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흉악범이냐 왕이냐? (15-26)
‘명절이 되면 총독이 무리의 청원대로 죄수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더니 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그들이 모였을 대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나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이는 그가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15-18)
죄수(罪囚, Prisoner)라는 용어는 타인으로부터 고소당하거나 유죄 판결을 받아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을 말한다. 성경에 옥에 갇힌 죄수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도 많이 나오며(창 39:19-41:14; 레 24:12; 왕상 22:26-27; 행 4:3; 빌 1:7-26) 이들 죄수 가운데는 요셉(창 39:19-41:14)이나 선지자 미가야(왕상 22:26-27), 사도 바울(행 23:18), 베드로와 요한(행 4:3)과 같이 부당하게 죄수로 지낸 사람도 있었다.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으로 죄수가 된 요셉은 왕의 중죄인을 가두던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왕의 옥에 갇혀 지냈으며(창 39:20) 성경에서 죄수가 입은 죄수의 옷에 대한 기록도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 감옥에 갇혔던 여호야긴 왕에 대한 기사에서 발견된다(왕하 25:29). 바울이 ‘죄수’라고 호칭하기를 좋아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바울은 자신에 대한 호칭으로 이 말을 자주 사용했다(엡 3:1; 4:1; 딤후 1:8; 몬 1:9). 바울이 이 호칭을 즐겨 사용한 것은 자신이 ‘주 안에서’(엡 4:1), ‘주를 위하여’(딤후 1:8; 몬 9) 죄수가 된 것이었기에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였고(엡 6:20) 기뻐하였다(빌 3:7-8).
(1) 저 옳은 사람(19-21)
‘총독이 제판 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하고 예수를 죽이자 하게 하였더니 총독이 대답하여 이르되 둘 중의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바라바로소이다’(19-21).
바라바(Barabbas)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당시, 수감되어 있었던 유명한 죄수로 폭도였으며 살인자였다(마 27:16; 눅 23:19). 빌라도가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할 때 군중들은 ‘바라바’라고 외쳤다(마 27:21). 빌라도는 그들의 요구대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막 15:15). 그 후 바라바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2)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22-26)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22-26)
종교에 눈이 멀어버리면 선과 악을 구별을 못하고 만다. 수년전 한국 땅에서도 목사의 비리가 메스컴에 폭로되니, 그 교회 신도들이 방송국을 찾아와 난동을 부린 일이 있었다. 그것은 종교에 세뇌되어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민중을 배후에서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선동을 했다. 군중이란 본래 군중심리라는 것이 있어 자기 판단을 못하는 사람들이 된다. 예수가 지난날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했을지라도 현재의 상황은 그 군중들에 의해서 흉악한 바나바보다 더 악한 죄인이 되고 만다.
그래서 마침내 군중들은 배후 선동자들을 따라 바나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고 외쳐댔다. 이런 기막힌 일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어디 이런 일이 있는가? 이것은 종교가 만들어낸 처참한 역사다. 분명 유대교는 하나님의 사람들이었고, 구약교회로서의 역사를 이끌어 온 하나님의 조직이다. 그런 그들이 예수를 못 박게 하고 바나바를 선택한 것이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1:10-11)
그래서 유대교(구약교회)는 스스로 사탄의 회가 된다.(계2:9) 이와 같은 일은 구약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약교회로 넘어와서도 똑 같은 역사를 반복해서 만들어 왔고, 지금도 반복해서 선(말씀)을 버리고, 악(전통)을 선택한 교회들이 되고 있다. 그래서 스스로 사탄의 회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유대교가 바나바를 선택 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짓인가? 그러나 그들은 기득권 보존을 위해서 당당하게 그 짓을 했다. 이 세력 앞에 빌라도도 자기 주관(아내의 간청)을 버리고 불의의 세력에 굴복,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만다. 기득권 세력, 군중, 그리고 권력이 함께 만들어 낸 인류역사상 가장 추악한 재판을 만들어 낸 것이다.
왜 이들이 이런 모순을 거리낌 없이 연출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현상세계에만 가치를 둔 사람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현상의 선택은 곧 바나바의 선택이었다. 이렇게 된 것은 성경을 응하려는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들의 악의 선택은 이 세상에서도 그 댓 가를 톡톡히 받은 운명들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무려 2천년이나 나라 없는 유랑민으로 살아야 했고, 권력자 빌라도는 2천년이 지나도록 사도신경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람들 입에서 끊임없이 저주를 받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이런 결과들을 보면서 우리는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기회 되고, 지금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냐, 전통이냐의 앞에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 서 있다는 걸 인식했으면 좋겠다.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