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3-26

by wgma posted Jul 0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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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3

 

다윗과의 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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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 방식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에덴의 울타리인 하나님을 제거하고 스스로 주인으로서 살고자 했던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났다. 고통과 땀이 동반된 수고로운 삶이 주어졌고 수고의 대가는 죽음으로 결론지어졌다. 인간은 에덴으로의 회복을 꿈꾸어 왔지만 인간 스스로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어 왔다. 인간은 행위를 통한 구원의 세계를 그려왔지만 율법 앞에 선 인간의 결론은 스스로 죄인임을 드러내기만 할 뿐이었다.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방식이 주어진다. 그것은 은혜를 통한 구원방식이다. 죄의 문제는 용서의 방식이 아니고는 해결될 수 없다. 그러나 죄 자체는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 처벌과 용서 곧 공의와 사랑의 조화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짐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그 정당성을 입증받았고, 처벌이 정당화됨으로 인간을 용서할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이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구원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다. 인간이 할 일은 하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거저 값없이 받기만 하면 된다. 은혜란 선물이란 의미로 성경은 선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언약이란 형식으로 인간에게 주어졌다. 인간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은 인간이 타락한 이래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이어가는 특정한 인간들을 통하여 주어졌다.

 

언약의 흐름

 

(1) 그 첫 번째 언약은 하나님이 창조한 첫 번째 인간 아담에게 주어졌다. 창세기 3:15을 통해 인간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구원자를 보낼 것을 최초로 약속하신다. 그래서 창세기 3:15을 원복음 또는 최초의 복음이라고 불리운다. 이는 승리의 언약이라고 불리우기에 충분하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파괴할려는 사탄의 역사에 대한 승리다. 하나님의 구원방식을 받아들인 자들은 이미 승리를 확신하며 살아가는 자들이다.

 

(2) 홍수사건을 통해 살아남은 자는 노아의 가족 8명뿐이었다. 노아를 통해 새 인류의 시대가 문을 연 것이다. 그래도 타락한 인간의 본성은 여전히 꿈틀거리며 노아 이전이아 이후나 똑같은 죄의 성향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님은 이에 노아에게 인간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알려준다. 그것은 모든 죄인은 죽겠지만 하나님이 지정하여 짓게 한 방주 안에서 구원을 약속하셨다. 방주 안에서 노아의 가족이 할 일은 없었다. 그들이 할 일이란 방주 안에 들어가는 일 뿐이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으로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의 방식이었다. 홍수 후 하나님은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다. 그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관한 약속이었다. 하나님의 인간구원을 위한 구원의 계획이 완성되는 날까지 하나님이 참으시겠다는 것이다. 다시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해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다. 이의 증거로 무지개가 주어졌다. 그래서 이를 자연언약 또는 무지개 언약이라고 한다. 내용상으로 보면 보존의 언약으로 불리울 수 있다. 노아와의 언약에서 주목할 것은 피의 보상법칙이다. 타인의 피를 흘리면 반드시 피로 그 대가를 치루어야 하는 법칙이다.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루어져야 함을 말한다. 인간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대신 치루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다.

 

(3) 하나님의 구원에의 보증은 무엇인가? 그리고 구원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바벨탑 사건으로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루어 보고자 하던 계획이 무너진 후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계획을 이룰 한 사람을 성별하였다. 그가 아브라함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다. 그 내용은 아브라함의 자손에 대한 것과 땅에 관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그의 살아생전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아들 한 사람 이삭만을 보았을 뿐이었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이 주실 것이란 약속과 가나안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것은 오직 약속으로만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다는 그 자체가 구원에의 보증이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건에서 하나님이 인간구원을 위한 제물을 미리 보았다.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한 구원자가 나타날 것이고 그를 통해 하나님나라가 유업으로 주어질 것을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친 모리아 산에서 보았다.

