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5
라오다게아 교회
주님은 모든 교회를 7 교회로 분류하여 그 강점과 약점을 지적하여 강한 면은 더욱 강하게 약한 면은 고쳐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 앞의 네 교회는 진리에 대하여 취하는 입장에서, 에베소교회는 진리를 지키고 서머나교회는 진리를 위해 순교하는 교회라면, 버가모교회는 타협하고 두아디라교회는 거짓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이다. 5번째 사데교회는 인본주의 입장을 취하는 교회이고, 6번째 빌라델비아교회는 복음의 본질을 지키면서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논 교회이다. 이제는 마지막 7번째 라오디게아교회에 대하여 살펴보자.
주님의 모습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자가 사도 요한이다. 여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요한복음의 서두를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은 본질상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 이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곧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함이다.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인간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그러하다고 선언하면서 시작한다. ‘아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그러하다’고 동의하는 말이다. 두 가지 면에서 예수님은 확실히 그러하다. (1) 예수님은 인간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인간의 구원자가 되셨다는 면에서 분명히 그러하다고 선언하고 있다. 증인이란 말은 순교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다. 예수님 자신이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오셨고 또한 구원을 위해 죽으셨다. 이는 충분히 믿을만한 것(충성되고) 또한 사실로서 드러난 사건(참된)이다.
(2) 그런데 인간구원을 위해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요한복음 1:1-3를 보자. “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1에서 “태초에”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가 라오디게아교회에서 묘사하고 있는 창조의 근본의 “근본”이란 단어다. 이 근본이란 단어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있게 한 것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요한복음 1:3과 히브리서 11:3에서는 모든 만물이 말씀으로 지어졌음을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모든 만물을 있게 한 근본(아르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분명히 그러하다고 곧 아멘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로서 구원의 복음 그 자체이신데,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시라는 선언이다. 참으로 그러하다. 아멘!
주님의 책망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서머나교회와 빌라델비아교회는 칭찬만 있는 교회였다. 그러나 라오디게아교회는 칭찬은 없고 책망만 있는 교회였다. 예수님의 책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미지근한 신앙의 삶에 관한 것이고, 또 하나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삶의 모습이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왜 미지근한가? 그것은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가진 것이 많은 부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절실함이 없었다. 그래서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그러한 삶을 살고 있었다.
당시 라오디게아 지방 북쪽에는 뜨거운 온천수가 있는 히에라폴리스가 있었고, 동쪽으로는 차가운 식수를 흘려보내는 골로새가 있었다. 뜨거운 온전수가 라오디게아로 흘러오는 동안 물은 석회질이 섞인 미지근한 물이 된다. 이 미지근한 물은 구토증을 일으킨다. 그래서 먹을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이러한 미지근한 신앙의 삶에 대하여는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두는 삶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사데교회처럼 인본주의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실제로 자신들이 가진 것이 많아서 예수님이 그렇게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이 받는다는 다분히 이론적이고 또한 미신적인 신앙은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누구라도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가고 물으면 당연히 믿는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주님이라고 고백하기는 한다. 그러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예수님은 주인이 아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간다.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이러한 자의 삶으로 보면 믿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딱히 안믿는다고 말하기도 그런 자이다. 라오디게아교회의 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과의 깊은 영적 관계로부터 오는 영적 풍성함을 잘 모른다. 물론 외견상으로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매주 교회에 나오기는 한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현대에는 이러한 자를 문화적 교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믿기는 하는 것 같은데 삶 속에는 예수님이 없다. 이들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관하여 들여다 볼 줄을 모른다.
주님의 권면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한마디로 말하면 라오디게아교회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 맺는 훈련에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권하는 명령에 보면 “사서”라는 단어가 나온다. 물론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다. 나의 노력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깊은 관계 맺기의 신앙적인 삶은 훈련이다. 여기에 나오는 “징계”라는 말은 “훈련”이라는 뜻을 가진다. 여기에 “사서”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이다.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값을 치룬다는 의미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보화와 진주장사 비유가 나온다. 이 비유에 보면 보화와 진주를 사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판다. 이렇게 모든 것을 팔아 보화와 진주를 사는 이유는 그 보화와 진주의 가치가 자신이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1) 금은 변하지 않는다. 곧 흔들림없는 신앙은 불로 연단되어지는 신앙이다. 마치 순수한 금이 용광로에서 불로 제련되어 나오는 것에 빗대어 말씀하고 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삶에 관한 것이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삶은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사는 삶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신앙을 연단하라. (2) 신앙의 삶은 십자가의 은혜로 주어진 그 사랑의 풍섬함을 삶 가운데 느끼고 살아가는 삶이다. 이러한 은혜의 감격을 잃어버린 순간 신앙의 삶은 미지근해지기 쉽다. 흰옷을 사서 입으라는 은유적 표현이다. (3) 우리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가? 세상? 아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향하여 있어야 한다. 세상에서의 풍요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풍요한 관계에 눈이 향하여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안약을 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훈련을 예수님은 자신을 문밖에 세워두지 말고 예수님을 우리들 삶의 현장 안으로 들이라고 명령한다. 그리하면 예수님과 같이 식탁에 앉아서 먹는 곧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 시작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실제로 예수님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맡기는 삶 그래서 진정한 쉼이 있는 삶이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을 주인삼는 실제적인 삶을 연습하라.
