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8-31

by wgma posted Aug 15,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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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8

 

요시야의 개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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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 방식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개혁하다란 단어에 대한 한국어 사전은 , 제도, 조직 따위를 새롭게 그리고 보다 좋게 고치다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개혁이란 의미는 잘못된 것을 뜯어 고쳐 원래의 것으로 돌아가다이다. 영어로는 reform이라 하는데 이는 reform이 결합된 것으로 다시 형성하다인데, re라는 것은 다시 새롭게라는 의미도 있지만 본래의 의미는 다시 돌이켜라는 의미다. 그래서 다시 원래의 form으로 돌아가다이다. 성경에서는 개혁이란 단어가 히브리서 9:10에 등장한다.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여기서 개혁이란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철저하게 바르게 하는 것을 통하여라는 의미다. 결국 본래의 것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개혁주의란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를 가진다. 유다의 요시야 왕은 성경대로 돌아가기를 실천했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멸망을 재촉하고 있었던 므낫세

 

요시아 왕은 제2의 다윗으로 불리우는 히스기야의 증손자이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왕이었으나 그의 아들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허문 산당을 다시 세우고 바알과 아세라 목사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이를 성전에까지 끌어들었고 거기에다가 일월성신을 위한 제단을 세우고 모세의 율법이 금한 힌놈의 골짜기에서 아들들을 불 가운데 지나가게 하고 점치는 자 와 사술을 행하는 등 유다 역사에 없을 우상을 섬긴 자였다. 므낫세는 장장 55년이나 왕으로 있었다. 므낫세의 행적은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결국 그의 죄악은 이제 막 일어나는 신흥 바벨론에게 망하게 되는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성전이 우상숭배의 전으로 변해버렸다.

 

(1) 신명기 17:16-17에 보면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고 하여 세 가지를 금했다. 그리고 이어서 해야 할 일로 17:18-19에서 이렇게 명하고 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세 가지를 금하고 한 가지 곧 율법을 읽고 지키라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성전에 있다. 금한 3가지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데서 멀어질까 함이고 율법을 가까이 하라함은 하나님 여호와만을 경외하라는 의미다. 실제로 솔로몬은 모세의 율법이 금한 3가지을 다 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세가지를 통해 솔로몬에게 진노하지 않았다. 당연히 솔로몬은 율법을 가까이 했고 하나님을 경외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십계명 제일계명을 어긴 사실이다. 정치적인 책략으로 주어진 이방여인과의 결혼을 통해 이스라엘로 들어 온 우상을 묵인한 것이었다. 우상을 허용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이다. 왕으로 3가지를 금하고 한 가지를 지키라 한 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만 섬기라는 것이었는데 자신은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심이었다 하더라도 왕으로서 백성을 하나님께 대하여 책임진 자로서 우상이 나라에 흘러들어 온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결국 솔론몬을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 왕때 나라는 둘로 분열되었다.

 

(2)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백성이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게 되면 백성들의 마음이 유다로 향할까 하여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 제단을 만들어 여기에서 절기를 지키게 했다. 북 이스라엘에 등장한 19명의 왕들은 모두 여로보암의 우상숭배의 길을 가게 된다. 북 이스라엘은 전형적인 혼합종교의 국가였다. 그런데 그나마 남아있던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아예 없애고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강요했던 시대가 아합 왕이 다시리던 시대였다. 이때로부터 멸망의 경고를 알리는 선지자 시대가 시작된다. 선지자들의 경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 이스라엘은 혼합 우상숭배의 길을 가다가 앗수르에게 멸망하게 된다.

