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
요한계시록 이해
요한계시록을 바로 이해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요한계시록을 다른 성경과는 전혀 다른 책으로 취급해서 읽는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 로마의 시대에 일어난 사건으로만 취급한다든지(과거적 해석), 예수의 재림때에 일어날 사건으로 다룬다든지(미래적 해석), 어떤 사건과는 관계없이 영적으로 너무 상징적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다(상징적 해석).
요한계시록만 특별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다른 성경과 같은 방식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면 된다. 물론 복음서는 복음서로서의 해석이 있다. 선지서는 선지서로서, 역사서는 역사서로서의 해석이 있다. 요한계시록 역시 일반 해석 형식을 따르되 요한계시록만으로서 해석이 있긴 하다. 그러나 특별나게 해석할 이유는 없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숫자나 기괴한 동물 모습 등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상황에서 그리고 구약 성경에서 보여준 상징 등을 따라 이해하고 해석하면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신약의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편지 형식으로 기록되었고, 편지를 받은 누군가 그것을 단순히 읽어 주었고 이를 듣는 자들은 특별한 해석 없이 편지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 이해했고 또한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의 상황에서 이해하고 용기를 가지면 된다.
성경의 전체 흐름에서 보는 요한계시록
성경을 바로 이해하는 첫째 요건은 성경을 전체 흐름 가운데서 이해하는 것이다. 숲을 먼저 보라는 것이다. 배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밭에 사과나무 한 그루가 있다면 이는 배나무 밭인가, 사과나무 밭인가? 당연히 배나무 밭이다. 그런데 사과나무 한 그루만 보고 사과나무 밭이라는 우를 범하면 안되는 것이다. 성경를 바로 이해하는 첫 걸음은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는 것이다. 성경 전체를 그림으로 그려보자.
창세기 창세기- 마태- 사도행전- 요한
1-11장 말라기 요한 유 다 서 계시록
창세기 창세기- 마태- 사도행전- 요한
1-11장 말라기 요한 유 다 서 계시록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 세상 끝 날까지의 인류역사를 그리고 있다. 이런 면에서 요한계시록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기 인류역사를 그리고 있는 창세기 1-11장을 바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 1-11장의 인류역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주권 또는 하나님의 통치(다스림)에 도전하는 역사를 그리고 있다. 이에 반해 요한계시록의 인류역사는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을 그리고 있다. 창세기의 인류역사는 구원주가 필요한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반면, 요한계시록의 인류역사는 인간을 심판하시는 심판주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의 인류역사는 같은 틀을 가지고 진행된다.
투쟁의 역사
창세기의 인류역사나 요한계시록의 인류역사는 창세기 3:15의 틀을 가지고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창세기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 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세기 3:15에 보면 여자와 뱀의 투쟁 그리고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투쟁이 예고되고 있다. 이러한 투쟁의 역사가 예고된 이유는 하나님이 창조한 최초의 인간의 타락에 있다. 인간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땅을 인간에게 맡겼다. 그러나 땅에 대한 인간의 통치는 언제나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가운데 주어진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주인이고 인간은 땅을 관리하는 청지기였다. 여기에 하나님은 땅을 인간이 마음껏 다스리되 하나님의 주권만은 인정하고 도전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욕심에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일을 벌인다. 이것이 인간 타락 사건이다.
주권이란 주인됨의 권리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언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인간의 타락을 이야기하고 있는 창세기 3장은 “여자가 본즉”이라고 표현함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를 거절하고 “인간이 보기에”좋은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3장 이후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과 인간이 보기에 좋은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로 나뉘어진다. 이를 신본주의(하나님중심주의)와 인본주의(인간중심주의)라 칭한다. 성경은 하나님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의 투쟁이 인류의 역사라고 규정한다. 이를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와의 투쟁으로 그리고 있다.