주님의 상급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 상급은 보좌에 예수님과 함께 앉는 상급이다. 쉽게 말하면 다스림의 삶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땅을 다스리면 사는 삶을 명령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주인되심체 도전하여 인간 스스로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자 땅을 다스리며 사는 삶이 아닌 땅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땅을 바로 다스리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 있을 때 주어진다고 가르쳐 주신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어도 우리가 우리의 삶을 바로 다스리며 사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곧 하나님을 삶의 현장에서 주님으로 삼고 사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많은 것을 가졌으면서도 실패하고 있는 라오디게아교회의 고민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복하라. 그리하면 이 세상을 바로 다스리며 사는 삶에서도 승리할 것이다. 예수님을 문밖에 세워두는 어리석은 삶을 버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맺는 훈련에 열심을 내라. 그리하면 삶의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다.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은 7가지 교회에게 주는 말씀의 결론이다. 예수님이야 말로 진정한 우리들의 삶의 주인이시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4
빌라델비아 교회
주님은 모든 교회를 7 교회로 분류하여 그 강점과 약점을 지적하여 강한 면은 더욱 강하게 약한 면은 고쳐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 7교회 중 앞의 6번째로 다루고 있는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성경에서 6이란 숫자는 인간의 수다. 이는 하나님을 의존할 수 없는 연약함의 상징이다.
주님의 모습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형제 사랑이란 뜻을 가진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하여 예수님의 모습은 (1) 거룩과 진실의 모습이다. 거룩은 죄와 구별되었다는 의미로, 그래서 진실(참)이신 주님이시다. 진실 또는 참이란 단어는 부정을 나타내는 접두어와 ‘숨기다’라는 단어의 합성어로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거룩과 진실을 합쳐서 말하면 죄와 흠이 없으신 주님 앞에 숨길 수 없이 주님 앞에는 모든 것이 드러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2) 주님의 모습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자로 묘사되고 있다. 4:5에서는 예수님을 사자 다윗의 뿌리로 그리고 있다. 곧 왕궁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왕권을 가진 자의 모습이다. 1:18에 보면 이 열쇠는 사망과 음부의 열쇠다. 곧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다. 예수님만이 구원을 주는 자이다. 구원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유일한 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구원이 주어진다.
거룩과 진실이 되신 주님이 구원의 문을 열고 빌라델비아 교회에 두었다고 말씀하신다. 이 구원의 문을 그 누구도 닫을 수 없다고 선언하신다. 당시에는 핍박이 있었다. 이러한 핍박도 한번 열린 구원의 문을 닫을 수는 없다. 이러한 구원의 열린 문은 어느 교회에도 마찬가지다. 교회란 구원의 복음을 선포할 사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에베소교회는 자기와 다른 자를 부끄럽게 했고, 버가모교회는 세상과 타협함으로 믿는 자들의 우선순위를 흐릿하게 만들었으며,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진리를 받아들임으로 구원의 확실성을 잃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사데교회는 인간중심의 교회로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드러냄으로 구원의 본질을 오해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을 있는 그대로 환영하는 교회였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서머나교회와 같이 구원의 복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도 마다하지 않는 교회였다.
주님의 칭찬
[3: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3: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 빌라델비아교회는 서머나교회와 더불어 오직 칭찬만 있는 교회다. 그 칭찬의 내용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을 배반치않고 구원의 복음을 지켰다는 것이다. 이 교회는 결코 풍요한 교회는 아니다. 사데교회는 능력이 많았다. 그러나 이 교회는 환난을 견딜만한 능력도 없이 보인 교회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구원의 복음을 지켰다. 에베소교회처럼 지식에 뛰어난 교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들었던 그 복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구주로 고백함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단순한 복음의 진리를 지켰다. 아예 세상과 타협할 능력조차 없이 보였다. 이들 삶의 우선순위는 오직 예수님이었다. 오직 예수님만이 삶의 모든 것이었던 교회였다.
(2) 교회를 핍박했던 자들은 초창기에는 유대인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종교를 가진 종교인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세가 가졌단 율법의 정신도 버렸다. 단지 글로 기록된 문서에 나오는 율법으로 사람들의 선함과 악함을 판단하는 행위의 종교인들이었다. 율법 앞에 죄인으로 드러날 수 없는 자들을 용서받게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성막(성전)의 의미도 율법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이들의 눈에는 성경이 약속해 온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 기독교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파괴하는 자들로 그들의 눈에는 보였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과 논쟁을 벌였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행실을 그대로 기독교인들에게 행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인간구원을 파괴하는 사탄의 회였다. 그러나 빌라델비아교회는 이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기독교인들은 박해하던 이들 중 일부가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고백하고 기독교인으로 돌아왔다. 이는 기독교를 박해하던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바뀌는 것과 같은 기적이다. 교회를 박해하던 자가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빌라델비아교회 앞에 나타난 것이다. 바로 제대로 믿는 자 앞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로 인해 빌라델비아교회는 주님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게 된다.
주님의 권면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3: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예수님의 재림이 약속되고 있다. 예수님의 초림은 인간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님의 재림은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오신다.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원에 대한 기록이다. 예수 재림에 대한 약속은 결국 이 세상이 끝날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 끝 날이 개인적으로는 육신적인 죽음이겠지만, 우주적으로는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세상 끝이다. 그래서 주님은 끝까지 구원의 복음을 붙잡고 현실의 문제나 거짓 가르침에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서 구원을 놓치지 말라고 권하신다.