 

(4)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한 가지는 분명히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조상이 된 야곱의 가족이 충리가 된 요셉으로 인해 애굽에 손님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400년이 흐르는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야곱의 별칭이 이스라엘이다)은 애굽의 종으로 변해 있었다. 인구는 20이 넘은 싸울만한 남자들만으로도 이미 60만명이 넘어가고 있었다.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이제 땅에 대한 약속만이 남았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가나안을 향해 가도록 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구원의 과정을 보여주신다. 출애굽은 유월절이란 사건을 기해 이루어진다. 장자 죽음의 재앙이 임할 때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바른 집 안에 들어가면 죽음이 넘어간다는 의미에서의 유월절이다. 그리고 그들은 홍해를 건너 시내산에 이른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부여받는다. 그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다 지키겠노라고 호언한다. 그것은 그들의 교만이었다. 그들의 호언과는 달리 그들은 너무 쉽게 율법을 범했다. 여기에 하나님은 성막이란 제도를 주신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을 알려주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성막은 죄를 지은 자들에게 어떻게 죄가 사하여지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율법은 범해도 살 길이 주어지지만 성막의 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 율법과 성막 이는 모세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모세와의 언약을 일반적으로 율버의 언약이라고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용서의 언약이라 불리우는 것이 보다 합당한 표현일 것이다.

 

다윗과의 언약

 

(1)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자손에 대한 약속은 이루어졌고 아직 땅에 대한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약속은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이었다. 모세는 백성을 가나안 땅 앞까지 인도하여 왔다. 모세는 율법의 모형이었다. 율법의 역할이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알려줄 뿐이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가정교사일 뿐이라고 성경은 선언한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이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여호와가 구원하신다는 의미를 가진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헬라어로 예수아가 된다. 곧 예수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에서 왔다. 여호수아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2) 그러나 약속의 땅에 안식이 없었다. 12지파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다. 위기시 세워진 사사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타 민족의 위협에 위기를 느끼며 살아가야 했다. 마침내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에게 백성은 왕을 요구했다. 그리고 첫째 왕 사울이 세워지지만 그는 실패한 왕으로 기록되고 두 번째 왕 다윗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국가로서의 확고한 영토를 가지게 된다. 이스라엘은 다윗 아래에서 안식을 누리게 된다.

 

(3)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다. 그러나 성전은 다윗을 이어 왕이 될 솔로몬에게 맡겨질 것이다. 다윗은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난 하나님은 다윗과 가장 위대한 언약을 맺는다. 그것은 영원한 왕국의 언약이었다. 다윗의 아들이 왕국을 견고히 세울 것인데 그 왕국은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이다. 일단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된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된다. 북 이스라엘은 왕조가 바뀌어졌지만 유다 왕국은 다윗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어나갔다. 바벨론에게 망하기까지 다윗의 후손은 유다왕국의 왕이 되었다. 다윗 후손이 영원히 유다 왕국의 왕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왕국의 모형이었다. 실제로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탄생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다윗과 같은 메시야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다윗과 같은 메시야 왕으로 예수님은 오셨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 예수님의 왕국은 정치적 왕국이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나라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나라는 인간역사의 흐름에 따라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지는 나라가 아니다. 그 왕국은 영원히 견고히 서 있는 왕국이다. 왜냐면 그 왕국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들어가는 나라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나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손이 되고 하나님나라라는 땅을 유업으로 받으며 그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4

 

다윗의 성전 준비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 방식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자손에 대한 약속은 출애굽기 1-2장에서 이루어짐을 본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구원의 과정이 설명되고, 여호수아를 통해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의 정복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다윗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땅의 안식을 누리게 된다. 이제 구약의 주제는 성전을 향해 달려간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을 안정시킨 다음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전쟁을 통해 많은 피를 흘렸다는 이유로 다윗이 성전 짓기를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이 짓도록 하였다.

 

준비 그리고 성취

 

성경의 흐름을 통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모습은 준비한 자와 성취한 자의 결합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약속이 주어지고 손자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실제적으로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별칭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바라보며 모압 땅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후계자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한다. 다윗의 왕국을 안정시킨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리고 솔로몬은 예루살렐 성전을 짓는다. 이러한 모습은 선지자 가운데에서도 보여진다. 엘리야와 엘리사다. 그리고 구약의 마지막 선지인 세례 요한이 등장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자였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자로서 구원의 길을 완성시킨다.