 

(3) 북 이스라엘은 왕조가 자주 바뀌면서 나라를 유지한 반면에 남 유다는 다윗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갔다. 유다에는 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이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을 스스로 거기에 있겠다고 한 참 예배의 장소였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과 수가라는 동네의 한 여인과의 대화 중에 이러한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한복음 4:24) 이 말씀은 수가동네 여인이 20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에 대한 결론으로 주어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곧 사마리아 사람들은 거짓된 곳에서 예배하고 있고, 유다인들은 참된 곳에서 예배하긴 하는데 너무 형식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장소에서 중심을 가지고 예배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예배는 참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질 것이었다. 분열된 왕국에서 예루살렘 성전은 참 예배가 이루어지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런데 유다에도 하나님 예배를 버리고 우상숭배가 이루어졌다. 혼합숭배가 이루어졌다. 이를 바로 잡으려는 왕들도 있었기에 그나마 유다왕국은 북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히스기야 왕은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했을 때의 유다왕국의 왕이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신앙회복을 일으킨 왕이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면서까지 유다는 살아남았다. 그런데 히스기야를 이어 왕이 된 므낫세는 유다왕국의 최악의 왕이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에 해당하는 왕이었다. 유다에 혼합숭배가 이루어졌다 해도 성전에서는 삼갔다. 그러나 므낫세는 노골적으로 우상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끌어들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극에 달했고 멸망은 눈 앞에 놓여 있었다. 유다왕국의 위기였다.

 

요시야의 개혁

 

므낫세를 이어 왕이된 아몬도 므낫세의 길을 걸어갔다. 그런데 신하의 반역으로 인해 아몬은 살해를 당하고 요시야가 8세에 왕으로 등극한다. 요시야는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의 길이 다윗의 길을 걸어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하 23:25은 요시야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요시야가 지킨 유월절에 대하여는 열왕기하 23:22에는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여러 왕의 시대와 유다 여러 왕의 시대에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시아는 므낫세와 아몬이 망가뜨린 하나님 예배를 철저하게 개혁하고자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래서 멸망위기 처한 유다의 희망이었고 다시 한 번 다윗 왕의 역사를 볼 수 있을 것이란 꿈을 백성들은 가졌다. 이 꿈은 분열된 왕국이 하나가 된 이스라엘의 회복이었고 회복된 왕국의 견고함이었다. 이러한 꿈은 요시야의 개혁이 있었기에 꿈을 꾼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개혁군주가 애굽과의 싸움에서 죽게 되면서 꿈은 연기된다. 이제 선지자로서 활동한지 5년이 된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의 죽음을 애가로서 슬픔을 말했다. 요시야가 죽으면서 유다의 몰락은 시작되고 마침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러간 유다인들은 바벨론 강가에 서서 요시야 왕에게 기대했던 그 꿈을 다시 꾸게 된다. 곧 다윗과 같은 왕 메시야에 대한 꿈이다. 그 메시야는 유다를 요시야 왕과 같은 개혁군주가 될 것임을 확신하며 메시야 사상을 키워나간다. 도대체 요시야가 행한 개혁이란 무엇인가? 요시야의 개혁은 예수님의 개혁과 닮아 있다. 다음 주에 이어진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29

 

요시야의 개혁 2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 방식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고, 마침내 여호수아의 인도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가나안은 다윗 왕 때에 온전한 이스라엘의 땅으로 정착된다. 이제는 솔로몬이다. 이때부터 성경의 주제는 이스라엘 왕국의 목적이다. 그것은 성전이다. 왕의 평가는 하나님의 성전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솔로몬 죽은 후 왕국은 분열되고 북이스라엘은 혼합종교의 우상숭배의 길을 걸어감으로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유다 역시 8명의 왕을 제외하고 혼합종교의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유다는 성전예배를 회복하고자 하는 왕들이 있었다. 요시야는 유다의 마지막 개혁군주였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개혁이란 말은 잘못된 성전예배를 원래의 성전예배로 돌려놓는 일이다. 유다에 있어서 가장성전을 잘못 다룬 왕은 므낫세였다. 성전에 이방신을 세운 것이다. 아몬은 므낫세의 길을 답습했다. 그리고 이제 요시야다. 요시야는 8세에 왕이 된다. 요시야는 성전예배를 온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원래의 성전예배로 돌려놓으려고 하였다. 요시야의 성전 개혁은 예수님의 성전회복과 닮아 있다.