이렇게 믿음을 끝까지 지킨 자는 (1) 끝까지 예수님이 지켜 주마고 약속하신다. 요한복은 13:1에 보면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2)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주신다고 또한 약속하신다. 이 말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믿는 자는 그 심판에서 예외가 된다는 확신이다. 오히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거처를 예비하시고 예수님의 재림 때 믿는 자들을 영접하여 예수님이 계신 곳에 함께 있게 되리라고 요한복음 14:2-3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주님의 상급
[3: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 상급으로 기둥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전과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에 주목하자.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다. 이는 성도들의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 예수님은 요한복음 6:37에서 “내게 오는 자를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다. 당시 지진으로 인해 건물이 흔들리면 기둥만 남고 무너지는 건물들을 보았던 빌라델비아 사람들이었다. 여기에 그 자리에 어떠한 경우에도 그대로 남아있는 기둥을 비유함으로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급으로 말씀하신다.
(2) 이제 더 나아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되었음을 상급으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 곧 하나님께 속한 자요, 새 예루살렘의 이름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 속한 자가 되며, 예수님의 새 이름 곧 예수님께 속한 자가 된다. 이렇게 하나님과 예수님께 속한 자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는 영원한 하나님의 보호에 거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믿는 자들의 삶에 울타리가 되어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의 행복이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3
사데 교회
주님은 모든 교회를 7 교회로 분류하여 그 강점과 약점을 지적하여 강한 면은 더욱 강하게 약한 면은 고쳐 흐트러지지 않게 한다. 7교회 중 앞의 4 교회는 “진리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키는가?”에 대한 것으로 요약하여 정리할 수 있다면, 요한계시록에서 ‘5’란 숫자는 ‘다스림’의 숫자다. 5번째에 등장하는 사데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어떠한가?
주님의 모습
[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주님의 모습이 에베소교회에서 보이신 모습과 비슷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교회의 일군을 상징하는 일곱 별만 같다. 에베소교회에서 주님은 교회를 상징하는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닐고 계신다. 반면에 사데교회에서는 성령을 상징하는 일곱 영이 등장한다. 그리고 두 교회의 차이점은 동사에 있다. 에베소교회는 ‘붙잡다’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사데교회는 ‘가지다’라는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에베소교회에사용되고 있는 ‘붙잡다’라는 동사는 ‘... 아래에 두다’라는 의미로 교회와 교회의 일군들이 주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면, 사데교회에 사용되고 있는 ‘가지다’는 문자 그대로 ‘소유하다’의 의미다. 이로서 사데교회의 일군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밝힘으로 사데교회를 무장시키신다.
특별히 예수님은 일곱 영 곧 성령을 가지시고 계심을 밝힌다. 왜 사데교회에는 성령 하나님이 강조되고 있는가? 성령은 단순히 영적 힘이 아니다. 성령에 대하여 예수님은 요한복음 16:13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쉽게 말해서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되어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사데교회에 대하여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를 다스려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주님의 책망
[3:1-2]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사데교회는 5번째 등장하는 교회다. 요한계시록에 ‘5’란 숫자는 ‘다스림’과 연관된다. 에베소서 4:15과 골로새서 1:18에서 분명히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심을 밝히고 있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다스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분멸하고 그 말씀을 교회의 각 지체 곧 하나님의 일군들이 그 말씀을 따라 행하여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나라와 인간나라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생각이 대립구조를 가지고 있다. 교회는 하나님중심 말씀 중심으로 움직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교회의 핵심이 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데교회는 인간주의 중심의 교회이다. 그래서 곁으로 보기에는 인간을 위한 인간에 의한 인간의 교회로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늘의 모습을 보자. 예수님의 오심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인간을 구제하는 일이 교회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분명히 하자.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주권이 우선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곳에 인간이 살라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중심의 인권이 교회로 밀려오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도전받고 있다. 인권을 부르짖으면서 동성애가 교회에 들어와 정당화되고 있다. 간통죄가 사라진지는 오래되었고, 최근에 한국에서는 낙태죄에 대한 헌법 불합치 판결을 헌법재판소가 내렸다. 그리고 문제는 많은 기독교인조차도 이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버가모교회에서 현실과 말씀사이에의 고민이 있었고 버가모교회는 이에 타협하는 교회로서 주님의 책망을 받았다.
그런데 사데교회는 고민하면서 현실과 말씀의 타협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자체가 인본주의적 교회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문제는 인간주의가 그 출발이라는 점이다. 참으로 많은 일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죽은 교회라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과 관계가 없는 교회라는 의미다. 성경에서 죽음이란 분리 또는 단절이다. 인간을 구제한다. 인권의 중심이 된다는 등 많은 일은 하지만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행위의 온전함을 찾을 수 없다고 책망하신다. 온전한 행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온전함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틀렸다는 것이다. 사데교회는 인간이 보기에 좋도록 행해지고 있는 교회라는 것이다. 교회라는 간판은 달고 있지만 주님과는 단절된 교회로서 죽은 교회이다.
주님의 권면
[3:2-3]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사데교회의 문제는 인간주의적 행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는 잘못된 시각의 문제가 있다. 이를 어렵게 이야기하면 사회복음주의이다.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가를 묻고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려는 것이 남아있다. 그래서 사데교회에게 무엇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하나님 중심으로 신본주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생각하고 이를 굳건하게 하라고 권하신다. ‘굳건히 하다’는 의미는 ‘흔들리지 않다’는 것이다. 인간을 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인간이 먼저‘가 되면 안된다. ’하나님이 먼저‘야야 한다. 그러다 보면 결국은 인간을 위한 것이 된다. 이는 우선순위의 문제다.