 

성막에서 성전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일단 시내산에 머무르게 되고 모세는 시내산에 올라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또한 성막을 지을 것을 명령받는다. 성막은 거룩한 천막이란 의미다. 가나안을 향해 가고 있는 과정이기에 어느 지역에 멈추면 성막을 펼치고 이스라엘이 움직이면 성막을 접어 움직이게 된다. 성막을 위한 봉사자들로는 레위지파가 성별되었다. 하나님은 어느 곳이나 계시지만 성막을 지은 후 하나님은 스스로 성막 안에 있을 것임을 선언하신다. 성막은 성막 뜰과 성소 그리고 지성소로 이루어졌다. 지성소에는 언약궤(법궤 또는 증거궤라고도 한다)가 있다. 하나님은 언약궤의 덮개인 속죄소(죄를 속하는 자리. 또는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라는 의미로 시은좌라고도 불림)위 그룹(속죄소 위해 두 그룹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사이에서 만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렇게 언약궤는 성막을 대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든지 언약궤를 제사장들이 메고 앞서 진행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 앞서 행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한 이후에도 성막은 여기 저기 옮겨지며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언약궤를 한 때 블레셋에게 빼앗긴 일도 있었다. 다시 언약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긴 했지만 여전히 언약궤는 여기저기 옮기며 보관되고 있었다. 다윗은 이를 가슴 아프게 여겼다. 나라는 안정되었고 다윗이 거한 곳도 있는데 언약궤는 정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하나님이 거할 장소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다윗은 언약궤가 정착할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언약궤를 가지고 온다. 언약궤가 다윗이 있는 곳으로 오자 다윗은 왕이라는 직책도 잊은채 너무 기뻐서 춤을 추기도 한다. 그만큼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짓기를 거절하고 성전은 다윗의 후계자 솔로몬에 맡기라고 했다. 성막은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는 천막의 형식이라면 성전은 어느 한 장소에 고착되어 움직일 수 없는 건물로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성막이 가지는 의미가 그대로 정착된 건물의 모습으로 그대로 옮겨진 것이다.

 

성전의 장소

 

다윗은 이스라엘 왕국을 안정시킨 후에 자신이 이룬 성과에 대한 결과로 인구조사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아윗 왕국의 2인자였던 요압은 인구조사하는 것을 말렸다. 그래도 다윗은 인구조사를 명했다. 인구조사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스라엘 왕국을 온전히 세운 결과를 자신의 힘으로 이룬 성과로 보고 인구조사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하나님은 이에 분노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전염병으로 7만명이 죽게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다윗을 자신의 잘못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분노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게 되자 하나님은 갓이라는 선지자를 보내 오르난이라는 사람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을 것을 명한다. 이에 다윗은 오르난 타작마당을 돈을 주고 사고 거기에서 자신의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구하는 단을 쌓게 된다. 바로 이곳에 솔로몬은 성전을 짓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질 오르난 타작마당은 흥미롭게도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단을 쌓았던 모리아 산이었다. 이삭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를 회복하는 화해의 아들이 되었다. 이는 하나님과 죄인인 인간사이의 화해의 아들이 된 예수님의 모형이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하여 양을 준비시켜 양이 대신하여 제물로 바쳐진다. 그래서 이를 여호와 이래라고 했는데 여호와 이래란 여호와가 준비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보여주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이미 구속자 예수님을 미리 보고 기뻐했다고 요한복음 8:56에서 말씀하고 있다. 모리아산에서의 제사는 화해의 산이었다. 예수님은 골고다(또는 갈보리)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걸림돌이 된 죄의 벽을 허무는 화목제물이 되셨다.

