임을 위한 절차에서 진행된 일을 칼을 써서 망치려는 어리석은 행동이 베드로의 행동이었다. 지금도 필자는 답답하고 마음 아픈 것은 뜻을 함께 하겠다던 사람들까지도 가시적이고, 물량적이고, 그것이 무엇으로건 세속적 힘으로 라도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생각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 다는 점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기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 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 하니라”(55-56)


어두움의 세력은 어둠을 좋아 하는 법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칠 때는 잡지 안 하다가 밤이 되니 횃불을 밝혀 들고 칼과 몽치들을 들었는데 여기 몽치는 성전 수비대가 지참한 무기로 잡으러 왔다? 왜 낮에는 잡지 안 했을까? 앞에서 말한 대로 백성이 무서워서 그 짓을 못하고 깊은 밤을 틈타 온 것이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고 그들 손에 끌려 가셨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큰 소리쳤던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려 둔 채 도망쳐 버렸다. 이게 예수의 사람들이고 이게 인간들의 모습이다.


2) 공회 앞에 서신 왕 (57-68)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 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대 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이다”(57-61)


증인(Witness)이란 어떤 사실에 대하여 직접 알고 있어서 증거하는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은 친히 여러 사건과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증인이 되신다(삿 11:10; 욥 16:19; 렘 42:5). 모세 법은 거짓 증거 할 수 없으며(출 23:1; 레 5:1) 범죄 사실을 확정하려면 둘 이상의 증인을 세워야 한다고 정하고 있고(민 35:30; 신 17:7; 19:15, 18), 상업의 중요한 거래에 있어서도 증인을 세워 공개적으로 하도록 했다(룻 4:9-11). 신약에 와서 증인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관하여 예수께로부터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눅 24:48; 행 1:8; 2:32; 3:15; 5:32; 10:41).

 

여기서 ‘가야바’는 전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사위였다. 본래 대제사장은 종신직이여서 1명이어야 하지만, 이때는 로마의 정치권력이 대제사장이었던 안나스를 퇴임시키고 친 로마 인물인 가야바로 그를 대신해서 대제사장이 되게 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두 사람처럼 보이지만 안나스는 명예만 그렇게 부른 것이고, 실질적 직무인 권한은 가야바가 행사했다.


가야바의 집 뜰에 산헤드린 의원들이 이미 소집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미 죽이기로 작정해 놓고 예수를 잡아 왔으나 이젠 죽일 죄목을 만들어야 했다. 여러 사람들이 이것저것 죄목들을 제시하지만 사형을 시킬만한 죄목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나타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고 하더이다.’ 고 증언을 한다.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이다” 이렇게 증언을 하지만 이것 가지고는 죽일만한 죄목이 되지 못했다. 앞에서 성전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해 온 바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여기 끌려오신 것은 ‘성전’을 헐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성전을 헐어버린 다는 말은, 유대종교를 헐어버린다는 말로, 그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이 종교사슬 즉 죄의 사슬에 묶여 종노릇을 해왔으나(갈4:1-7) 여기서 해방을 시키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이것을 독자가 이해 할 런지 모르지만 종교란 사람이 죄 아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가 없어 만들어 진 것이 종교(구약종교)였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심은 사람들을 죄에서의 해방(종교에서의 해방)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다시 일으키리라” 하신 것이고 “그것은 당신의 육체를 가르친 것”이라 말씀하신 것이지만(요2:19-21) 인간들은 죄에서 해방, 다시는 죄의 멍에를 매서는 안 되지만 거짓된 사탄의 무리들이 ‘양의 옷’ (예수의 이름)을 입고 예수의 육체로 헐어버린 것을 다시 지은 것이 로마교회였고, 그것이 전통이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다음 장면을 보자.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62-64상)


‘왜 아무 대답도 없느냐?’ 증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증거 하는 말들에 대해서 대꾸할 가치도 없고 말을 한다고 해서 이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침묵하실 수밖에 없으셨다. 지금도 ‘종교를 헐어버린 예수’란 말을 못 알아들을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 당시에 ‘성전을 헐라’하신 말씀을 알아들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의 침묵을 깨는 질문이 나왔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지금까지 침묵을 하셨던 예수님으로 하여금 입을 열게 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 하였느니라” 이것은 침묵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당신의 신분에 관한 질문이요,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온갖 거짓증거들은 침묵으로 일관 하셨지만 당신의 신분에 관한 질문에는 침묵하시지 안 하셨다. 빌라도 법정에서도 그러셨다.