여기에 주님은 (1)생각하고 (2)지켜 (3)회개하라고 권면한다.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는지 말씀을 통해 다시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베드로가, 바울이 복음에 대해 어떤 반을 보였고 복음에 대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다시 생각해 보고 교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의 복음을 지켜 파수하라고 명령하신다. 오늘 날 복음이 곡해되어지는 것이 문제다. 복음의 본질은 창조주 하나님께 개개인이 회개하여 돌아가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18에서는 복음의 본질에 대해 분명히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로 죄에서 해방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게 하여는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죄란 단순히 윤리적인 죄가 아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그래서 창조세계의 주인되신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고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온 죄다. 인간이 스스로 주인되어 살아왔음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창조주 하나님만이 진정한 주인되심을 고백하고 창조주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다.
이러한 복음의 본질에 대해 누가복음 15:10에서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하면서 개개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구원은 개인적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개개인이 믿음의 씨앗이 되어 사회에 심어져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 개개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하는 사명이 교회에 주어진 사명이다. 사회 전체가 아닌 너 개인이 먼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그 개개인이 모이면 그 공동체는 당연히 하나님의 공동체가 된다.
인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돌라오라. 언제? 지금이다. 이 말이 주님이 도적같이 오신다는 이야기다. 도적은 예고 없이 온다. 예수님의 재림도 이와 같다. 지금이 마지막 순간이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이 기독교인의 삶이다. 지금 용서하지 않으면, 지금 사랑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 이것이 성경의 종말론적인 삶이다. 그래서 도적같이 오신다는 말은 지금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는 의미다.
주님의 칭찬과 상급
[3:4-6]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흰 옷을 입었다 함은 예수님을 믿어 죄로부터 벗어나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한 자가 된 구원받은 성도를 말한다. 구원받은 자에 주어진 최고의 복은 주님이 함께해 주신다는 것이다. 사데교회가 비록 인간중심적 교회이긴 하지만 그 안에 여전히 주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자신의 죄가 없어졌음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데교회는 이런 복음의 본질로 돌아오면 (1)흰옷을 입게 되는데 이는 죄가 없어짐에 대한 확신이며 (2)결과적으로 생명책에 기록되어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고 있으며 (3)이렇게 죄가 없어지고 생명이 주어짐에 대한 확신에 대한 의미로 예수님이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해 준다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주님의 보장이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2
두아디라 교회
주님은 모든 교회를 7 교회로 분류하여 그 강점과 약점을 지적하여 강한 면은 더욱 강하게 약한 면은 고쳐 흐트려지지 않게 한다. 7교회 중 앞의 4 교회는 “진리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키는가?”에 대한 것으로 요약하여 정리할 수 있다. 에베소교회는 진리를 지키고자 했던 교회이고, 서머나교회는 진리를 위해 순교하는 교회라면, 버가모교회는 타협하는 교회이고,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이다. 거짓 진리를 받아들인 두아디라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주님의 모습
[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시되
예수님의 모습은 (1)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자로 묘사하고 있다. 이는 23절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의 모습이다. (2) 빛난 주석과 같은 발을 가진 자로 예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는 진노의 심판을 행하시는 주님의 모습이다. 14:17이하에 보면 심판주되신 주님은 낫을 휘둘러 포도송이를 거두는데 이를 포도주 틀에 던져 넣는다. 이 틀 안에서 발에 밟혀 떠지는 포도송이를 상상해 보라. (3)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는 당시 두아디라가 제우스 신의 아들 아폴로를 주신으로 섬겼는데 이에 대하여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주시시켜 주고 있다.
주님의 칭찬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두아디라교회는 4가지 행위에 대하여 주님의 칭찬을 들었다. 에베소교회와 달리 포용할 줄 아는 사랑이 있었고, 자신들이 들었던 진리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섬기는 봉사가 있었고 배 아래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배젓는 노예와 같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수행하는 인내가 있었다. 이러한 4가지 행위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더해져 갔다. 그들의 열심은 식을 줄 몰랐다.
주님의 책망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두아디라교회의 열심을 보면 이단들에 속한 자들의 열심을 본 듯하다. 이단에 속한 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진리에 대해 더 열심히 배우고 전하고 그 진리를 인내로 지켜가는 모습을 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하다. 물론 바른 진리를 가지고 있는 두아디라교회 성도들 역시 그 열심은 있었다.
두아디라교회의 열심의 문제는 거짓 진리에 대한 열심이었다. 그들은 거짓 진리를 용납한 교회였다. 자칭 선지라고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한 교회로 주님의 책망을 들었다. 이세벨은 시돈 왕의 딸로 북 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왕비로 받아들인 여인이었다. 이세벨은 자신의 나라에서 섬긴 바알과 아세라 신을 이스라엘에 함께 가지고 와서 북 이스라엘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게 한 여인이었다. 이로 인하여 아합은 어느 왕보다도 하나님을 가장 노하게 만든 왕이었다(열왕기상 16:33). 이세벨을 받아들인 것은 단지 사람만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이세벨이 섬긴 우상도 함께 받아들인 것이다. 이러한 아합과 같이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선지자를 받아들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칭 선지자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잘 물어 설명하고 전하는 자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칭 선지자라 칭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고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이다. 쉽게 말하면 이단이 교회에 침투한 것이다. 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짓 진리의 선포자인 것이다. 두아디라교회 자체가 거짓 진리로 출발한 교회는 아니다. 그러나 거짓 진리를 진리로 오해하여 받아들임으로 교회는 진리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이는 단지 이단의 교회의 침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것들이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권이란 이름으로 교회에 스며들어온 동성애 그리고 종교 혼합(다원)주의 등 교회는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할 능력을 상실해 가기 시작했다. 버가모 교회는 단지 현실과 진리를 적당히 타협한 교회였다면, 두아디라교회는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진리를 받아들인 교회였다.