 

우상을 철저하게 제거하다

 

요시야는 왕이 된지 8년째 16세의 나이에 다윗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찾게 된다. 그리고 12년째 20살부터 우상의 제단을 철저하게 없애는 작업을 펼친다. 요시야는 말만 마음만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기는 일을 위해 당시의 우상을 없앤 것이다. 다른 개혁적 왕들은 우상을 버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온전히 섬길 수 있도록 형식적인 성전예배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나 우상을 섬기던 산당들은 제거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시야는 우상 제단을 찾아 제거하였다.

이스라엘이 두 왕국으로 분열된 후 하나된 이스라엘을 회복하지 못한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만다. 그런데 실제적인 통일은 이루지 못했으나 요시야는 성전예배의 개혁을 위한 신앙적 통일을 이룬 최초 그리고 마지막 개혁군주였다. 우상의 산당을 제거하는 일을 유다뿐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지역에까지 연장하여 제거한 것이다. 정치적 통일을 이루진 못했으나 하나님께 대한 참 신앙의 통일을 이룬 왕이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수가동네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나 진리와 영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게 될 것임을 선언하셨다. 당시 사마리아에서는 거짓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유다에서는 형식적인 예배가 있었을 뿐이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께 대한 예배보다는 장사를 통한 물질적 이익에 눈이 먼 성전 청결 사건을 일으키시고 성전을 허물고 삼일만에 바른 성전을 짓겠노라 하시며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성전예배를 회복시킬 것이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 당시 사마리아는 유다인들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들과 같은 땅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이제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국가의 회복이 아니라 예배의 회복이었다. 그것도 단순히 유다인들만이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가 함께 예배하는 성전의 회복이다. 유다인과 이방인이 하나된 예배의 통일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이렇게 성경은 요시야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참 예배의 회복을 보여준다.

 

율법책의 발견

 

요시야가 왕이 된지 18년이 되던 해 26살 때 요시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수리하고자 하면서 성전 헌금을 모아논 곳에서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된다. 제사장 힐기야가 발견된 율법책을 서기관 사반에게 주고 사반은 이를 요시야 왕 앞에서 읽어주자 요시야는 자신의 옷을 찢으며 통곡한다. 왜 북이스라엘이 망하게 되었는지 왜 유다 역시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율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에 요시야는 백성을 모은다. 그리고 율법을 들려주고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의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역대하 34:31)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들을 다 제거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역대하 34:33)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요시야의 율법선포와 이에 대한 백성의 선언은 다시 한번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낭독하고 율법을 지켜 행하겠다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요시야는 단순히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명한대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겠노라고 선언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율법을 폐하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시켰다고 선언하셨다. 단지 율법에 대한 온전한 해석을 하셨고 성경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한 약속을 온전히 이루어 인간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라고 선언함으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요시야가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복원한 삶을 백성에게 요구하였듯이 예수님은 온전한 말씀의 회복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말씀에의 순종이 이루어지는 곳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유월절의 회복

 

요시야는 모세의 율법을 따라 유월절을 지키게 된다. 요시야가 지킨 유월절에 대하여 역대하 35:18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지자 사무엘 이후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월절을 이같이 지키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왕들도 요시야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인 온 유다와 이스라엘 무리와 예루살렘 주민과 함께 지킨 것처럼은 유월절을 지키지 못하였더라.”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게 된 역사적인 날이다. 이는 그래서 구원의 날이다. 애굽에 내려진 10번째 재앙이 애굽에 거한 모든 생명체의 처음 난 것에 죽음이 선고되었다. 그러나 양의 피를 문지방에 묻힌 집에 들어간 자는 죽음이 넘어갔다. 그래서 유월절이다. 성경은 다른 절기는 몰라도 유월절만은 반드시 지킬 것을 명했다. 이러한 유월절 개념은 그대로 성막으로 옮겨진다. 죄를 범한 자가 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짐승이 대신하여 죽어야 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는 방식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자리에서 오직 하나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면 예수님의 죽음심이 인간을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인간에게 영원한 삶 곧 영생을 주기 때문이다. 유월절이 영원히 기념되어야 했듯이 예수님의 죽으심은 영원히 기념되어야 한다. 요시야는 사무엘 이후 율법에 따른 온전한 유월절을 지켰다. 예수님은 성경이 말씀하신대로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렇게 인간은 죄에서 해방되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산 자가 된 것이다. 이를 믿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진다.