다윗은 이 장소를 돈을 주고 산다. 공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당연히 구원은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구원이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선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주는 자가 값을 치룬다는 사실이다. 구원이란 선물을 받은 자는 거저 공짜로 받지만 그 값은 생명을 버리는 엄청난 값을 치룬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값싼 선물이 아니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값을 하나님 자신이 치룬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원의 선물을 하나님의 은헤라고 부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값으로 계산 할 수 없는 엄청난 것이다. 다윗이 오르난 타작마당을 돈을 주고 산 것은 하나님의 인간 구원계획에 따른 하나님의 역사였다. 예루살렘 성전이 이렇게 다윗에 의해 준비되고 있었다.

 

다윗의 성전 준비

 

예루살렘 성전을 지을 자리가 정해졌다. 다윗은 자신이 성전을 짓기를 원했다. 하나님은 성전에 대한 소원을 가진 다윗을 기뻐하셨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을 맺는다. 다윗의 왕국은 영원할 것이라는 언약이다. 그러나 그 왕국은 다윗이 아닌 다윗의 아들에 의해 든든히 영원히 세워질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이 정치적 왕국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이는 구원의 흐름에서 보면 다윗의 후손으로 오게 되는 예수님에 의해 다시 하나님의 왕국이 영원히 건설될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다윗은 자신이 성전을 짓는 것이 거절당했지만 아들 솔로몬이 짓게 될 성전을 위한 제반 준비를 한다. 제사장직분을 맡을 자들, 찬양대원들, 성전 문지기들을 정한다. 거기에다가 성전을 지을 재료들을 미리 준비해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기에 모자람이 없도록 한다. 이러한 다윗의 준비는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세례 요한의 모습과 비교된다. 세례 요한에 대하여 이사야 40:3은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선언한다. 이러한 이사야의 소리는 우리 모두가 세례 요한과 같아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사도행전 1:8은 우리로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만나도록 하는 길을 닦는 자라는 의미다. 다윗은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길을 닦는 자였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5

 

솔로몬의 성전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 방식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다윗은 하나님이 거하실 장소를 정하여 그곳에 성막의 기물들을 옮겨 놓기를 원했다. 이스라엘은 이미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정착했으나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막은 여전히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고 있음을 하나님께 죄송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이 성전짓기를 거절하고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도록 하였다.

 

문제의 아들 솔로몬

 

이스라엘은 하나님나라로 세워졌다. 하나님나라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다. 따라서 이스라엘 왕국에 세워진 왕이란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책임지는 자였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다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되었던 땅은 여호수아에 의해 정복되고 다윗에 의해 안정을 찾았다. 이제는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삼았는가이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은 성전의 역사로 끝을 맺는다.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성쇠는 왕이 성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은 왕궁이 무너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러한 성전의 역사는 솔로몬으로부터 시작된다. 솔로몬이 지었기 때문에 솔로몬 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솔로몬 성전은 화려하게 지어진다. 성막과 달리 첨가된 것이 있다면 솔로몬 성전 앞에 있는 두 기둥이다. 하나는 세운다는 의미의 야긴이고 또 하나는 능력이라는 의미의 보아스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후에 1,000번제를 드린다. 1,000번제란 1,000일 동안의 제사가 아니라 1,000마리의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어마어마한 제사였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드려진 짐승은 인간의 죄를 위해 죽은 것이다.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난 후에 드린 기도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놓이게 되더라도 회개하여 성전에 돌아와 하나님께 아뢰면 용서하여 달라는 내용이다. 실제로 솔로몬은 다윗이 하나님을 가장 진노케 했던 사건의 중심에 서 있었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관계에서 낳은 아들이다. 다윗은 간음죄를 범했을 뿐 아니라 다윗의 충실한 장군이었던 우리야에게 거짓말을 하고 결국 우리야를 죽게한 살인죄까지 범하는 삼중 죄를 범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다윗은 선지자 나단으로부터 책망을 받고서야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고 침상이 젖기까지 회개하게 된다. 다윗의 범죄로 아들을 잃었지만 잃어버린 아들을 대신하여 솔로몬을 밧세바를 통해 얻게 된다.