한번 거짓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확신으로 가게 되면 원래의 진리로 돌아오는 것이 힘들다. 이 말이 회개할 기회는 주었으나 자신의 음행을 멈추지 않았다는 말이 그 말이다. 거짓을 거짓으로 알고 현실의 문제 때문에 타협하는 자는 그래도 회개할 기회가 있지만, 거짓을 진리로 굳게 확신하는 자는 다시 회개하여 돌아오기 힘들게 된다. 그것은 생각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경고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세 가지 경고가 따른다. (1) 침상에 던진다. 이는 병상에 눕게 될 것을 의미한다. 그 병은 육적인 병일 수도 있고 영적 앓음일 수도 있다. (2) 큰 환난 가운데 던져진다. 이는 단순히 믿음으로 오는 순교를 말한ㄴ 것이 아니라, 잘못된 믿음을 가진 자들의 삶을 보면 안다. 가정의 파탄이나 경제적 손실 등이 있다.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은 거짓 목자 삯군 목자이다. 이들은 이익 사업을 동반하여 자신들의 진리를 전한다. 이를 동조하는 자들은 이곳에 자신들의 재산을 투척한다. 그리고 이것이 잘못되었음을 알 때는 이미 경제적 손실로 인한 고통을 받고 있는 중이다. 이런 식으로 거짓 진리를 추정하는 자들 곧 거짓 진리의 자녀들은 영원한 영적 사망에 이르게 된다. 진리인줄 알고 믿고 따랐는데 주님은 모른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성경을 바로 알고 성경을 바로 가르쳐야 한다.
주님의 권면
[2:24]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탄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은 없노라.
[2:25]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거짓 가르침은 사탄의 깊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 대항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이러한 거짓 진리를 거부하고 성경의 진리를 지키는 자들이 여전히 두아디라교회에 있었다. 이들에게는 정말 잘하고 있다는 말외에 더 다른 짐을 지을 것이 없다. 왜냐면 인내함으로 말씀을 지킨다는 것 그 자체로서 수고로운 짐이 되기 때문이다. 주님이 할 수 있는 권면은 어떤 가르침이라도 잘 분별하여 진리릐 말씀을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거짓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진리를 바로 지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
[2:26]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2:27]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2:28]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
[2:29]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1) 다스림의 권세가 주어진다. 이는 시편 2:9에 있는 말씀으로 이어서 주어진 27절의 질그릇을 깨뜨리는 권세 곧 심판의 권세다. 이는 주님에게 주어진 권세로 바른 진리를 지킨 자들의 권세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이는 곧 교회를 주님이 세우시면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주신 심판의 권세다. 곧 거짓 진리를 진리로 잘못 알고 있는 자들에게 지옥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권세다. (2) 새벽 별을 주신다. 22:16에서 예수님이 바로 광명한 새벽 별이라고 하신다. 어둠이 지나갔음을 알리는 새벽 별이다. 예수님 자체가 진리가 되신다. 새벽 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렇게 이기는 자는 어둠을 밝히는 세상의 빛이 된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1
버가모 교회
전투에 임하기 위해 군인은 군인으로서의 훈련이 필요하고 또한 무장되어야 한다. 창세기 3:15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인간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중심의 나라와 인간중심의 나라는 이미 투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간구원이 가시화 되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는 교회를 주님은 무장시켜야 했다.
모든 교회를 7 교회로 분류하여 그 강점과 약점을 지적하여 강한 면은 더욱 강하게 약한 면은 고쳐 흐트려지지 않게 한다. 7교회 중 앞의 4 교회는 “진리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키는가?”에 대한 것으로 요약하여 정리할 수 있다. 에베소교회는 진리를 지키고자 했던 교회이고, 서머나교회는 진리를 위해 순교하는 교회라면, 버가모교회는 타협하는 교회이고,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이다. 세상과 타협했던 버가모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주님의 모습
[2:12]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버가모교회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간 교회이다. 버가모는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로, 당연히 황제숭배가 넘쳐난 도시였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된 시기로 추정되는 당시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신전이 있었는데,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을 ‘주님이요 하나님(Dominus et Deus)’로 자처 황제숭배 강요했다. 버가모교회는 이러한 국가의 강요에 적당히 타협하는 교회였다. 여기에 예수님은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자라고 말씀한다. 에베소서 6:17에서 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했다. 계시록 19장에서는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무죄를 판결하는 기준이 되고 그래서 죄인을 벌하는 검이 된다. 재판과 처형이라는 좌우의 날선 검을 가지신 이의 모습이다.
주님의 칭찬
[2: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주님은 7교회를 향해 “안다”는 말씀으로 시작하신다. 여기에서 “안다”는 것은 눈에 보듯이 안다는 의미다. 주님은 우리의 형편을 너무 잘 아신다. 버가모교회가 처한 형편을 눈에 보듯이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너무나 잘 알고 계셨다. 당시 교회는 황제에 대하여 ‘주’로 부르지 않음으로 고난을 받았다. 물론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로는 인정하였지만 황제에게 속한 자임을 거부했다. 당시에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나는 당신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이다. 이런 면에서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던 마틴 루터는 교회라는 명칭으로 ‘church’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좋아했다. church란 ‘주님의 것’이라는 의미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만을 주님으로 고백했다. 자신은 오직 주님께 속한 자라는 고백이다. 그러기에 황제를 인정하되 주님으로는 고백할 수 없었다.
