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출한 맥아더 장군 기념행사 성료
지난4월6일(토) 인천 자유공원 맥아드장군 기념광장에서 추모55주기를 맞이하는기념행사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주한 미국대사 Harry Harris.주한미8군 사령부.(사)한미친선연합회(KUFA).국회의원.주한미국군목. 그리고 참전용사와 많은 젊은이들로 광장을 가득매운 가운데성대히 거행되었다
멕아드 장군은 독실한 기독교의 신앙인으로 한국이 전쟁중 위기에 처하였을때에 해상조류 간만의 차이가
최악에 이르러 상륙작전의 성공확율이 5천분의 일로나와 찬반의 여론이 극심하였을때 그는 한국을 구출하겠다는 불굴의 용기로 하나님께 눈물로기도하며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작전을 지휘하였고 하나님이 응답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인천상륙 작전이 성공하게되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공헌해주신 대한민국의 영원한 인연이된 분인 것이다
이날행사에서
(사)한미친선연합회(KUFA) 고문을 맡고있는 피종진 목사님은 한미우호가 더욱 돈둑히 되고
다시는 이땅위에 전쟁이 없는 평화통일이 정착 되어 신앙의 자유와 세계위에 뛰어나는 경재강국이 되도록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영윈히 함께하시는 통일의 한반도가 되어지기를간절히 기원하였다
인천 자유공원에 있는 맥아더장군을 만나다
1. 6·25 전쟁
다들 알고 계시겠지만,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38도선을 넘어 기습남침을 하면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북한은 전쟁 개시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고, 단기간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고 내려갈 정도로 초기 주도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러한 북한의 남침에 대해 국제연합(UN)은 안전보장이사회를 열고 북한의 공격을 불법 남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이에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16개국으로 구성된 유엔군이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격퇴하고 1950년 9월 15일에는 국군 해병대와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세를 뒤집었으며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였습니다. 그리고 10월 1일 국군 1사단은 38도선을 넘어 북진에 들어섰고, 다음날 2일에는 유엔군도 38도선을 넘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38도선을 넘은 후 평양을 탈환하였고 이후에도 계속 북진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너 6·25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중국인민지원군의 급작스런 참전으로 초기에는 서울이 다시 점령되는 등 전세가 역전되었으나, 이후 서울을 다시 재수복하는 등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장기간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전쟁 중반부인 1951년 초여름부터는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들었고, 소련이 마침내 유엔을 통해 휴전을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유엔군이 응하여 1951년 7월부터 판문점에서 본격적인 휴전회담이 열렸으나, 포로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회담이 난항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장기간의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에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6·25전쟁은 휴전 상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 인천상륙작전
6·25전쟁에서 초반에 북한군에게 밀리던 전세를 뒤집은 결정적인 순간은 바로 인천상륙작전입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으며, 순양함과 구축함을 포함에 260척의 함선이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상륙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미 제7사단, 국군 제17연대 등으로 전투부대는 약 5만 명이었고, 지원부대를 포함하여 약 7만 5천 명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동원된 화포는 1,600문이었고, 탱크의 숫자는 500대 이상이었습니다.
9월 15일에 본격적으로 상륙이 시작되기 전에는 9월 13일과 14일에 걸쳐서 순양함과 구축함들이 함포사격으로 인천 항구를 초토화하였으며, 이후 미 제1 해병사단이 9월 15일 05시 30분부터 월미도에 대한 상륙을 전개하였습니다. 상륙 후 제1해병사단은 월미도, 인천항을 포함한 3개의 해안을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바다에서는 미 해군이 상륙작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었던 북한군의 부유기뢰를 쉽게 찾아내어 모두 파괴하였고, 이후 대대적인 상륙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3. 자유공원과 맥아더 장군 동상
앞서 잠깐 살펴보았듯이, 인천상륙작전은 유엔군의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맥아더 장군을 기념하기 위해서 인천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데, 동상 밑에는 석판에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문 이라는 제목으로 1957년 9월 15일, 맥아더장군 동상 건립위원회에서 쓴 글이 있었습니다.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문
정의에는 국경이 없고 투쟁에는 산도 물도 거침이 없다. 이러한 정의로써 이러한 투쟁을 감행하여 자유세계의 노선 위에 승리를 가져오고 그리하여 만인의 감격과 탄앙을 한몸에 두른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여기 이 동상의 주인공 다그라스 맥아더 장군이다.
그는 1880년 1월 26일 아-더 맥아더 장군의 둘째 아들로 미국에서 태어나서 소위로 출발하여 오성장군의 칭호를 받음에 이르기까지 무릇 반세기에 걸쳐 가지가지 혁혁한 무공을 세운 이로서 일본의 항복을 받음과 동시에 점령군 총사령관으로 패전 일본에 주재케 되었었다. 일본이 이같이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해방되었으나 불행히도 국토가 비참하게 양단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1950년 6월 25일 공산도배가 북으로부터 민국을 침입하였을 때 즉시 미국 정부는 한국 구원을 결정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공산 침략 항전에 참가한 모든 군대를 지휘하도록 명령하였다.
그의 탁월한 천재가 발휘된 것은 바로 이곳 인천에서였다. 그 호매한 식견으로 안출된 거의 기적적인 상륙작전을 1950년 9월 15일에 장군의 전두지휘 하에 결행하여 그 결과로 전세가 일전하여 자유의 승리와 민국의 구원을 가져왔었으니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일이여 이것은 영원히 기념할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감격에 넘치는 우리 국민의 명의와 의연으로 각계각층 대표를 망라한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위원회가 김경승 교수의 손에 의하여 비져진 장군의 용자가 영겁을 통하여 이 거룩한 지역을 부감하도록 이 동상을 세운 것이다. 장군과 그 휘하 용감한 유엔군 장병들이 우리와 자유를 위하여 이곳에서 취한 행동을 우리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의 유독한 침투에 대한 최후 투쟁에 승리를 거둘 때 까지 전쟁에는 승리에 대신할 것은 없다라고 말한 분 이 역시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1957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 동상 건립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