“네가 말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 하니라 하고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자가 누구냐 하더라”(64-68)


옛 부터 내려온 우리말에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말이 있다. 지금 예수님과 대제사장 사이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 있는 것이다.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한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우리에게 말하라” 그렇다. ‘네가 말 하였느니라’ 마가복음에는 ‘내가 그니라’로 되어 있다(막14:62). 그리고 예수님은 내친김에 더 설명을 해 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4-)


대제사장은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65-) 하나님의 아들 되신 그분이 사실을 말해 주었는데, 대제사장은 이것을 ‘신성모독’ 한 것이라고 제 옷을 찢고 이보다 더 큰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노발대발 한다. 이게 적반하장이란 거다. 심문을 받아야 할 사람이 돌이여 심판의 주를 심문하면서 ‘신성모독’운운 한 것이다. 진정한 신성모독은 지금 대제사장이 하고 있는 것이다.


대제사장이 누군가? 백성을 대표하여 지금자기 앞에 있는 분에게 경배를 드려야 할 사람이 아닌가? 왜 대제사장은 정말로 무서운 ‘신성모독’의 죄를 범하고 있는가? 지금 예수를 심판하는 이대로 자기가 이분 앞에서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을 왜 모르고 이 엄청난 죄를 범하고 있는가? 왜 이리 되었을까?


여기에는 죄를 짓게 했던 요인 몇 가지가 있다. 그것은 대제사장이나 당시 유대인들이 전통종교지식에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예수님)이 직접 말해줘도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이 기막힌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다. 이들은 이방종교의 대제사장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서 할례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지도자들 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심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이미 선지자들로 예언 된 일이지만 참으로 기막힌 일이다. 심문을 받고 계신 그리스도가 기막힌 것이 아니고 신문을 하고 있는 대제사장의 무리가 기막힌 것이다. 이 일로 말미암아 훗날 이들이 어떤 심판을 받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 뻔 한일 아니가?


이들이 이 엄청난 죄에 빠진 이유는 전통 종교조직의 지식에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룟 유다에게 하신 말씀처럼 ‘차라리 낳지 안 했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던 사람들이다. 이때 대제사장이 되지 안 했더라면 이 같은 악역은 하지 안 했을 탠대하는 측은함이 있다.

이 같은 일은 대제사장 가야바만 범한 죄는 아니다. 중세교회를 이끌었던 당시 교회지도자들이 똑같은 죄를 범해 왔고, 지금도 전통 교회지식에 빠져있는 이들이 범할 수 있는 죄이다. 이분들이 이런 죄악에 빠져드는 이유는 또 있다. 그것은 어느덧 이름만 기독교이지 실상은 세속적 가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세속가치란, 겉에 드러나는 외형적 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은 겉에 드러난 것으로만 판단해서 영벌의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나사렛의 예수, 목수의 아들, 학벌도 없는 자, 생김새도 못생겼고, 호감 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 목수출신, 그가 예수였다. 예쁘게 그려진 초상화? 그건 백인들이 자기들 모습으로 가짜 그림 을 그린 것뿐이다. 이사야가 그린 예수님의 초상화를 보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가 보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1-3)


이런 모습이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하나님의 ‘계시진행’을 보지 못한 어리석은 교만이 결국 거부하게 만들고, 비판하게 만들고, 정죄하는 자리에 까지 이르게 만들어 마침내 용서받지 못할 죄에 빠지게 된다. 지금 거부하고 비판하는 죄의 결과를 생각해 보라,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15:22)


3) 스승을 부인하는 제자 (69-75)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 하겠노라”(69-70) 바깥뜰(Outer court)은 주된 건축물의 바깥에 있는 뜰로, 에스더서에는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기 위한 요청을 하기 위해 아하수에로 왕을 찾았던 하만이 왕궁의 바깥뜰에서 있었다고 적혀 있다(에 6:4). 에스겔은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과 예루살렘 도성에서 떠나시는 것을 묘사한 장면에서 그룹들의 날개 소리가 성전의 바깥뜰까지 들린다고 했다(겔 10:5).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 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 하니라”(74-75)


우리가 말씀을 잊어버리면, 위기의 순간이 닥칠 때, 예수를 부인하게 되고, 이 일로 마침내 심히 통곡하는 일이 벌어진다. 다행이 닭이 울어주었으니까 망정이지, 닭이 울어주지 안 했더라면 베드로는 영영 회개마저도 못 했을 런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깨어 있어라 하신 거고, 하나님의 말씀을 습관 따라 골백번 읽고, 큐티란 걸 밥 먹듯 한 다고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 아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온갖 죄악에 빠져 있으면서 성경을 아무리 배워도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한바 있다.(딤후3:7) 악마의 세력이 된 유대교에서 파송 받아 예수를 잡으러 온 자들은 밤에 와서 예수를 잡아갔다.



베드로도 그 밤에 뒤를 따라 갔다가 어린 계집아이 한마디 말 때문에 놀라,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빠진 것이다. '심지어 저주하며 맹세하기 가지하면서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 14;71)라고 했다. 밤은 악마가 지배하는 세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할 수 없느니라”(요9:4) 밤이 된 어둠의 자식들 세상, 빛의 아들들은 낮을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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