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1-여호수아의 정복

by wgma posted Jun 08,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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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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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정복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 방식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의 땅이 될 것임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아들 이삭, 이삭의 성별된 아들 야곱, 그리고 야곱의 12 아들은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이 된다.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흉년으로 인해 야곱의 가족 70여명은 요셉의 초대를 받아 손님으로 애굽에 거주하게 된다. 요셉이 죽고 애굽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종으로 변했다. 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언약이 지켜지기를 간구했다. 마침내 하나님은 모세를 택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킨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선 자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였고 여호수아는 모세의 명령을 따라 군대장관의 역할을 충실히 행했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그림자처럼 행동했다.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있을 때 산 중턱에서 모세를 기다리던 자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인도 아래 마침내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요단 강 동편 모압 땅에 머무르고 있었고 모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임명한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을 정복한다.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이 여호수아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렇게 여호수아는 출애굽을 완성시켰다.

 

건져내고 인도하여 이르게 하다

 

출애굽기 3:8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과정을 이렇게 말씀한다.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에 데려가려 하노라.” 여기에 4가지 동사가 등장한다. ‘내려가서’ ‘건져내고’ ‘인도하여’ ‘데려가다(이르다)’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해 직접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간다고 하신다. 이는 이스라엘 구원의 역사는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의지적 선언이다. 실제로 인간을 죄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하나님은 스스로 내려 오셨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이다. 사람이되신 하나님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와 닮아 있다.

출애굽을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후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셨다.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애굽의 모든 생명체의 처음 난 것을 죽이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 안에 들어간 자들은 죽음이 넘어갔다. 유월절의 시작이다. 유월절사건과 함께 이스라엘은 출애굽하게 된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낸 사건이다. 유월절사건은 성막제도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관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죽을 자들을 위해 짐승이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단 십자가사건은 짐승이 아닌 예수님이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예수님은 인간을 죄에서 건져내신 것이다. 이를 마태복음 1:21에서 예수님의 이름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헬라어 예수정확히는 예수아의 히브리어는 여호수아이다.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호세아도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모형으로 예수님과 닮아 있다.

말씀의 수행자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까지 인도해 가시는 과정 중에 여호수아가 등장하는 장면은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된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전쟁하는 장면이 출애굽기 17장에 나온다. 아말렉과의 전투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출애굽기 17:10) 싸움에 나갔고 승리하게 되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여호수아의 귀에 외어 들리게 하라고 명하신다(출애굽기 17:14)

여호수아는 갈렙과 더불어 주변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자로 알려진다.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선발하여 가나안을 정탐하게 했다. 40일 정탐 후 보고의 내용은 가나안의 거주민들은 거인과 같고 이스라엘은 그들과 비교하면 메뚜기 같다는 것이었다. 이 보고는 정탐자 모두의 동일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10명과 2명으로 나뉘었다. 10명은 가나안에 들어가면 100% 패한다는 것이므로 가나안 정복을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다. 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나안을 정복하러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이스라엘의 땅이 되게 하셌다고 약속하셨으니 가나안 사람들이 거인같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그들은 자신들의 먹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가나안의 부정적인 면보다는 들어가면 좋은 것에 대하여 이야기 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수기 14:8-9) 이들의 주장에서 눈여겨 볼 내용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따라서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자가 되면 가나안은 이스라엘의 땅이 된다는 것을 경고하여 말하고 있다. 우리의 실수는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어달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진정 두려워 해야 할 존재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경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들의 말을 거부했고 돌을 들어 죽이려 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탐한 날 수를 일년으로 계산해서 40년을 광야에서 믿음의 훈련을 받아야 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심을 예수님 역시 경고하신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태 10:28)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이렇게 마무리 하신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그리고 붙잡히시고 고난을 당하시며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사 사탄의 권세를 깨 부수셨다. 이는 창세기 3:15이 성취되는 사건이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여호수아의 행동 수칙이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가면이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된 자였다. 이러한 여호수아를 통해 예수님께 나아온 자들을 이끌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본다. “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2)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베드로전서 3:18)

 

가나안 정복

하나님은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나안의 정복을 이룰 자로 여호수아를 선택하셨다. 모세는 가나안을 바라보고 요단강 동편 모압 땅에서 죽고 여호수아가 모세의 자리를 이어받게 된다. 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을 보게 된다. 모세는 여호수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다윗과 솔로몬에게서도 나타난다. 이스라엘 국가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왕궁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중심이 되는 나라였다. 다윗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수 있는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이와 같은 일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일어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였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정복함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목적을 이룬 자였고 솔로몬은 성전을 지음으로 이스라엘의 존재 목적을 이룬 자였다. 예수님은 죄에서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셨다. 특히 모세와 여호수아의 관계 설정은 갈라디아서 3:24을 생각나게 한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여 하심이라.”

