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샘(23): "작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키자" (빌라델비아 교회)
제목: 생명 샘(23): "작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키자" (빌라델비아 교회)
본문: 계 3:7-13
요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계 3:8)
주제: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켜 칭찬만 받는 교회가 되자
교독문: 100번(나라사랑 2), 예배의 부름: 시 46:1-3
찬송: 545장(통 344장), 546장(통 399장)
일자: 2019년 6월 9일 주일 (애국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올리벳 세계선교회) www.samuelyun.com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계 1:11) 가운데 여섯 번째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편지를 읽겠습니다. 계 3:8-13 합독합시다.
3: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빌라델비아(필라델피아 Philadelphia)는 사데(Sardis)에서 27마일 남쪽에 위치하는데 헬라어로 ‘형제(adelphos)+사랑(philia)'이란 뜻을 가진 도시입니다. 요한 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의 7개 지역 가운데서 가장 도시 역사가 짧습니다. BC 140년에 버가모의 임금이었던 아탈루스 2세(Attalus Philadelphus)가 자신의 동생을 위하여 건설하였답니다. 아탈루스는 사람들에 의해 필라델포스(Philadelophos)라 불리었고 그의 이름을 따라서 ’빌라델비아=필라델피아‘라고 불려졌습니다. 현재는 알라쉐르(Allahshehr)라고 불리는데 “하나님의 도성 the city of God" "폐허 속에 있는 한 개의 기둥 a column in a scene of ruins”라는 뜻입니다. 이 지역은 원래 지진이 많기로 유명한 지역인데 A.D 17년에 일어난 큰 지진으로 인하여 주위의 크고 작은 도시 10개 정도의 파괴되었을 때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에 의하여 새롭게 도시가 건설되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무너진 도시를 건설해준 로마 황제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였는지 도시를 "네오가이샤라" 라고 불렀습니다.
버가모 왕국에 한 왕이 나이가 들어 그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하는데, 두 아들이 너무나 다른 겁니다. 왕위를 계승받아야 할 맏아들은 용맹하고 전쟁을 좋아하는 외향적인 성격이지만 성안에서 국사를 돌보는 일은 싫어했습니다. 반면에 둘째 왕자는 내성적이고 학문을 좋아하고 국사는 잘 돌볼 것 같은데, 용맹성이나 군사적인 면에서는 너무 부족했답니다. 주변의 여러 상황들을 보며 고민하다가 아버지 왕은 결국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큰 아들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주고 죽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첫째 아들은 궁에 거하면서 국사를 살피다가 아니나 다를까 너무 지루한 마음에 동생에게 국가경영을 맡기고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전쟁터를 돌아다니는 형을 대신해서 동생은 나라를 잘 경영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어갔습니다. 반면에 형은 주변의 나라들을 정벌하면서 나라를 계속해서 넓혀갔습니다. 그렇게 되자 주변의 나라들은 놀라게 됩니다. 조그만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막강한 나라를 형성할 수 있었을까 조사한 결과 두 형제의 각별한 형제애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 형과 아우를 이간질시키기 위해 아우를 찾아가 “언제까지 형 밑에서 굽실거리겠느냐?”면서 “당신의 지혜라면 충분히 형을 능가할 수 있고 많은 부귀와 영화를 보장해줄 테니 형을 대신하여 왕이 되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동생은 그 말을 거절하고 끝까지 형을 도와주며 형제애(‘필라+델피아)를 지켜 나갔습니다. 그리고 전쟁에서 돌아온 형에게 왕위를 넘겨주었고, 형이 죽고 나서 그 뒤를 이어서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동생이 아탈로스 2세로서 국민들이 형제간의 우애를 생각하며 지어준 별명이 필라(사랑) 델피아(형제)를 따서 필라델피아이고 그를 기려서 그 별명을 따라 빌라델비아라는 왕국을 만들었답니다.