삶으로서의 성경
성경은 삶 자체를 이야기한다. 단순히 개념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 이야기다. 성경은 결코 살생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살생하지 말라는 말은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만을 부여할 뿐이다. 만일 살생하지 말라가 삶 자체라면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결코 터키를 먹을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는 그 자체가 우리가 현실에서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삶 자체이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한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전쟁이란 예외가 있긴 하지만, 사람 자체를 죽이는 것은 살인죄에 해당한다. 더 나아가 살인은 인격적 살인까지 내포해서 하는 명령이기도 하다. 말로도 사람을 해치는 것은 안된다고 선언한다. 이렇게 성경의 선언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 자체가 된다.
이와 같이 성경은 현실의 삶과 달리 생각할 수 없다. 구약의 역사서는 과거에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다. 그러나 그 사건들은 구원이라는 틀에서 현재의 삶으로 재조명되어 해석되어지고 그 과거의 사건은 지금 여기의 사건이 된다. 만일 요한계시록의 사건이 로마시대에 이미 종결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과거적 해석이라해도 그것은 지금 여기의 사건으로 재조명되어야 한다. 어쩌면 요한계시록의 사건이 예수님의 재림시기에 맞추어 일어나는 미래적 해석이라 할지라도 그 사건은 지금 여기의 사건과 관련이 있어야 한다. 만일 요한계시록을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시대에 상관없이 통일된 사건과 연관되어 지금 여기의 삶과 관련되어 해석되어져야 한다. 삶과 상관없는 영적 해석은 요한계시록을 단지 머리에만 있게 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모든 성경은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과 연관된다. 요한계시록도 지금 여기의 삶과 연관된다. 다른 성경과 다름없이 요한계시록도 해석되어져야 한다. 단 시대를 따라 요한계시록의 상징들이 변해서는 안된다. 통일된 연속을 가진 사건으로 상징은 이해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666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이다. 언제는 로마의 네로 황제였다가, 언제는 공산주의가 되고, 언제는 컴퓨터가 되고 바코드가 될 수는 없다.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그 무엇이어야 한다. 시대가 변해도 일관된 사건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이를 찾아낼 수 있을까?
성경은 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권위는 성경 자체가 가진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요한계시록도 예외는 아니다. 인간의 논리가 아닌 성경의 논리를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성경으로 해석하는 기본 원리를 바탕으로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기록될 당시의 언어와 문법에 대한 바른 이해도 필요하다. 그러나 성경해석의 기본은 성경 자체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바다짐승에 대해 입은 사자의 입 같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다니엘 7장에서는 사자는 바벨론에 비유되고 입은 먹고 부서뜨리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성경자체의 해석을 따라 이해되어 질 수 있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2
말세와 종말
요한계시록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할 용어들이 있다. 이는 단지 요한계시록 뿐 아니라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용어들이다. 특히 마지막 날에 대한 용어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말세와 종말을 구분하지 못함으로 혼선이 빚어진다. 또한 묵시와 종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함으로 혼선을 가중된다.
말세(말세들), last days
구약은 말세와 종말을 같은 의미로 이해했다. 이 세상은 메시야가 오시면 끝이라는 생각이다. 마지막 날은 심판의 날이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 (메시야는 히브리어,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라는 선포와 함께 메시야가 오셨으니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로 마태복음 3:10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구약 선지자의 마지막 날 이해에 대해 그림으로 그려보자.
그러나 신약의 이해는 다르다. 예수님이 오신 때로부터 지금까지 말세라고 선언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후 2000년이 지나도 여전히 말세다. 도대체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말세라고 선언하고 있는가? 일단 말세라는 용어에 바른 이해는 “말세들(last days)”로 적어놓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디모데후서 3:1을 보자.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여기에서 “말세”란 단수가 아니고 복수 “말세들(last days)”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말세”란 언제를 말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초림에서부터 예수님의 재림까지이다. 이를 그림으로 그리면 이와 같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15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라고 선포하신다. 여기에서 “가까왔으니”를 킹제임스나 ESV 영어성경은 “at hand”로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나라가 손에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나라가 이미 임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나라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땅에서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마태복음 13장은 하나님나라(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3:31을 보자.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예수님이 오심으로 천국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성된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 비유에 보면 좋은 씨만 뿌려진 것이 아니라 가라지도 함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님 재림 때 알곡과 가라지가 구별되어 알곡은 곳간에 가라지는 태어짐을 당하는 심판이 있다. 이때 천국은 완성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 곧 말세들 시기는 “이미 그리고 아직 (already and not yet)”의 시기이다.