모세와 여호수아와의 차이에 대해 성경은 의도를 가지고 기록하고 있다. 백성은 모세에게 대하여 끊임없이 불평한다. 모세는 이러한 백성의 불평 불만 원망에 끝내 폭발하고 만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지 못했다하여 모세는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한다. 율법 아래 속한 자들의 모습이다. 율법으로는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 정복은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진다. 거기에는 말씀에의 순종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은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여호수아 1:9)에 근거하여 불평과 원망 없이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의 결국 하나님나라를 들어가는 일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과 닮아 있다. 곧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모형으로 하나님의 인간구속사의 흐름을 이루고 있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2

 

다윗과 같은 왕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된 땅이었다. 야곱의 가족 70인은 당시 흉년을 피해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었던 애굽으로 이사한다. 그리고 400년 후 손님으로 들어간 야곱의 가족은 애굽의 종으로 변해 있었다. 야곱의 후손들은 히브리 민족으로 알려졌고 야곱의 후손들은 20살이 넘은 남자들만 약 60만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이로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한 첫 번째 약속을 이루게 했다. 그들은 더 이상 가족의 개념이 아닌 히브리 민족, 이스라엘 백성으로 변해 있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별칭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한 두 번째 약속을 이루게 하기 위해 모세를 부르고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종에서 해방되게 하셨다. 약속된 땅으로의 행진이 시작된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의 광야 생활을 거쳐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바라보고 모압에서 죽는다. 가나안 땅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된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가 있었다. 가나안 땅의 민족들이 여전히 가나안 땅에 있었고 이스라엘은 다시 땅에서 쫓겨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때론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은 사사들을 세워 다른 족속 또는 민족들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안했다. 그들은 가나안 밖의 나라들을 보았다. 그들에게는 왕이 있었고 그 왕들에 의해 굳건히 서가는 나라들을 보고 이스라엘에도 왕이 필요함을 느꼈다.

 

메시야로서의 왕이 세워짐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에게 다른 나라와도 같은 왕을 요구했다. 사무엘은 분노했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사무엘은 이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행위로 여겼다. 그래서 분노했다. 이에 하나님은 왕을 허락하라고 사무엘에게 명한다. 그렇게 왕이 세워진다. 사무엘은 사람들이 보기에 좋게 보였던 사울을 기름부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게 했다. 왕으로서의 메시야가 된 것이다. 메시야(헬라말로는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의미다. 이스라엘은 왕과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은 기름을 부어 메시야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다른 나라로부터 지켜주며 이스라엘을 굳건히 세워줄 실제적인 메시야는 왕이었다. 사울은 이스라엘을 확고한 국가로서 세워 줄 메시야로 초대 왕이 되었다. 당시 가나안 땅을 두고 패권을 다루던 또 하나의 민족이 블레셋이었다.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각축장이 되었다. 초대 왕 사울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왕이었다. 물론 하나님을 섬겼지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왕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된다. 이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또 한 사람 다윗에게 메시야 왕으로서 기름을 붓게 한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 왕이었으나 왕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당시 왕으로서의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던 자는 사울이었다.

 

고난 받는 메시야 왕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직 왕이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메시야 왕이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 유명하게 된다. 다윗의 명성이 높아지자 사울은 다윗을 죽이고자 한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다니는 삶이 시작된다. 메시야 왕으로서의 고난이었다. 이러한 다윗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에 비교된다. 성경은 고난받는 왕의 모습을 담고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기까지 고난받은 메시야 왕이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살려준다. 명분은 사울 역시 왕으로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다윗의 믿음이었다. 분명 하나님은 자신의 고난을 멈추게 하실 때가 있을 것이다.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님이 마침내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게 하실 때를 기다린 것이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기도와 닮아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자신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다. 예수님은 당시 정치적 세력인 로마와 헤롯에게 정치적으로 대항하지 않으셨다. 다윗은 당시 정치적 왕이었던 사울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울로부터의 고난을 스스로 감수하게 된다. 그리고 때가 되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이다.