 

므깃도에서의 죽음

 

요시야의 죽음은 유다에게 있어서 슬픔 그 자체였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요시야의 죽음은 유다의 종말로 보게 된다. 요시야의 죽음으로 바른 하나님 예배의 신앙은 끝이 나고 유다는 마지막을 향해 급속도로 달려간다. 애굽에 복속되었다가 마침내 바벨론에게 망하는 길을 가게 된다. 유다에게 있어서 가장 슬픈 날이 바로 요시야의 죽음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요시야가 죽은 곳이 므깃도이다. 요한계시록의 아마겟돈이란 므깃도의 산이란 말이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점차 힘이 약하여져 가고 있었고 애굽과 바벨론이 부각되고 있었다. 애굽은 앗수르를 치기 위하여 유다 땅을 지나가야 했다. 이에 유다 땅을 지나갈 수 없다고 요시야가 애굽 군대의 길을 막아 선 것이다. 그리고 애굽과의 전투에서 요시야는 죽음을 맞이한다. 왕이 된지 31년 때 39살이었다. 유다는 울었다. 유다의 희망이 사라졌다. 왜 의로운 자가 패배하는가? 므깃도라는 지역은 이러한 질문을 야기 시킨다. 그러나 요시야의 죽음과 바벨론으로의 포로. 여기에 유다인들은 메시야의 꿈을 꾼다. 다윗과 같은 왕의 등장 그래서 요시야가 가진 참 성전예배의 개혁자가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이러한 기다림 가운데 예수님이 오신다.

므깃도의 산 곧 아마겟돈 전쟁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벌어진다고 요한계시록은 선포한다. 아맛겟돈 전쟁은 입의 전쟁이다. 곧 사상전쟁이다. 성경대로 믿는 자들이 세상의 거짓된 이론에 생각에 믿음에 진다. 바른 복음이 아닌 거짓된 복음이 믿는 자들조차도 넘어지게 한다. 철저하게 인간주의가 교회조차도 무너지게 한다. 교회의 죽음이다. 성경은 그냥 설화정도로 취급될까? 여기에 참 신앙인들의 기다림이 있다. 예수님의 재림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신다. 므깃도에서의 요시야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진정한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마겟돈 전투에서의 패배가 끝이 아니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그때 예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주어질 것이다. 아멘!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30

 

스룹바벨 성전 1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 방식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장차 오실 다윗 왕과 같은 메시야(그리스도)는 정치적 메시야일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그러한 메시야를 기다린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그러한 메시야일 것이라고 믿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사 40일을 있다가 승천하시게 될 때 그들은 예수님에게 이렇게 묻는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사도행전 1:6)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시고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로마총독부나 헤롯궁전으로 나아가 그들에게 유대의 왕으로서 선포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전뜰에서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으며 성전청결사건을 일으키셨다. 그리고 선언하신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마가복음 11:17).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예루살렘에 들어갔을 때 성전에 들어가 청결사건을 일으키시면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신다. 집이란 거주하는 장소이다. 곧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장소다. 유대인들의 질문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왜 로마 총독부나 헤롯 궁전이 아닌 성전에 들어가 성전청결사건을 일으키냐는 것이다.

 

구약의 역사는 왕국의 회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의 회복으로 끝을 맺는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왕국이 아니라 성전이 무너질 때이다. 이스라엘 왕국의 목적은 성전이다. 성전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곳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성전에 온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를 살피고 죄를 없이한 후에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죄의 사함을 받기 위한 희생제사가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인간들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성전의 회복이다. 이러한 인간 구속을 위한 성전회복의 역사를 이끈 구약의 인물이 스룹바벨이다.