왕정시대에 있어서 왕이란 신의 아들로 불렸다. 곧 신이라는 의미다. 그럼으로 황제가 주님으로 고백되는 순간 그것은 우상숭배요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였다. 이런 의미에서 버가모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었다. 황제숭배를 거부한 순간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현실과 신앙의 갈등이다. 일제가 점령했던 시절에 신사참배와 신앙간의 갈등과 같다. 신사참배는 단순히 국가적 의례행위일 뿐이다고 생각하고 신사참배는 신앙과 관계없다고 억지로 자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거절함으로 신앙을 지켰다.
안디바가 그런 자였다. 일설에 의하면 안디바는 황제숭배를 거절함으로 불에 벌겋게 달군 놋쇠 황소위에 얹어져 타서 죽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안디바’라는 이름은 ‘안티(반대)’와 ‘파스(모든 것)’가 결합된 이름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파괴하는 모든 것에 반대한다는 의미다. 버가모교회가 비록 타협하는 교회이긴 하지만 그러한 중에도 안디바와 같이 믿음을 지킨 자들도 있었음으로 칭찬을 들었다.
주님의 책망과 권면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1) 버가모교회는 발람의 교훈을 받아들였다. 발람은 민수기 22-25, 31장에 등장하는 인물로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는 발락의 말을 듣고 마침내 이스라엘로 우상의 제물을 먹게하고 행음하도록 한 자였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발람은 발락이 준 제물에 진리에 반하는 길로 간 자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돈 때문에 진리를 굴절시키는 경우가 허다하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밭의 비유가 나오는데 아마 가장 갈등이 심한 자가 가시떨기 밭일 것이다. 가시떨기 밭의 신자는 잘 믿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염려가 많은 자이다. 이들은 결코 하나님 우선순위 신앙을 가지지 못한다. 세상에서 자신들이 목적하는 바가 먼저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 서머나교회는 영적 풍요함이 더 귀한 것임을 알았기에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겨 가난해짐을 이겨냈다. 그러나 버가모교회는 하나님과 재물을 다 손에 가지고자 한다. 그렇게 그들은 타협하는 신앙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았다. 왜냐면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2) 또한 버가모교회는 니골라 당의 교훈도 받아들였다. 니골라 당의 교훈의 핵심은 영지주의 사상을 가진 율법폐지론이었다. 영지주의 사상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상이다. 어차피 육은 썩어 없어질 것이고 영만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으로 영의 구원만을 말한다. 이들은 오직 은혜만 강조한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도덕은 관계없다. 행위의 문제를 도외시 한다. 왜냐면 구약의 율법은 다 폐하여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도덕적 선함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짐을 믿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도덕적 선함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행위가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는 올바른 행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행위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결과인 것은 맞다. 율법이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율법은 지켜져야 한다. 로마서 10:9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는 자에게 구원이 주어진다고 선언한다. 단지 마음의 고백이 아니다. 삶으로 시인되어야 한다. 마음으로의 신앙고백은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단순히 입으로 믿습니다가 아니라 그 믿음이 삶 가운데 드러나야 한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황제숭배는 거절되어야 한다. 이 두 가지를 겸하여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니골라 당은 상관없다고 가르쳤다. 황제숭배는 단지 의례라고 주장한다. 영의 일과 육의 일을 구분한다. 신앙적인 일과 세상에서 살아가는 현실은 서로 다른 문제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함으로 버가모교회는 타협하는 교회가 되었다.
(3) 주님은 타협하는 삶에서 돌이키라고 권면하신다. 회개하는 모습을 가장 잘 그리고 있는 성경이 창세기 12:1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여기에 보면 “떠나”와 “가라”는 두 동사와 만난다. 회개는 떠나 가는 것이다. 왜 못 떠나는가? 가야할 곳을 모르기 때문이다. 왜 가지 못하는가?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버려야 할 것을 분명히 버려야 주님을 온전히 따라갈 수 있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
[2:1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상급으로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이다. 만나는 출애굽하면서 광야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선언하셨다(요한복음 6:48).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한다. 곧 예수님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이는 감추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 감추어진 만나가 주어진다. 곧 생명이 주어진다.
당시에 흰 돌은 경기의 승리자에게, 재판에서 무죄가 선언된 자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연회장 초대장으로 흰 돌이 주어졌다. 여기에서의 흰 돌은 연회장 초대장이다. 초대장에서 초대받은 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 이름은 새 이름이다. 천국에의 초대장 그 초대장에는 하나님이 주신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10
서머나 교회
전투에 임하기 위해 군인은 군인으로서의 훈련이 필요하고 또한 무장되어야 한다. 창세기 3:15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인간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중심의 나라와 인간중심의 나라는 이미 투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간구원이 가시화 되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는 교회를 주님은 무장시켜야 했다.
모든 교회를 7 교회로 분류하여 그 강점과 약점을 지적하여 강한 면은 더욱 강하게 약한 면은 고쳐 흐트려지지 않게 한다. 7교회 중 앞의 4 교회는 “진리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키는가?”에 대한 것으로 요약하여 정리할 수 있다. 에베소교회는 진리를 지키고자 했던 교회이고, 서머나교회는 진리를 위해 순교하는 교회라면, 버가모교회는 타협하는 교회이고,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이다. 진리를 위해 순교했던 서머나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주님의 모습
[2:8]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이르시되
예수님은 자신을 처음과 마지막 곧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선언하신다. 또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선언하신다. 1:8은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은 순교당한 서머나 교회에게 죽음에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부활의 소망을 갖게 하신다.
주님의 칭찬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서머나 교회는 주님의 칭찬만 있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주님의 칭찬만이 있고 책망이 없는 교회이다.