 

메시야 왕으로서의 등극

 

다윗이 마침내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아니라 자신의 지파였던 유다지파의 왕으로서 등극한다. 그리고 7년 후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다윗은 예수님의 모형으로 세워진 메시야 왕이었다. 예수님 역시 처음부터 전 인류의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로 인정된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을 따르던 소수의 무리들에게만 인정받은 메시야 왕이었다. 물론 정치적인 의미가 아닌 영적인 의미에서다,

초대 왕 사울은 왕이었으되 이스라엘을 굳건한 국가로 세운 메시야 왕은 아니었다. 이런 면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완벽한 메시야 왕이었다. 메시야의 문자적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지만 실제적인 의미로서는 구원자로서의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가나안 땅을 두고 다투었던 블레셋을 완전히 굴복시키고 가나안 땅을 더 이상 가나안 땅이 아니라 이스라엘 땅으로 되게 한 자였다. 아울러 다른 나라가 더 이상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게 한 자였다. 이스라엘이 국가로서 온전히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다윗은 메시야 왕이었다. 이스라엘 땅이 다윗 아래에서 안식을 찾은 것이다.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이래 바사와 헬라 그리고 로마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당연히 이스라엘은 메시야 왕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는 다윗과 같은 왕으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다시 온전한 국가로 세워줄 자였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는 정치적 왕이 아닌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선언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는 길을 알려준다. 빌립보서 2:6-11은 예수님의 왕의 등극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안식 곧 확신있는 삶이 주어진다.

 

왕의 의미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은 대표자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책임지는 자로서의 왕이다. 이것이 바로 메시야 왕의 의미이다. 왕이 세워진 이래 하나님은 더 이상 백성 개개인을 보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자로서의 왕을 보고 이스라엘 전체의 복과 저주를 결정하신다. 왕이 하나님 앞에 사로 서면 이스라엘 백성이 복을 받을 것이고 왕이 잘못되면 이스라엘 백성이 화를 당할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왕의 의미다. 단순히 왕이 정치을 잘한다는 면에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전과 관련된다. 성전은 하나님에 계신 곳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어떻게 다루는가 하는 것이다. 다윗시대까지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다. 이동식 성막이 있었다. 성막에 있어사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 언약궤였다. 하나님은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소위에서만 인간을 만나시겠다고 선언하셨다. 성전은 그렇게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곧 하나님은 왕을 통해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바로 가진 왕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섬기게 하는 왕을 요구하신다.

이런 면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다. 그렇게 예수님은 다윗과 같은 메시야 왕으로서 전 인류를 대표하는 왕이었다. 전 인류의 죄를 스스로 걸머지신 왕이었다. 그렇게 예수님은 전 인류를 대표하여 죄에 대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 누구든지 이러한 예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안에 들어오게 된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된다. 우리가 구원받음은 바로 왕되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때문이다. 그게 전부다. 그는 진정 왕이시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3

 

다윗과의 언약

에덴의 울타리인 하나님을 제거하고 스스로 주인으로서 살고자 했던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났다. 고통과 땀이 동반된 수고로운 삶이 주어졌고 수고의 대가는 죽음으로 결론지어졌다. 인간은 에덴으로의 회복을 꿈꾸어 왔지만 인간 스스로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왔다. 인간은 행위를 통한 구원의 세계를 그려왔지만 율법 앞에 선 인간의 결론은 스스로 죄인임을 드러내기만 할 뿐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주어진다. 그것은 은혜를 통한 구원방식이다. 죄의 문제는 용서의 방식이 아니고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죄 자체는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 처벌과 용서 곧 공의와 사랑의 조화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그 정당성을 입증받았고, 처벌이 정당화됨으로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이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다. 인간이 할 일은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거저 값없이 받기만 하면 된다. 은혜란 선물이란 의미로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언약이란 형식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인간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은 인간이 타락한 이래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이어가는 특정한 인간들을 통하여 주어졌다.

 

언약의 흐름

 