빌라델비아 도시는 교통의 요지여서 장사가 잘 되는 도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산과 지진으로 인해 비옥한 땅이 만들어져 포도농사가 잘 되는 지역이었습니다. 또한 제 2의 아테네라고 부를 정도로 신전이 많은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종교적 열망이 남달랐던 도시였습니다. 역사기록에 의하면 AD 17년에 소아시아 지역을 쓸고 지나간 엄청난 지진이 있었는데, 그 핵심에 강타를 당한 도시가 빌라델비아입니다. 도시 전역이 다 무너지고 집 한 채 남지 않습니다. 피해가 극심해서 로마 제국(티베리우스 황제)이 다시 도시를 재건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진이 끊어지지 않아 낡은 벽돌들이 높은 곳에서부터 툭툭 떨어지는 것을 일상으로 겪으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지진 증세가 보이기만 하면 시민들은 도시를 떠나 도망갔다가 끝나면 다시 돌아와 살곤 했습니다. 매일 지진이 일어나고 집이 금이 가고 그러는 곳에 살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여기서 못 살겠구나. 떠나가야겠다. 내가 살 곳이 아니구나.’ 그러지 않겠어요? 빌라델비아 도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일상으로 겪으면서 살았단 말입니다.
몇 해 전에 이곳에 성지 순례 갔을 때 달라스에서 오신 두 분 권사님들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터 주변에 줄을 쳐둔 기둥에 앉으셨다가 뒤로 2미터 낭떠러지에 떨어져 부상을 입으신 적이 있었습니다. 급히 병원에 가셔서 치료는 받으셨지만 매우 놀라셨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두 곳 교회 순례는 생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은혜는 배나 더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만 들었습니다. 그들의 굳센 믿음, 인내, 사랑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곳을 방문하면 주택이 3000여 가구인데 이중 250가구가 헬라인, 나머지는 터키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기독교회는 25개가 있고 그중 5개 교회는 중형교회이고, 20개는 작은 교회가 있습니다.
자, 이제 본문의 말씀을 아시아의 일곱교회에 보낸 서신의 양식대로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이 없습니다.
(1) 수신자: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계 3:7).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를 섬긴 목회자가 누군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일 것입니다.
(2) 주님의 모습: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 (계 3:7)입니다.
① 거룩하고 진실하신 예수님(he that is holy, he that is true)으로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분(Holy One)이시며 진실하신 분(True One)이십니다.
‘거룩’이란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성삼위 하나님에게만 붙이는 상례적 표현이었습니다.
계 4;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시 16: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사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사 30:11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사 41:14-20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니라... 16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들을 날리겠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20 무리가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으신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하신 바인 줄 알며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
사 47:4 “우리의 구원자는 그의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니라”
사 48:17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사 49:7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사 54: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사 55: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막 1: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눅 4: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행 3: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또한 ‘진실’이란 헬라어 단어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알레테스(ἀλήθης)와 알레티노스(ἀληθίνος)입니다. 알레테스는 거짓이 아니라 참이라는 뜻이고, 알레티노스는 환상이나 모조에 반대되는 실제적이고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알레티노스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이고도 진정한 분이란 뜻입니다. 모조품이 아닌 실제적이고 참된 행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됩니다. 그 외 여하의 것들은 가짜 행복이고 속이는 것이고 환상이고 비실제적인 행복과 기쁨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진정 주님 안에만 있습니다.
계 1:5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계 3: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계 6:10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주님(O Lord, holy and true),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계 15:3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계 16:7 “또 내가 들으니 제단이 말하기를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 하더라”
계 19:2-11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 음녀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계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요 14:6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일 5: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②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 사자에게 자신을 ‘다윗의 열쇠(Key of David)를 가지신 이’라고 계시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다윗의 뿌리’, ‘다윗의 왕위’, ‘다윗의 열쇠’ 이런 표현은 구약성경에서 오실 메시야(그리스도 the Christ)를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문이 열쇠(키 key)를 위해서 있습니까? 키가 문을 위해서 있습니까? 키가 문을 위해서 있습니다. 그렇다면 키가 더 중요해요? 문이 더 중요해요? 문이 더 중요합니다. 천국의 문을 열고 닫으시는 권세를 예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졌다는 것은 다윗 언약 속에서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분을 의미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진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문을 열고 들여보내는데 그것을 막고 방해할 자가 없습니다.