솔로몬이 왕이 된 과정도 쉽지 않았다. 솔로몬은 다윗의 열 번째 아들이었다. 다윗의 첫째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 다말을 범하게 되어 압살롬으로부터 죽음을 당하게 되고 둘째는 일찍 죽고, 셋째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을 저질렀다가 결국 죽게되고, 넷째 아도니아는 다윗 시대의 이인자였던 요압과 함께 다윗의 계승자로 스스로 선언했다가 솔로몬에 의해 숙청을 당한다. 아도니아가 왕이 되었다고 선언하던 그 날 다윗은 솔로몬을 자신의 계승자로서의 왕으로 선언했던 것이다. 솔로몬의 역사는 숙청이라는 거센 바람으로 시작되었다. 솔로몬의 철권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솔로몬은 엄청난 건축사업을 일으켜서 백성으로부터 원성을 들었고 결국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 르호보암 때에 왕국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더 큰 문제는 솔로몬은 이웃 나라들과 화친을 맺는 정책을 써서 이웃 나라로부터 얻은 아내가 많았다는 것이다. 아내가 많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여인들이 각기 자기 나라의 우상을 이스라엘에 가지고 오게 되었고 솔로몬은 이를 묵인하고 있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가장 다른 나라의 왕같은 정치력을 발휘했던 솔로몬, 나라는 부강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의 역사를 허락하셨다.

 

지혜의 왕 솔로몬

 

솔로몬은 많은 문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인정받은 면이 있었다. 그것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는 것이다. 백성을 바로 다스리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했다. 그런데 솔로몬은 그가 기록한 잠언과 전도서에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온다는 것을 깨달아 안 자였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정치를 했다. 하나님은 지혜를 구한 솔로몬에게 부와 권력까지 안겨주었다. 솔로몬의 철권정치는 이스라엘 국가를 이웃 나라가 넘보지 못하도록 부강한 국가를 만드는데 필요했었다. 솔로몬의 지혜로운 정치는 백성을 재판하는 과정에서도 빛을 발휘했고 그러한 지혜는 이웃에게 까지 소문이 나서 감히 솔로몬 하의 이스라엘을 건들지 못하도록 했다.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도 발휘되었다.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성막제도가 가지는 의미 그대로를 옮기는데 성공했다. 지혜로웠던 솔로몬도 이웃 나라로부터 얻은 많은 아내들이 들고 온 우상을 처리하는 데는 지혜롭지 못했다. 모세 율법에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면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했고 또한 말도 많이 두지 말라고 했지만 이도 그냥 넘어갔다. 그러난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우상이 이스라엘에 들어오는 것은 허용하지 말아야 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10지파를 여로보암의 손에 넘기고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이 솔로몬의 후손에게 주어졌다.

 

구약의 결론 성전

 

구약의 역사는 정치적 왕국의 회복이 아닌 성전의 회복으로 결론지어진다. 그 성전의 역사가 솔로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왕이 성전을 바로 대하지 못할 때 이스라엘의 왕국은 위기를 맞이했다. 왕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성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정치적인 역량과 관계가 없다. 솔로몬 이후 나라가 분열된 후 북 이스라엘의 왕들은 하나님의 성전과 관계없는 정치를 펼쳤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들로 기록되었다. 남 유다는 성전을 바로 대했던 8명의 왕들에 대하여만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왕으로 기록되었다.

북 이스라엘은 에브라임 지파의 여로보암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로보암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 때마다 남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다가 남 유다로 돌아가지 않을까 해서 금송아지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소 벧엘과 단에 두었다. 이들은 엘리야와 엘리사라는 위대한 선지자들로부터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앗수르에게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한편 남 유다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왕이 성전을 성전답게 대한 것은 아니었다. 성전을 어떻게 대하였는가에 따라 남 유다의 흥함과 쇠함이 주어졌다. 성전 중심의 정치를 개혁적으로 이끌었던 요시아 왕을 마지막으로 남 유다는 쇠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 당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성전 신앙이 남아 있었다. 이때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다.