 

성전의 필요성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면서 시내산에 일단 머무르게 하셨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두 가지를 받는다. 율법과 성막이다. 모세가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려주자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다 지키겠노라고 선언한다. 율법을 지키겠노라고 선언한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 일어났다. 인간의 나약함이다.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는 없었다. 만일 이스라엘에게 율법만 주어졌다면 그들은 율법 아래 전부 죽어야 했다. 그래서 구약은 모세의 율법 아래 저주로 끝을 맺는다.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라기 4:4-6)

여기에 하나님은 성막이라는 제도를 준다. 성막은 율법을 범한 자들이 와서 자신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시켜 짐승이 대신 죽어줌으로 죄의 사함을 받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도록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통로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있어서는 십계명을 중심으로 하는 법을 어겼더라도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성막의 법을 어기면 사함을 받을 길이 없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을 짓고 싶었다. 성막은 이동식 천막형태였기 때문이다. 다윗의 소원을 들으신 하나님은 솔로몬에 의해 고정된 한 장소에 견고하게 세우도록 허락하셨다. 이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평가가 주어졌다.

 

성전의 역사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에 성전이 지어졌다. 그래서 이 성전을 솔로몬 성전이라고 한다. 솔로몬 성전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고자 했던 모리아산의 장소이다. 이 장소는 다윗에 의해 값을 주고 사게 되는데, 그 경유는 이러하다. 다윗이 이스라엘 땅을 견고히 하여 이스라엘 왕국을 확고히 세우게 되자 자만하여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게 한다. 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진 것이 다윗 자신의 능력 때문이라는 다윗의 자만에 하나님은 진노하시고 백성들에게 전염병을 내려 7만명이나 죽게 되는 일이 있었다. 다윗은 용서를 구했고 하나님은 아리우나(또는 오르난) 타작마당에서 단을 쌓으라고 하신다. 그래서 다윗은 그곳을 돈을 주고 산다. 이곳이 바로 모리아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그곳이다. 여기에 성전이 지어지게 된다.

 

하나된 이스라엘 왕국은 사울 다윗 솔로몬 3왕으로 끝이 나고 나라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고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기원전 722년 멸망하게 되고,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 바벨론의 3차에 이룬 공격이 있었다. 1(기원전 605) 2(기원전 597) 그리고 3차 공격이 기원전 586년에 있었는데 이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다.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 유다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때부터 유다이들은 유다 사람 유대인으로 불리우게 된다. 다행인 것은 바벨론은 유다인들에게 자신의 종교를 허락했고 원한대로 유다인들의 전통도 비키도록 하였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자신의 혈통도 보존할 수 있었다. 바벨론 왕국은 바사(페르시야) 왕국에 패권을 넘겨주게 된다. 바사 왕 고레스 때에 유다인들은 왕국이 아닌 성전 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의 귀환을 허락한다. 이때 유다인들의 귀환을 인도했던 자가 스룹바벨이다. 그리고 스룹바벨 영도 하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된다. 그래서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른다.

 

바사왕국의 패권은 헬라(그리이스)왕국으로 넘어간다. 기원전 167년경 유대지역은 안티오쿠스 4세의 통치 아래 있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헬라문명의 전파자로 자처했다. 그에 의해서 성전이 모독을 당하고 유대인들에게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도록 하며 유대지역도 헬라화시켜갔다. 또 한번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다. 이에 분개한 유대인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나 독립을 유지하긴 했지만 헬라왕국에 이어 로마제국이 패권국가가 되면서 유대지역 역시 로마에 복속된다.

 

로마는 유대의 독립을 유지시켜주긴 했지만 기원전 63년 로마의 폼페이장군의 예루살렘 점령 후 로마는 총독을 보내고 이두메(에돔) 사람 헤롯을 유대지역의 분봉 왕이 되게 한다. 이때 시기는 기원전 37년경인데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시기이다. 헤롯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로 한다. 헤롯성전이다. 헤롯성전은 기원후 63년에 완공된다. 그러나 기원후 70년 로마의 디도장군에 의해 예루살렌 성전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이때로부터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된다.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2차 세계대전 후 시온이즘이란 이름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 예루살렘성전은 회복되지 못한째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인들에게는 슬픔이었겠지만 기독교인들에게는 복음전파의 전환점이 된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이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을 향하여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 사도행전 1:8의 명령대로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으로 복음을 전하는 시작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기원후 70년의 성전의 무너짐은 구약의 제사예배의 종언을 고한 사건이다. 인간구속사의 전환점이 되기도 하다.