계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계 1:18 “나는 살아 있는 자며, 죽은 자였으나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노라. 아멘. 또한 내가 지옥과 사망의 열쇠들을 가졌노라.”
마 16:19 “그리고 내가 천국의 열쇠들을 너에게 주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또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니라. 하시니라.”
마 18:18-20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요, 또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어지리라. 19 다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무엇이든지 구할 것을 땅에서 합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라.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 하시더라.”
사 22:22 “내가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눅 1:32 그는 위대하게 될 것이며,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라 불리울 것이요, 또 주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의 조상 다윗의 보좌를 주실 것이며
예수님께서 교회에 주신 자신의 모습 중에 다윗의 열매는 천국 열쇠인데 믿는 교회에게 주시는 것이고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시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열쇠는 무엇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주님은 교회의 탄생과 함께 천국열쇠를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교회의 건물이 아니라 교회인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이신데, 다윗에게 약속하신 왕권을 가지고 오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을 통하여 메시야 그리스도를 예언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예언은 성취되었습니다. 다행이 ‘다윗의 열쇠’는 우리에게 주신 나에게 주신 열쇠가 아니라 “주님이 가지신 열쇠”라고 하십니다. 메시야의 그림자인 다윗에 대한 약속이 있었고 성취가 있었음에도 다윗의 열쇠에 관해서 (1) 하나님의 무궁한 언약(삼하 23:5, 사 55:3, 54:8, 61:8, 히 13:20) (2) 기도의 응답(마 18:18-20, 계 3:7-8, 5:3-9) (3) 메시야 통치(사 22:22, 눅 1:32)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③ 열쇠는 열고 풀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의 비밀을 말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문제들을 다 풀고 닫힌 문을 다 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게 주신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소망과 힘이 됩니다.
계 5:3-9 “하늘이나 땅이나 땅 아래에서 그 책을 펴거나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4 그 책을 펴거나 읽거나 또는 그것을 볼 만한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기에 내가 심히 울었더니 5 그 장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기를 "울지 말라, 보라, 유다 지파의 사자인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 그 책을 펴고 또 그 책의 일곱 봉인을 떼리라."고 하더라. 7 그가 와서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서 그 책을 취하더라. 8 그가 그 책을 취하니 네 생물과 스물 네 장로가 각자 하프와, 향으로 가득한 금 대접을 가지고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렸으니, 그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 9 그들이 새 노래를 부르며 말하기를 "주께서 그 책을 취하시며 그 봉인들을 열기에 합당하시니이다. 이는 죽임 당하셨던 주께서 하나님께로 각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 우리를 주의 피로 구속하여 10 우리 하나님 앞에 우리를 왕들과 제사장들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 위에서 통치하리이다."라고 하니라.”