그러나 바벨론 왕국이 패권이 바사 왕국으로 넘어가면서 유다인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유다인의 예루살렘 귀환은 이스라엘 왕국의 정치적 회복이 아닌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을 위해 귀환한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의 후손이었던 스룹바벨에 의해서 재건되었다. 이를 제2성전 또는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른다. 구약의 역사는 솔로몬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다시 회복되면서 끝을 맺는다.

 

예수님의 성전 회복

 

예수님이 공생애 곧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하면서 예루살렘에 처음 방문할 때 들어간 장소가 성전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는 사건을 일으키신다. 스룹바벨 성전은 헬라가 패권 국가가 되면서 또 한번 무너진다. 그리고 헤롯이 이스라엘의 분봉 왕이 되면서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짓기 시작했다. 헤롯 성전이다. 이 성전은 46년째 지어져 오고 있었다. 예수님은 이 성전을 무너뜨리고 3일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선포하신다. 이 성전은 당연히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영적인 의미에서의 성전을 말한다. 예수님은 성전을 자신의 집이라고 했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라고도 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결국 예수님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기 위해 오셨다는 이야기다. 쉽게 말하자. 타락한 인간에게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기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이스라엘 회복이 아닌 영적으로 성전의 회복 곧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성경을 이를 구원이라고 칭한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6

 

엘리야의 외침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 방식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이스라엘의 3대 왕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된다.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이 절기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가게 되면 백성이 남유다로 갈까하여 북이스라엘 지역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이 금송아지가 자신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라 하여 이스라엘이 세워진 목적 곧 성전예배의 길을 포기함으로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특히 아합은 시돈에서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여서 북이스라엘을 바알과 아세라 신앙으로 바꾸고자 하였다. 여기에 본격전이 선지자들의 시대가 열린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떠난 세대의 악함을 책망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으로 돌아올 것을 외치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시대를 연 자가 엘리야다. 엘리야에 대하여 성경은 단지 길르앗 디셉 사람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소리

 

모세와 다윗 그리고 엘리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후계자인 여호수아와 솔로몬 그리고 엘리사의 길을 예비한 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후계자들은 선임자들이 수고롭게 잘 닦아논 길을 따라 목적하던 바를 성취하는 자들이었다. 모세의 길을 따라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고, 다윗의 길을 따라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그리고 엘리야의 길을 따라 엘리사는 북이스라엘을 수호하는 하나님의 소리가 된다.

특별히 엘리야는 가장 악한 세대에 외치는 하나님의 소리였다.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바알과 아세라 신앙으로 변절되는 시대에 외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이러한 엘리야의 모습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모습과 닮아있다. 실제로 구약 성경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말라기 4:5에서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바로 오시리고 한 엘리야라고 선언하신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세례)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마태복음 11:13-14)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하나님의 소리였다. 엘리야가 엘리사의 길을 곧게 하였듯이,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오실 길을 곧게 한 자였다(마태복음 3:3). 엘리야가 받은 사명의 길은 말라기 4:6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외침, 이는 선지자들의 외침이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주목하게 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을 보라.

 

경고, 승리 그리고 고난

 

엘리야의 외침은 북이스라엘의 죄 곧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죄에 대한 경고로부터 시작한다. 그 경고의 소리는 가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세벨의 고향 시돈으로 가서 사르밧 지방의 한 여인의 문제를 해결하고 엘리야는 먹는 문제를 해결한다. 물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행한 결과였다.

삼년 후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갈멜산에서 누가 참 하나님인가를 가리자고 제안하고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승리한다. 당연히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죽음을 당하고 엘리야가 비가 내릴 것을 기도하니 마침내 비가 내렸다,

그러나 이세벨이 있었다. 이세벨은 갈멜산의 소식을 듣고 엘리야를 죽이고자 하였다. 엘리야의 도망 그리고 하나님께 죽여달라는 하소연. 여기에 하나님은 아직 엘리야가 할 일이 있다 하시며 일어나 먹으라 하시니 엘리야는 먹고 힘을 내서 40일을 걸쳐 호렙산에 이른다. 호렙산은 모세가 부름받고 또한 하나님의 율법과 성막제도를 받았던 산이었다. 엘리야는 지쳤다. 북이스라엘에 오직 자신만이 남은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 7000명이 남았다고 하시며 엘리야가 할 일 세 가지를 명한다. 두 가지는 아합 집안을 멸망시키는 일과 연관된다. 아람의 왕으로 하사엘과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세우라하시고 엘리야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세우라고 하신다. 엘리야는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엘리사가 이루도록 한다.

