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30-33
복음전파의 긴박성
여섯 번째 나팔까지 울렸고 이제 마지막 7번째 나팔이 울릴 때가 되었다. 인간의 욕심은 스스로 화를 자처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이 보기에 좋도록 행하는 것의 결말에 대해 깨닫지도 못하고 그래서 회개하지 못한다.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세상은 복음을 들을 때 비로소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줄 알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계10:5) 내가 본 바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손을 들고
(계10: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계10:7)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1) 복음의 비밀은 이미 밝혀졌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펴 놓인 한권의 작은 책을 들고 있는 천사는 하늘과 땅과 바다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맹세한다. 이는 천사 자신이 한 말은 확실한 것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보여주는 행위이다.
(2) “지체하지 아니하리니”의 정확한 번역은 “시간이 더 이상 없으리니”이다. 여기에 사용된 시간은 ‘크로노스’로 흘러가는 시간이다. 1:3에서 “때가 가까움이라”고 할 때의 ‘때’는 ‘카이로스’로 어느 특정한 때이다. 하나님 심판의 때가 이미 이르렀다는 선포다. 언제 임했는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심판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곧 말세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10:6에서 ‘시간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은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로 주어진다. 이는 전도서 12:1-2의 경고를 듣는 것과 같다.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여기에서 청년의 때란 살아있을 때이다. 곧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경고의 메시지다.
구약의 묵시록인 다니엘 12:7에서는 이렇게 선언한다.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쪽에 있는 자가 자기의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원히 살아계시는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반드시 한 때 두 때 반 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지기까지이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한 때와 두 때 반 때를 지나야 이 모든 일이 끝나리라고 다니엘이 선언한 그 때들이 이제 다 지나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시간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더 이상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긴박성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 요한계시록 10장의 선포다.
(3) 이미 여섯 나팔들의 경고가 지나갔다. 이제 7번째 나팔이 불게 될 것이다. 7번째 나팔이 불면 모든 것은 끝난다. 일곱째 천사가 소리를 내는 날(들) 곧 7번째 나팔이 불면 7대접 사건들이 펼쳐진다. “날”은 단수가 아닌 복수 “날들”이다. 일곱 대접들이 쏟아진다. 대접사건이란 모든 것은 끝났음을 의미한다. 인간이 죽으면 천국 아니면 지옥이다. 죽음 이후에는 구원받을 기회가 없다. 그래서 살아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7번째 나팔이 불면 선지자들이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지리라고 선언한다. 이는 종말론적 선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원의 복음의 문이 언제 종결되는가? 예수님의 재림이다. 이는 공개된 비밀이다. 인생이 죽음으로 종결되는 것처럼, 복음의 문은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닫힐 것이다. 이는 7번째 나팔이 부는 날 이루어질 것이기에 7번째 나팔이 불면 더 이상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교회가 복음을 전해야 할 긴박성임과 동시에 심판을 면하고 구원받을 기회의 긴박성이다.
달고도 쓴 책
(계10:8)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하기로
(계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계10: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계10: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1) 펴 놓인 한권의 작은 책 곧 구원의 복음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을 갖다가 먹으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이 장면은 에스겔 2:8-3:3에서 등장한다. “너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듣고 그 패역한 족속 같이 패역하지 말고 네 입을 벌리고 내가 네게 주는 것을 먹으라 하시기로, 내가 보니 보라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보라 그 안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시편 119:103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예수님을 믿고 창조주 하나님을 만난다는 사건은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사건이다. 이는 영생의 사건이다. 이러한 복음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꿀과 같이 달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자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한복음 6:53)고 말씀하신다.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라고 명하신다. 그러시면서 떡을 떼어서 먹게 하시고 잔을 나누어 마시게 하셨다. 이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에의 동참이다. 좀 어렵게 이야기 하면 예수님과의 연합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으셨을 때 나도 십자가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된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나님께 산 자가 되었을 때 나도 하나님께 대하여 부활한 자가 된다. 예수님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며 예수님의 승리가 나의 승리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믿을 때 영생을 얻게 된다. 이러하니 복음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알게 되니 어찌 입안의 꿀처럼 달지 않겠는가?