욥 11:10 “하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욥 12:14 “그가 헐으신 즉 다시 세울 수 없고 사람을 가두신즉 놓아주지 못하느니라.”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3) 책망이 없는 칭찬과 권면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니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주시는 말씀을 자세히 보면 책망할 것이 없는 칭찬만 나와 있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본문 8절에 나와 있는 “열린 문”이라는 단어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계 3:7) 열린 문(an open door)은 무엇을 뜻합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없느니라.”(요 14: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7, 9)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마음대로 “나 좀 들여보내 달라.”고 요청할 수 없습니다. 내 편에서 노력한다고 열리는 문이 아닙니다. 문을 열고 닫는 분은 예수님이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열린 문을 두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천국의 문이며 열쇠를 가지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구원의 유일한 문이십니다. 오직 예수님! 종교통합주의나 사이비이단들은 예수님의 자리를 도적질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을 주실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마태복음 7장 13-14절에도 보면 두 개의 문이 동시에 나와 있습니다. 좁은 문과 넓은 문입니다. 하나는 좁고 협착하지만 생명으로 인도하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말입니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I have set before thee an open door, and no man can shut it."(계 3:8) 여기에서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먼저 시제입니다. 열린 문을 “두었다”(have set) 현재 완료형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 완료형은 과거에 시작하여 현재도 진행형이며 미래에도 계속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구원의 문은 과거로부터 죽 우리들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의 문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열려진 문”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사람이 닫거나 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어주신 문을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모든 이에게 이미 열려져 있는 가능성입니다. 구원은 그 열려진 문에 대하여 우리의 응답을 요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구원의 문에 대하여 어떤 인간도 열거나 닫을 권세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하여 응답할 뿐입니다. 우리가 흔히 환경과 기회를 탓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들에게 주어진 기회의 문을 좋은 환경 가운데서 지킨 것 같지 않습니다. 본문 8절에서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열린 문, 가능성의 문에서 이들은 하나님 앞에 옳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쩌면 좁은 문을 향해 늘 선택의 삶을 살았습니다.
작은 능력(a little strength)을 가진다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규모도 크지 않고 화려한 신앙생활도 아니고 평범하고 순수했습니다. 주님께 겸손하고 온유했으며 초심이 변하지 않고 꾸준했습니다.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했습니다. 핍박하는 자를 누를 만한 능력이나 힘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두꺼운 외투를 벗겨내게 하는 것은 겨울의 찬바람이 아닙니다. 봄날의 햇살입니다. 큰소리친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온화한 인품과 사랑의 말 한마디가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우리가 흔히 착각하는 것은 “큰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를 섬겨야 하고 화려한 경력과 학력을 추구하고 내가 할 수 있다는 자만에 빠져 있다면 “작은 능력”과는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사역할 때의 초심인 "작은 믿음" 끝까지 지킬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크게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요즘 우리들에게 만연한 큰 병이 있습니다. "큰" "많은" "좀 더 빠르게" 하는 번영신학(prosperity life)이 문제입니다.
작은 능력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하는 종들을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십니다. 조금도 조급해 하지 맙시다. 있는 환경과 처지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런 믿음을 가졌기에 책망 없는 칭찬만 듣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작은 것으로 최선을 다 한 교회!" 영향력은 "작은 것"에서 나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이상의 것을 생각하며 서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작은 것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십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Small is Beautiful"이란 말이 있습니다. 소위 메타 경제학을 대표하는 명제인데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Ernst Friedrich "Fritz" Schumacher, 1911~1977)가 1973년에 발표한 저서의 이름(부제: ‘인간 중심의 경제를 위하여’)입니다. 그 내용은 근대 산업과 경제학, 물질주의 철학에 대한 비판을 넘어 환경주의 혹은 생태주의입니다. 거시적 경제학에서 작고도 충실한 메타 경제학의 원론입니다. 오늘날 현대 산업문명 사회는 끊임없이 성장해야만 하며, 오직 수치에 의해서만 정당화되는 성공, 환경에 대한 무지, 세계화 나 경쟁력이 높은 시장경제 등을 넘어 작지만 알차고 진실하고 실력 있는 경제학에 눈을 뜨게 한 책입니다. 교회도 성장위주의 형태보다는 초대교회처럼 복음을 중심으로 오직 예수님만 믿고 인내하며 사랑의 결실을 이루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메타 교회(Meta Church)입니다. 작은 능력으로 믿음을 지키고 인내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메타(μετά)라는 말은 헬라어로 ‘변화, ~뒤, 그 다음, 넘어서, 와 함께’이란 뜻인데 영어의 접두사로 ‘다른 개념으로부터의 추상화를 가리키며 후자를 완성하거나 추가하는 데’에 쓰입니다. 인식론에서 접두사 meta는 "~에 대해서"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이를테면 메타데이터는 데이터에 대한 데이터입니다. 메타메모리는 심리학에서 무언가를 회고할 때 이를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아니하는 데 대한 개인의 지식을 뜻합니다. 메타윤리학, 메타존재론, 메타언어, 메타이론, 메타수학, 메타논리학, 메타지식, 메타감정 등 다양하게 학문에서도 쓰입니다.