죄에 대한 경고 그리고 갈멜산에서의 승리 그러나 이세벨에게 쫓기는 엘리야, 이야기의 내용은 달라도 세례 요한 역시 그러하였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선언하는 요한, 그리고 요단강에서 죄씻음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간다. 그러나 헤롯에 대한 죄를 지적하면서 감옥에 갇히게 되고 결국 목베임을 당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그리고 엘리야는 모든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자였다.

엘리야와 세례 요한의 다른 점이 있다면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했고 세례 요한은 죽음을 당했다. 엘리야 승천의 모습은 예수님과 닮아 있다. 엘리야는 선지학교를 연 자이기도 하다. 선지학교 생도 중에 엘리사를 수석 후계자로 세운 것이다. 열왕기하 2:9에 보면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성령이 하시는 역사 갑절을 요구하는데 이는 갑절의 능력이나 영감이 아니라 장자의 몫과 관련된다. 당시 장자는 유산의 두 배를 받았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장자로서의 후계자 곧 선지생도 중에 엘리야를 이어받은 자가 되기를 원한 것이다. 엘리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엘리사에게 맡긴다.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긴다.

 

하나님의 소리였던 선지자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는 자들이었다. 선지자로서의 예수님의 모형은 모세였다. 모세는 다른 선지자들과는 달랐다. 모세는 직접 하나님과 대면하는 자라고 했다. 모세는 하나님의 율법을 시내산에서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했다. 모세가 받은 율법은 인간은 죄의 용서가 필요한 존재임을 알려준다. 그래서 율법과 더불어 성막이 주어지고 성막에서 율법을 범한 자들에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주어진다. 성막은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렐 성전이 지어지고 성전은 성막을 대신하게 된다.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성막 또는 성전은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길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선지자들의 외침은 모세가 받은 율법과 성막에 대한 외침이었다. 죄에서 돌이켜 용서받아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러한 선지자들의 외침의 문을 연 자가 엘리야다. 물론 엘리야 전에도 선지자들은 존재했다. 그러나 선지자의 시대는 아니었다. 엘리야로부터 선지자들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구약성경은 모세가 쓴 다섯권의 율법서와 시가서 그리고 17권의 선지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문서를 남기지 않은 행동하는 선지자였다. 이런 면에서는 세례 요한도 그러하다. 그래서 엘리야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소리였다. 개인이면서도 선지자 모두를 총칭하는 명칭이기도 하다. 말라기 4:6에 있는대로 선지자들의 외침을 듣고 하나님께 돌이키지 않으면 저주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세례 요한은 엘리야로 대표되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다. 그렇게 세례 요한은 오리라고 한 엘리야였다.

예수님은 아예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다. 입에서 나오는 말씀뿐 아니라 예수님의 삶 자체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엘리야로 대표되는 선지자들의 외침은 죄로부터 돌이키라는 외침이었다. 그 외침의 요약이 세례 요한의 외침이었다. 돌이키는 길은 하나님의 성전에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성전에는 죄가 용서함 받게 되는 길이 있다. 예수님 안에 죄가 용서되는 길이 있다. 예수님의 삶의 결론은 하나님말씀의 결론이다.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이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죄가 용서받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 사는 길이 또한 열렸다. 그것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이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선지자직 그리고 선지자시대를 열었던 엘리야, 이 둘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등장한다. 죄에서 돌이키라. 엘리야로 대표되고 세례 요한을 마지막으로 하는 선지자들의 외침이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죄에서 돌이킬 수 있는 곧 용서의 길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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