 

김성철목사의 인물구속사 31

 

스룹바벨 성전 2

  

예수님의 오심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데 있다. 성경에서 구속이란 값을 치루고 죄의 종된 인류를 구원해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류 구속을 위해 계획을 세우셨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 사람으로서 죄인된 사람들의 죄를 해결함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의 모형으로서의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간구원 방식과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하셨다.

구약성경의 주제는 자손, , 왕국 그리고 성전의 순으로 흘려간다. 그리고 이러한 구약성경의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 이러한 구약성경의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로서 작동한다.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 자손의 흐름에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의 이야기가, 땅이 흐름에는 모세와 여호수아가, 왕국의 흐름 그 중심에는 다윗이 있다. 그리고 구약의 마지막 주제인 성전에는 솔로몬과 스룹바벨이 있다. 성전은 이스라엘 왕국의 흥망을 쥐고 있었다. 왕의 평가는 성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있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다. 이스라엘 왕국이 무너진 것이다. 구약의 마지막은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이 아닌 성전의 회복으로 끝을 맺는다. 이 중심에 스룹바벨이 서있다.

스룹바벨은 다윗의 후손인 브다야의 아들로 유다의 19대 왕 여호와긴의 손자이다. 성경은 스룹바벨을 스알디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스알디엘은 브다야의 형이다. 그러니까 스룹바벨은 브다야의 아들로 아들이 없었던 스알디엘의 양자가 된 자이다.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족보와 누가복음족보를 비교해보면 다윗 왕 이후 마태복음은 솔로몬의 계보를 따르고 있고 누가복음은 나단의 계보를 따르고 있다. 그러다가 스알디엘에 와서 두 계보가 하나가 된다. 그러다가 스룹바벨 이후 마태복음은 아비훗의 계보를 이어가고 누가복음은 레사의 계보로 이어간다. 그리고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 요셉에게서 다시 하나가 된다.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의 아버지는 야곱이고 누가복음에서는 헬리다. 헬리는 요셉의 장인으로 마리아의 아버지다. 곧 누가복음족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족보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은 아버지계통을 따르든지 어머니계통을 따르든지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스룹바벨의 아버지 스알디엘은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 법적인 아버지인 것처럼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 역시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닌 법적인 아버지라는 면에서 스룹바벨과 예수님은 공통점을 가진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다윗 이후 두 계보로 이어져 온 다윗 후손이 스룹바벨에서 하나가 되듯이 스룹바벨 이후 두계보로 이어온 후손이 예수님에게서 하나가 된다는 면에서 수룹바벨과 예수님은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위 두 가지 공통점보다 스룹바벨과 예수님의 공통점은 성전의 회복이라는 면이다.

 

포로의 귀환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은 고레스의 바사에 의해 망하고 자연히 유다는 바사 왕국의 속국이 된다. 그리고 고레스 왕은 성전을 재건하라는 명목으로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 귀환을 허락하는데 이들의 인솔자가 바로 스룹바벨이었다. 이때가 기원전 538년 스룹바벨은 세스바살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아 이스라엘의 총독으로 유대인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귀환하게 된다. 포로된 자들의 귀환 유대인들에게는 감격의 순간이었다. 이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포로 후 70년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나님을 떠나 죄의 포로가 된 인류, 성경은 인간을 죄의 포로에서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 될 것을 약속했다. 하나님에게로의 귀환 이를 이끄는 자가 예수님이 될 것이었다. 그렇게 예수님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셨다. 이를 베드로전서 3:18은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2)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스룹바벨은 이렇게 예수님의 예표가 된다. 스룹바벨이 이스라엘 총독으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세스바살이란 이름이 부여받았듯이 삼위일체의 2위 되신 성자 하나님은 인류의 구원자로 사람이 되셨을 때 사람들에게는 예수로 불리우도록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았다.