교회성장 컨설턴트인 칼 조지(Carl F. George)는 그의 책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교회Prepare Your Church for the Future> (1991년)에서 미래의 교회는 메타교회(Meta Church)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메타교회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대처하는 제도와 조직과 의식을 가진 교회를 말합니다. 변화는 변질과는 다른 의미인 것입니다. 변질이 시대의 변화의 대처하지 못하고 도태된 교회에 대한 표현이라면 메타교회는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를, 모든 일에는 사랑’을 추구하며 시대의 변화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면서 교회의 본질을 사수해 가는 교회의 형태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 기독교인의 가치체계, 구원의 진리 등의 본질을 추구하는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의 규모에 관계없이 질(Quality)을 추구하고 프로그램보다는 성령의 역사를 구하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의 원리와 본질에 충실하는 교회, 보다 성경적이면서 새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새로운 시대, 새사역를 위한 바른 교회의 모델이 메타교회입니다.
미네소타에 있는 에덴프레이 우데일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라이스 앤더슨목사는 그의 저서 ’21세기를 위한 교회'(A Church For the 21th Century)에서 21세기교회는 전통을 거부하며 모든 가치를 해체하기를 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즉 상대주의로 인한 패러다임의 전환, 초자연주의를 추구하는 세대의 등장, 인구폭발시대 등의 시대의 변화를 맞이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과거에는 희생이 가치였으나 오늘날은 자기만족이 일보다는 여가를, 돈보다는 시간을, 공동체의 정체성 보다는 개인주의를 선호하는 시대로 가치관이 변화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회의적 사고방식, 정치적 문제에 무관심, 영상추구, 높은 교육열, 초자연주의적 영상을 추구하는 1977년에서 1994년 사이에 태어난 다리세대(Bridge Generation)의 등장을 통해서 세대교체를 예고했습니다. 만일 교회가 변화를 준비하지 않으면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가 고령화될 수 있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최근 제 친구 목사님 은퇴 예배시 설교자께서 이 말씀을 전하시면서 한 민중 교회에서 36년간 목회하시면서 예수님처럼 진실된 사랑과 말씀으로 목양하신 것을 마무리 하는 것을 빌라델비아 교회의 모습에 비교하셨습니다. 그리 큰 교회도 아니고 목회 성공했다고 말을 듣지 않더라도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그저 주님을 닮아가며 사랑을 실천하고 인권을 존중하며 소박한 작은 능력을 주님께서는 인정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조용하게 겸허하게 주님을 섬기다 보면 많은 영적인 도전을 받습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재미있습니다. 교회가 가난하고 핍박받았을 때 오히려 순수하게 부흥하였고, 부유해지면서 타락하고 신앙이 희미해지는 걸 발견할 수 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울 때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매달리다가 좀 산다 싶으면 놀러갈 거나 생각하고 신앙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모습을 수없이 봅니다. 가난이 불편한 거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이상하게도 가난하고 불안하고 힘들 때 사람들은 신을 찾게 되고 복음이 전파되는 모습을 봅니다. 오히려 부유하고 평안할 때 교회가 타락되어 가기 쉽습니다.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계 3:9)
자신이 받은 작은 능력이라도 감사하며 기쁨으로 교회를 섬길 때 주님께서 큰 능력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책망 받은 일이 없고 칭찬을 받습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영어로 “인내의 말씀”이 the word of my patience 즉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과거에도 지켰고 지금도 지키며 앞으로도 지킬 믿음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목회가 어렵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고, 교회가 속히 성장하지 않는다고 힘 빠지지 말고, 사탄의 회당이라 하는 사이비이단의 세력에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성경공부하고,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봉사하고 섬기는 교회를 주님께서 칭찬하십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은 참고 이기는 것입니다. 칭찬받는 교회는 인내의 공동체입니다. 분열하는 공동체에는 참지 못하고 주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고 행동이 앞서면 실수가 나고 불협화음이 지속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열린 문이십니다. 모든 문제를 주님께만 가져오면 해결해 주시고, 막힐 것을 뚫어주시며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의롭게 인내하며 지키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힘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앞서서 본을 보이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쓰십니다. 