(1) 서머나 교회는 그들이 받은 그 환난과 그 궁핍 때문에 칭찬을 들었다. 원문에는 환난이나 궁핍에 정관사가 붙어있다. 이렇게 정관사 붙은 이유는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오는 환난과 궁핍이었기 때문이다. 특별히 ‘궁핍’은 아예 거지가 되었다는 의미다. 헬라어에서 ‘가난’에 대하여 능력이 없어서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는 가난 곧 장애나 건강으로 인해 일을 할 수 없어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가난과 일은 하는데 그 대가로 받는 돈이 너무 적어서 가난하게 지내는 경우가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가난은 있는 재산도 다 빼앗겨서 빈털터리가 되는 경우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핍박을 받아 직장에서 쫓겨나고 관직에서도 물러나야 했으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이 교회에 있었던 폴리갑 장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86세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11명의 성도와 함께 화형을 당했다. 155년 2월 23일의 일이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참으로 어리석어 보인 자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세상의 눈으로는 궁핍하게 보였으나 주님의 눈으로는 부유한 자였다. 영적으로 부자였다. 에베소서 1:7을 보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배부른 자들이었다. 마태복음 5:6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하였으니 이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배부른 자들이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에 부요한 자들이었다.
(2) 그런데 서머나 교회의 환난과 궁핍함이 특별히 유대인들 때문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로마인 빌라도에 의해 죽게 된 경우 같은 것이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기독교인을 가장 힘들게 만드는 자는 이스라엘인이다. 흥미로운 것은 분명 유대인인데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2:28-29에서 유대인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는가?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유대인은 종교화 되었다. 그들은 성막이 주는 진정한 의미를 외면하고 율법의 종교가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오히려 사탄의 회당이 되었다. 사탄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자란 의미를 가진다.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은데 실상은 하나님께 반하는 것을 행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처럼 보이나 실상은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자들이었다. 폴리갑 장로가 화형당한 날이 안식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사람을 치유하는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안식일에 일을 행하냐고 비난하였는가?
주님의 권면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1) 세상에서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가를 반복해서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이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서머나 교회가 받을 고난의 이유와 크기를 밝힌다. 이유는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누가? 마귀다. 이는 사탄의 다른 이름이다. 사탄은 하나님께 대항한다는 의미라면, 마귀는 파괴자라는 의미다. 핍박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자 옥에 집어넣어 고문등을 가한다는 것이다. 고난의 크기를 보자. 10일 동안 핍박이 주어진다고 한다. 10이란 숫자는 7, 12와 더불어 완전수다. 10이란 수는 철저하다 완벽하다의 의미로서의 완전수다. 그리고 10의 3제곱 곧 1,000은 무한대의 기간을 나타낸다면 10이란 수는 한정된 기간이 있는 수다. 서머나 교회는 핍박을 받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독한 핍박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난은 한정이 있다. 고난이 머잖아 멈출 것을 알려준다. 그렇게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던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정하는 놀라운 기적의 변신이 있게 된다. 이는 교회의 승리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6:33에서 이렇게 권면하신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앞으로 이긴다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겼다고 선언하시는 장면이다. 무슨 말인가? 기독교인은 이기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긴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결말은 이미 안다. 결국은 승리하는 것으로 결말은 나와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고난은 그 승리에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승리할 수도 패배할 수도의 싸움이 아니다. 반드시 승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싸우는 것이다. 최초의 복음으로 알려진 창세기 3:15에는 여인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싸움에서 여인의 후손이 이기도록 결론이 나와 있다. 이미 결론이 난 싸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싸우기에 그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2)그래서 두 번째 권면이 주어진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권면하신다. 언제까지 충성할 것인가? 죽기까지다. 여기에서 ‘충성하라’로 번역된 문자적 번역은 “믿어라”이다. 죽기까지 믿으라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믿음을 버리지 말라는 권면이다. 왜? 그것은 생명이다.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님의 모습과 닮아있다. 죽으면 살리라는 역설적인 권면이다. 믿는 자는 살기 위해 죽는 자들이다. 다시 1:8을 보자. 죽었으나 다시 사신 주님은 이제 이렇게 말씀하신다. 세세토록 곧 영원히 산다고 선언하신다. 고난을 피하기 위해 믿음을 포기 하더라고 결국은 죽는다. 이러한 죽음은 영원히 죽는 삶으로 이어진다. 곧 지옥의 삶이다. 그러나 죽기까지 믿음을 지킨 자는 영원히 사는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진다. 하나님나라에서 에덴에서 영원히 산다. 결과는 분명하다. 어떤 길을 택할 것인가? 이제는 선택하여야 한다.
승리자에게 주어진 상급
[2:11]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상급이다. 이는 생명의 관을 받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육적인 죽음이 첫째 사망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음부 곧 무덤에 있는 육신이 부활하여 영과 다시 결합한다. 영육이 다시 결합하여 마지막 심판대인 백보좌 심판이 주어지고 믿지 않은 자 곧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는 자는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 요한계시록 20:14을 보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지옥에 가는 둘째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 곧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다.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된다. 거기에는 영원한 에덴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이 울타리가 되어 지켜주시는 영원한 행복된 삶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기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가 되라.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9
에베소서 교회
전투에 임하기 위해 군인은 군인으로서의 훈련이 필요하고 또한 무장되어야 한다. 창세기 3:15에 의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인간 스스로 주인이 되는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중심의 나라와 인간중심의 나라는 이미 투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간구원이 가시화 되자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는 교회를 주님은 무장시켜야 했다.