여전히 질문은 남아있다. 왜 말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가? 그것은 “심판의 기준이 정해졌다”는 의미에서 말세이다. 누가복음 2:34에 보면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보며 이렇게 선언한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다.” 구약시대에는 천국갈 자와 지옥갈 자를 가르는 심판의 기준에 대하여 비밀이었다. 물론 충분히 구약성경은 심판의 기준에 대하여 모형으로 보여 주었으나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이 태어나자 분명해졌다. 예수님이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죄에서 구원한 구주로 받아들이고 주님으로 시인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가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마지막은 시작된 것이다. 심판의 기준이 정해지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천국의 문은 열려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그때는 구원의 문이 닫힌다. 준엄한 심판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내려질 것이다. 심판의 기준이 정해졌다. 이런 의미에서 말세다.
종말(말세시말), the last day of the last days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재난의 시작과 끝을 구분하고 있다.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마태복음 24:6)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태복음 24:10)
노아 시대에 세상을 심판하는 홍수가 있었다. 땅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식구 8명과 생물들은 살아남았다.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란 경고는 에녹시대로부터 있었다. 그리고 노아시대에 하나님은 땅을 홍수로 심판할 것임이 선포되었다. 그리고 홍수심판에서 살아날 자와 죽게 될 자의 기준은 방주였다. 하늘에는 홍수로 멸하게 될 것이란 징조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방주는 산 위에서 지어졌고 사람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어느 날 마침내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방주를 외면한 자들은 모두 죽었다. 노아의 식구가 방주에 들어갔고 방주의 문은 닫혔다. 닫힌 방주의 문은 홍수로 인해 죽어가는 자들에게 열리지 않았다. 그들은 방주에 들어갈 기회를 놓친 것이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의 상황을 들어 종말 마지막 시대의 마지막 날에 대하여 경고 하고 있다. 곧 종말이다. 아직은 말세의 시기다. 아직은 구원받을 기회가 주어지는 시기이다. 그러나 그 기회가 끝나는 날이 있다. 이는 심판의 날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임하는 날이다. 이 끝 날은 개인적으로는 육신의 죽음이요 우주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이다.
개인적으로 죽음이란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살아있을 때를 강조한다. 그러기에 전도서 12:1은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경고한다. 청년의 때란 살아있을 때를 의미한다. 우주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이다. 예수님의 초림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오셨다면 예수님의 재림은 인간의 심판을 위해서 오신다. 예수님의 재림은 노아의 방주가 문을 닫았듯이 구원의 문이 닫히는 날이다. 더 이상 예수님을 믿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날이다. 이날은 알곡과 가라지를 가르는 날이다.
성경은 종말신앙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재림은 도적이 오는 것에 비유한다. 언제 임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은 이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태복음 24:42-44) “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25:13)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고 종말이란 “지금 여기”의 의미를 가진다. 언제 나의 죽음이 오는가? 언제 주님이 다시 오시는가? 그것은 “지금 여기”에 온다는 것이다. 지금이 나의 마지막이다하고 살아가는 지혜가 종말신앙이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이해하기
요한계시록의 사건은 “지금 여기”의 종말적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사건은 지금 이 시간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 때 그 사건”이 일어난다는 묵시록적 관점이 아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을 과거에 그 때 그 사건이 일어난 사건일수도 있다. 또는 미래 어느 때에 그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계시록의 메시지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여기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종말적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을 이해한다면 성경 66권을 마무리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를 듣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