우리 교회도 타의 본(모범)이 되십시다. 우리가 주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슨 능력이나 권세를 가지고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힘으로 진실하게 섬기는 것입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계 3:11)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작은 믿음과 능력을 가지고 믿음을 지킨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의 때는 이기는 것보다 "견디는 믿음"이 더욱 중요합니다. 베드로전서 5:8에 보면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때로 악의 세력이 우리를 덮는 것 같습니다. 그런 때는 묵묵히 견디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견디는 것이 하찮아 보여도 견디는 자들을 통하여 믿음과 하나님의 축복이 증명됩니다. 내 능력에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의지하며 묵묵히 동행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4)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칭찬과 함께 축복의 약속을 하셨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의 위에 기록하리라.” (계 3:12). 끝까지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성전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AD 70년에 예루살렘의 성전은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기 하나님의 성전은 하늘의 성전을 의미합니다. 하늘의 성전이란 하늘에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영원한 천국을 의미합니다. 그곳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는 약속은 지진에 시달려야 했던 빌라델비아 교인들에게는 남다르게 의미 있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진으로 빌라델비아에 다른 모든 건물들이 다 무너진 가운데 사도요한 기념 교회만이 아직도 거대한 기둥 세 개가 남아있어 성경의 기록을 회상케 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은 지진의 공포 속에서 살던 그들은 빈번히 도시를 떠나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가야 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결국 이기는 자에게 주님께서는 결코 나가지도 않고 성전의 기둥과 같이 견고한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겠다고 ‘성전의 기둥’, ‘나가지 않음’이란 은유를 통해 약속해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고대 세계에서 어떤 사람이 왕이 되거나 왕국의 최고 통치권자가 된다면 그가 시도했던 첫 번째 일은 그의 이름이 새겨진 주화를 발행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주화는 왕권의 상징이었고, 거기 새겨진 이름은 소유권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저들을 소유하시고 손에 쥐고 계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특별히 새 예루살렘의 이름을 기록하겠다고 하셨으니 영원한 하늘의 집을 보장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은 자, 그분만이 나의 기쁨이요 행복이요 길입니다. 그분을 붙잡고 사는 자에게 흔들리지 않는 집, 닫히지 않는 열린 문, 견고한 기둥, 하늘의 집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예수로 사는 자를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벧후 1:10-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5)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계 3:13)
고난 중에도 변함없이 주 예수를 붙잡고 인내하며 견고하게 버티어 이런 열린 문을 통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한 기둥의 하늘의 영원한 집에 넉넉히 들어가시는 저와 여러분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책망 듣지 않고 칭찬만 받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비록 작은 능력이지만 작은 일에 충성하게 하시고 초심을 잃지 않고 신앙의 본질에 충실한 메타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오직 예수님 믿음으로 끝까지 충성하여 성전의 기둥이 되게 하시고 그 위에 새예루살렘 이름과 더불어 저의 이름도 새겨지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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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1장을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금주기도제목: (1) 원호의 계절에 샘솟는 말씀으로 매일 24시간을 주님과 동행하게 하소서!
(2) 영생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예수님을 닮아 믿음, 소망, 사랑이 풍성하게 하소서!
6월10일(월) 찬송 9장(통 53장) 314장(통 511장) 창39장 (요셉의 종살이, 옥살이)
11일(화) 찬송 9장(통 53장) 314장(통 511장) 40장 (왕의 술 맡은 관원장)
12일(수) 찬송 15장(통55장) 317장(통 353장) 41장 (바로의 꿈과 해몽)
13일(목) 찬송 15장(통55장<span lang="EN-US" 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