(1) 그 첫 번째 언약은 하나님이 창조한 첫 번째 인간 아담에게 주어졌다. 창세기 3:15을 통해 인간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낼 것을 최초로 약속하신다. 그래서 창세기 3:15을 원복음 또는 최초의 복음이라고 불리운다. 이는 승리의 언약이라고 불리우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파괴할려는 사탄의 역사에 대한 승리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받아들인 자들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2) 홍수사건을 통해 살아남은 자는 노아의 가족 8명뿐이었다. 노아를 통해 새 인류의 시대가 문을 연 것이다. 그래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노아 이전이아 이후나 똑같은 죄의 성향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님은 이에 노아에게 인간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려준다. 그것은 모든 죄인은 죽겠지만 하나님이 지정하여 짓게 한 방주 안에서 구원을 약속하셨다. 방주 안에서 노아의 가족이 할 일은 없었다. 그들이 할 일이란 방주 안에 들어가는 일 뿐이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으로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의 방식이었다. 홍수 후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관한 약속이었다. 하나님의 인간구원을 위한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는 날까지 하나님이 참으시겠다는 것이다. 다시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이의 증거로 무지개가 주어졌다. 그래서 이를 자연언약 또는 무지개 언약이라고 한다. 내용상으로 보면 보존의 언약으로 불리울 수 있다. 노아와의 언약에서 주목할 것은 피의 보상법칙이다. 타인의 피를 흘리면 반드시 피로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법칙이다.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대신 치루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다.

 

(3) 하나님의 구원에의 보증은 무엇인가? 그리고 구원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바벨탑 사건으로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보고자 하던 계획이 무너진 후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계획을 이룰 한 사람을 성별하였다. 그가 아브라함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 내용은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것과 땅에 관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살아생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한 사람 이삭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이 주실 것이란 약속과 가나안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은 오직 약속으로만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는 그 자체가 구원에의 보증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건에서 하나님이 인간구원을 위한 제물을 미리 보았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한 구원자가 나타날 것이고 그를 통해 하나님나라가 유업으로 주어질 것을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친 모리아 산에서 보았다.

 

(4)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한 가지는 분명히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조상이 된 야곱의 가족이 충리가 된 요셉으로 인해 애굽에 손님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400년이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야곱의 별칭이 이스라엘이다)은 애굽의 종으로 변해 있었다. 인구는 20이 넘은 싸울만한 남자들만으로도 이미 60만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이제 땅에 대한 약속만이 남았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가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과정을 보여주신다. 출애굽은 유월절이란 사건을 기해 이루어진다. 장자 죽음의 재앙이 임할 때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바른 집 안에 들어가면 죽음이 넘어간다는 의미에서의 유월절이다. 그리고 그들은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이른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부여받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다 지키겠노라고 호언한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이었다. 그들의 호언과는 달리 그들은 너무 쉽게 율법을 범했다. 여기에 하나님은 성막이란 제도를 주신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알려주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성막은 죄를 지은 자들에게 어떻게 죄가 사하여지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율법은 범해도 살 길이 주어지지만 성막의 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 율법과 성막 이는 모세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모세와의 언약을 일반적으로 율버의 언약이라고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용서의 언약이라 불리우는 것이 보다 합당한 표현일 것이다.

 

다윗과의 언약

 

(1)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자손에 대한 약속은 이루어졌고 아직 땅에 대한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약속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었다. 모세는 백성을 가나안 땅 앞까지 인도하여 왔다. 모세는 율법의 모형이었다. 율법의 역할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려줄 뿐이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가정교사일 뿐이라고 성경은 선언한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가진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예수아가 된다. 곧 예수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에서 왔다. 여호수아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2) 그러나 약속의 땅에 안식이 없었다. 12지파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다. 위기시 세워진 사사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타 민족의 위협에 위기를 느끼며 살아가야 했다. 마침내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에게 백성은 왕을 요구했다. 그리고 첫째 왕 사울이 세워지지만 그는 실패한 왕으로 기록되고 두 번째 왕 다윗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국가로서의 확고한 영토를 가지게 된다. 이스라엘은 다윗 아래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다.

 

(3)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다. 그러나 성전은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솔로몬에게 맡겨질 것이다. 다윗은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난 하나님은 다윗과 가장 위대한 언약을 맺는다. 그것은 영원한 왕국의 언약이었다. 다윗의 아들이 왕국을 견고히 세울 것인데 그 왕국은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일단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된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된다. 북 이스라엘은 왕조가 바뀌어졌지만 유다 왕국은 다윗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어나갔다. 바벨론에게 망하기까지 다윗의 후손은 유다왕국의 왕이 되었다. 다윗 후손이 영원히 유다 왕국의 왕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왕국의 모형이었다. 실제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탄생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다윗과 같은 메시야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다윗과 같은 메시야 왕으로 예수님은 오셨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 예수님의 왕국은 정치적 왕국이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나라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나라는 인간역사의 흐름에 따라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다. 그 왕국은 영원히 견고히 서 있는 왕국이다. 왜냐면 그 왕국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나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손이 되고 하나님나라라는 땅을 유업으로 받으며 그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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