 

성전의 회복

 

스룹바벨이 예루살렘에 귀환하게 된 목적은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이 아닌 성전 회복이었다. 스룹바벨이 정치적인 지도자였다면 종교적 지도자로 여호수아가 동행하고 있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은 스룹바벨과 여호수가 협력하여 성전을 회복하게 된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2년 후 기원전 536년에 기초를 놓게 된다. 그러나 이를 방해하려는 세력이 있어서 16년간 중단하게 된다. 그리고 다리오 왕 2년 다리오 왕의 조서로 다시 성전이 지어지기 시작하여 기원전 515년경에 완성된다. 이를 위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말씀을 움직였다. 에스라는 영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깨어나게 했다. 그리고 성전이 재건된 후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부임해 온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는 일을 위해서였다. 이렇게 스룹바벨 성전은 스룹바벨 혼자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다. 각기 주어진 일을 여러 사람들이 협력하여 이루어졌다. 이런 면에서 솔로몬 성전과는 차이가 났다. 그리고 이런 면에서 스룹바벨 성전의 양상은 신약 교회의 모습도 닮아있다. 예배의 성격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예수님의 오심도 성전회복이 목적이었다. 왜 인류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려고 하였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래의 목적에의 회복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예배케 하고자 함이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다. 예배란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이다. 인가을 구원하고자 오신 예수님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 영과 참으로 예배하게 하고자 함이다. 곧 성전의 회복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특권이다. 왕권 시대에 백성이 왕을 알현한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었고 그것은 엄청난 특권이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그 자체 그것만으로도 영광이고 기쁨이고 특권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을 만나 예배할 있다는 것은 인류에게는 복음 곧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교회는 이러한 복음을 전하라는 사명으로 시작되었다. 그렇게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된다. 주님의 교회는 인간의 조직체(organization)이 아닌 몸의 유기체(organism)로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신약적 교회의 모습은 솔로몬 성전보다는 스룹바벨 성전과 닮아 있다.

 

구약의 성전과 신약의 교회, 어떻게 다른가?

 

스룹바벨 성전도 바사왕국을 이어 패권국가가 된 헬라왕국에 의해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로마가 패권국가 되었을 때 헤롯이 이스라엘의 분봉왕이 되면서 이스라엘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해서 기원후 63년에 완성된다. 헤롯 성전은 곁 모양은 화려했지만 성전을 지은 목적부터가 달랐고 형식적 예배가 이루지고 진정한 영적 예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성전 뜰에서는 장사 거래가 이루어졌다. 예수님은 성전 뜰의 장사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어버리는 정결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셨다. 그래도 성전이었기에 제사예배는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원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헤롯성전 역시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지금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70년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은 구약 예배의 종언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제사예배의 종언이다. 다시는 죄를 사하기 위한 제사는 끝났다는 선언이다. 제사예배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종언을 고했다. 그래서 신약의 예배는 이미 죄사함을 받은 자들의 기쁨으로 충만한 예배다. 곧 신약의 예배는 잔치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공생애는 가나 혼인잔치로부터 시작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쁨의 잔치가 있는 혼인잔치다. 신약의 예배는 혼인잔치의 성격을 가진다. 이렇게 구약예배와 신약예배는 차이가 들어난다. 어 이상 구별된 제사장을 요구하지 않는다. 믿는 자 모두가 다 제사장이라고 선언되었다. 제사장에게만 성소에 들어갈 특권이 구약에 허락되었고 대제장은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갈 특권을 가졌는데,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지성소에 들어가심으로 다시는 일년에 한번 들어갈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죄가 사라졌기에 이제 제사장 된 믿는 자들은 누구나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특권이 주어졌다. 신부에게 죄를 고하여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것은 이미 종언을 고한 구약의 제사예배를 드리는 어리석은 행위다. 이것이 스룹바벨 성전 회복과 예수님의 성전회복의 차이다.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라. 이러한 제사장으로서의 특권은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가 영원히 사해졌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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