(2) 그러나 배로 들어가니 쓰다고 말한다. 초대 교회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가져야 하는 모든 것을, 자신이 누려 왔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심지어 생명까지도 버려야 했다. 왜 그러했는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어진 영생은 이 세상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영생의 복음은 달꼼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대가를 이 세상에서는 혹독하게 치루어야 했다. 지금은 초대 교회가 받았던 핍박은 아니더래도 여전히 예수님을 믿음으로 버려야 할 것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디모데후서 3:1은 마지막의 때 종말 곧 예수님 재림의 때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이 얼마나 어려를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들)에 고통하는 <어려울> 때가 이르러” 왜 어려운가? 디모데후서 3:12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거룩하게, 구별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 (손해 희생)를 받으리라.” 예수님을 바로 믿고자 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18:8)고 말씀 하셨을까? 영생의 복음은 입에서는 달꼼 하지만 예수님을 믿음으로 버려야 하고 당해야 할 것들을 소화해야 하는 배는 쓸 수밖에 없다.
(3)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다는 나의 기쁨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이 동시에 주어진다. 교회가 가져야 하는 사명이다. 예언해야 한다는 것은 복음을 전달해야 한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예언이란 장차 있어야 할일을 미리 알려준다는 것이 아니라 ‘전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다.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곧 모든 민족과 국가 어떤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서 있는 자나 없는 자, 높은 자나 낮은 자 누구에게나 복음은 전달되어야 한다. 이러한 복음 전달의 사명이 믿는 모든 자에게 주어진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31
두 증인의 사역
인간의 끝없는 욕심은 땅과 바다 그리고 강과 하늘을 오염시키고 파괴한다. 욕심은 화를 불러일으키고 나라 간의 욕심이 충돌할 때 전쟁이 일어난다. 특히 전쟁으로 인해 주어지는 참화는 너무나 끔직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회개하지 않는다. 인간은 복음을 들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여기에 교회의 사명이 있다. 펴 놓인 한권의 작은 책 곧 복음의 말씀이 주어지고 사도 요한에게 갖다 먹으라고 하고 성전을 측량하라고 한다. 그리고 두 증인이 등장해서 예언한다.
성전을 측량하라
[계11:1-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 성전 바깥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1) 지팡이 같은 갈대란 물건이나 건물을 측량하는 도구로 길고 곧은 막대기다. 세 가지가 측량된다.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자들이다. 성전은 크게 성소와 뜰로 나누인다. 성소 안에는 말씀을 상징하는 떡단이 있고 이 떡단을 비취는 등대가 있다. 그리고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 앞에는 기도를 상징하는 향단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성전이란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성소 안에 있는 내용물들을 측량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성전이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며 또한 구원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다. 결국 구원받은 자들을 측량하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성전이란 건물이 아닌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여기에서 말하는 성전은 건물이 아닌 그 안에서 영과 진리로 경배하는 자들이다.
특별히 성전 안에 있는 제단이 측량된다. 제단이란 향단을 말한다. 제단이라는 말이 요한계시록에 8번 등장하는데 모두가 다 기도하는 금 향단이다. 성도의 기도가 측량되고 있다. 예배하는 자들이 측량되고 그들의 기도가 측량되고 있다. 이는 보호되고 지킴을 받는다는 의미다.
(2) 그런데 성전 뜰은 측량하지 말라고 한다. 성전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이 있다. 번제단은 범죄한 자가 용서함을 받기 위해 사람을 대신하여 짐승을 죽임을 당해 드려지는 곳이다. 그리고 물두멍은 정결하게 하는 물이다. 성전 뜰은 측량하지 말라는 말은 성전 뜰에 있는 번제단과 물두멍은 더 이상 측량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더 이상 제사예배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대속의 죽음으로 성전 뜰의 번제단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성도는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은 이를 흰 옷을 입은 자로 말하는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옷이라고 말한다.
예루살렘 성전은 제사예배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러한 예루살렘 성전은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다. 이는 제사예배가 끝났음을 선언하는 사건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이 사는 곳에 회당을 지었다. 그리고 말씀을 묵상하는 예배가 있었다.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지역이 아니라 유대인이 사는 곳 어디에라도 회당은 있었다. 회당에 해당하는 곳을 기독교는 교회라고 부른다. 구원받은 성도가 있는 곳은 어디이라도 교회가 있다. 교회는 제사예배가 드려지는 곳이 아니다. 말씀예배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회당과 교회의 차이가 있다면 회당은 유대인들을 위한 곳이라면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이 예배하는 곳이다. 그리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가진 곳이 교회다.