모든 교회를 7 교회로 분류하여 그 강점과 약점을 지적하여 강한 면은 더욱 강하게 약한 면은 고쳐 흐트려지지 않게 한다. 7교회 중 앞의 4 교회는 “진리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지키는가?”에 대한 것으로 요약하여 정리할 수 있다. 에베소교회는 진리를 지키는 교회이고, 서머나교회는 진리를 위해 순교하는 교회라면, 버가모교회는 타협하는 교회이고, 두아디라교회는 거짓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회이다. 진리를 지키고자 했던 에베소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
주님의 모습
[2: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요한계시록 1:13-17에 등장한 주님의 모습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모습이다. 이는 7교회 모든 교회에 해당한다. 별은 교회의 일군이요 촛대는 교회다. 한마디로 주님의 함께 하심이다. 주님은 언제나 교회와 함께 하시고 주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 마태복음 28:19-20에서는 교회가 가진 사명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복음의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교회의 일군들과 항상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하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의 칭찬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에베소교회는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데 수고한 교회이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고통(수고)를 극복해 내는 용기(인내)를 가지고 실제로 거짓 진리로 인도하는(악한 자)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의 거짓 가르침을 시험하여 거짓 복음은 거절하고 참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는 교회이다. 이를 생각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수하는 일을 행위로 드러내 보이는 교회이다. 이렇게 진리를 지키는 것만이 주님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이 일에 게으르지 않고 진리를 지키기 위한 고난도 받아들였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니골라 당의 가르침이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고 있었다. 니골라는 최초로 교회가 뽑은 일곱집사 중 한 사람으로 말하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니골라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1)인간의 영혼은 육신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없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고 함으로 율법이 아닌 사랑만을 강조하여 율법은 폐기되었다고 하였다. (2) 영만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 인간의 구원에 육체는 중요치 않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육체가 짓는 죄는 정죄의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주장함으로 원하는 대로 자유의 권리를 사용하라고 하였다. 에베소교회는 이러한 니골라의 가르침을 배격했다. 이렇게 에베소교회는 바른 복음을 지키는 교회였다.
에베소교회에 대한 주님의 책망과 경고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1) 진리를 지키고자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칭찬을 들었으나,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림으로 책망을 받았다. 사랑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 요한으로부터 사랑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자란 교회였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자들에게 대해서는 철저하게 벽을 쌓았다. 함께 뜻을 하지 않으면 적으로 돌렸다. 자신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그들을 부끄럽게 하였다. 그럼 여기에서 처음 사랑이란 무엇인가? 처음 사랑은 창세기 2:25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이들의 삶은 상당히 율법적인 삶이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준에서 어긋나면 정죄하기 시작했다. 잘못은 지적받아야 하고 책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정죄하는 것만은 하나님께 맡겨야 했다. 요한복음 8장에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다. 이 여인에 대하여 예수님은 분명한 어조로 그녀의 잘못을 지적한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그러나 또한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에베소교회는 자신과 같이 행하지 않는다 하여 쉽게 정죄하는 잘못을 범하였다.
(2) 이에 예수님은 에베소교회가 행하는 잘못에서 회개하여 돌이키기를 명한다. 그것은 먼저 어디에서 떨어졌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정말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전혀 부끄럼이 없는 자들인가? 예수님이 가장 경계하여 경고하신 말씀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다. 남의 잘못을 들어다 보고 그를 정죄하기 전에 자신의 들보를 먼저 들여다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사랑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라고 하신다. 자신과 생각을 같이 하지 않더라도 때론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다가가 함께 복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랑을 말씀하시고 계신다. 물론 진리를 잘못 가르치는 자의 문제는 다르다.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자는 물리쳐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진리의 문제가 아닌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원수가 되는 경우가 있다. 쉽게 판단하는 일에서 멈추어야 한다. 쉽게 정죄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3)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주님은 경고하신다. 교회의 사명은 어두운 곳에 빛을 밝히는 것이다.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진리를 지키기는 하는데 정죄함이 지나치는 교회는 결코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화해가 아닌 싸움이 넘쳐나면 어찌 교회가 더 이상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교회가 가지는 복음전파의 사명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다. 고린도교회는 문제가 많았다. 서로 분파를 지어 분쟁하는 일이었고 자신이 받은 은사가 더 우월하다고 다투는 교회였다. 그렇게 함으로 세상에서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정도였다. 복음의 핵심은 화해다. 하나님과 화해 그리고 너와 나의 화해다. 그런데 화해의 자리에 싸움이 있으면 어찌 되는가? 부끄러움을 싸매어주는 교회가 아니라 서로의 부끄러움을 들쳐내는 교회가 된다면 어찌 되는가? 성막에 보면 등대가 떡단을 비추고 있다. 떡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등대가 더 이상 빛을 비추지 못하면 말씀은 감추어진다. 촛대가 옮겨진 교회 그래서 더 이상 빛의 사명을 감당치 못하면 말씀은 울리는 꽹과리 소리가 된다. 주님은 그러한 교회의 촛대를 옮겨 다른 교회에게 줄 것이다.
주님의 상급
[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성공이 아니라 승리다. 계속하여 이기는 자이다. 곧 말씀을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지키는 자이다. 진리를 지키되 처음 사랑의 삶을 사는 자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리라고 한다. 이는 창조의 때에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 주신 에덴동산에 있는 그 생명나무이다. 에베소는 아르테미스(다이아나)를 섬기는 도시였다. 아르테미스는 유방이 가득한 생명의 신으로 풍요의 여신이었다. 여기에 빗대어 생명나무의 풍요한 열매를 묘사하고 있다. 성경에서 생명이란 하나님과 교제를 의미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 오는 풍요한 삶이 상급으로 주어진다. 곧 진정한 에덴 곧 행복이 있는 기쁨이 넘치는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