성전 뜰은 이제 이방인의 뜰이 되었다. 여전히 제사예배를 드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행위이다.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에 의해 42개월을 짓밟히게 된다. 예루살렘은 제사예배가 드려지는 곳이다. 요한계시록 11장에는 같은 날수를 42개월과 1260일 그리고 3일 반으로 달리 표현하고 있다. 42개월로 표현된 것은 이방인에게 주어진 날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사이의 날들이다. 이 날들은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전하시기 시작하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의 날 수 곧 공생애의 날 수이다. 복음사역이 이루어졌던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은 그대로 교회의 사역 기간으로 상징되고 있다. 이 기간이 이방인들에게 적용될 때는 42달로 상징화 된다.
두 증인의 등장
(계11: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그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계11:4)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계11:5) 만일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서 그들의 원수를 삼켜 버릴 것이요 누구든지 그들을 해하고자 하면 반드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계11:6) 그들이 권능을 가지고 하늘을 닫아 그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가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능을 가지고 물을 피로 변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치리로다.
(1) 히브리 글자에서 두 번째 글자가 “베트”다 이는 집을 의미한다. 집은 두 기둥에 의해 견고하게 서 있게 된다. 그렇게 2라는 수는 협력의 수이다. 인간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그것도 전혀 다른 성질의 둘이 서로 도우면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유대인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다가 바사 왕국의 때에 예루살렘으로 성전을 재건한다는 명목으로 귀환하게 된다. 이때 정치적 지도자인 스룹바벨과 종교지도자인 여호수아가 함께 힘을 모아 협력하여 성전을 재건하게 된다.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도록 파송하실 때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 더 나아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에베소서 4:16)고 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님의 증인된 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사도행전 1:8은 교회의 사명에 대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두 증인이란 곧 교회를 의미한다.
(2) 두 증인의 일은 예언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예언이란 ‘전달’의 의미를 가진다.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달하는 일 곧 복음을 세상에 선포해야 할 사명이 교회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굵은 베옷 더 정확히 말하면 거친 베옷이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입었던 복장이다. 더 나아가 회개를 촉구하는 모습의 옷이다. 교회는 회개의 복음을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두 증인은 감람나무와 촛대로 표현된다. 촛대는 어둠을 비취는 빛 이다. 그리고 감람나무는 촛대가 빛을 발할 수 있도록 하는 감람유를 만들어 내는 나무다. 이렇게 교회는 세상의 어둠을 밝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도록 빛을 비추는 사명이 있다. 곧 복음전파의 사명이다.
(3) 예언의 기간은 1260일이다. 성전 뜰이 이방인에게 맡겨진 42달과 같은 기간이다. 교회가 복을 전해야 할 기간은 매일 매일 해야 할 사명이다.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을 전하고 그 사명을 마치기까지의 전 기간을 말한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핍박을 받게 될 것이다. 핍박을 받는다는 의미로는 3년 반으로 표현한다. 정리하면 이방인의 기간은 달 수 42개월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기간은 날 수로 1260일로, 핍박을 받는 기간은 년 수로 3년 반으로 표현한다. 이 핍박의 년 수가 부활의 의미를 가질 때는 3일 반으로 표현한다.
(4) 두 증인에게는 권세가 주어진다. 3절에서의 권세는 예언하는 일로 원문에는 권세라는 말이 없다. 6절에 등장하는 권세라는 말의 의미는 3가지의 의미를 가진다. 자유와 특권 그리고 능력이다. 자유롭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 특권은 복음을 선포할 특권이다. 이런 의미에서 3절에서 예언 곧 복음을 전하는 일은 두 증인 곧 교회에게 주어진 특권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특권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에게 천국열쇠가 맡겨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복음 16:19) 이는 복음을 받아들이면 천국이 주어질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천국 문은 닫힌다는 의미로 복음을 전하는 자는 감히 이 말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불이 된다. 불은 태워 공력을 그대로 드러나게 한다. 복음은 죄인됨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며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구원을 선언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죄 가운데 계속 지옥에 던져진 상태로 있음을 선언할 특권이 있다. 불로 태워 소멸됨은 엘리야가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않게 하고, 모세가 물을 피로 만든 일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이 둘의 공통점은 갈증을 풀어주는 물이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에게는 영원히 사는 생명의 삶이 없고 대신 영원한 타는 불의 지옥이 있음을 선언할 특권이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입술에 있다. 요한계시록은 목마른 자에게 와서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초정하고 있다. 교회는 값없이 주어지는 생명수에로 사람들을 초청하는 일을 특권으로 가지고 있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32
두 증인의 죽음과 부활
예수님의 재림은 도적같이 오리라고 성경은 밝히고 있다. 아무도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짐을 예측해 볼 수는 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마태복음 24:32-33) 예수님의 재림을 예측해 볼 수 있는 징조에 대해 마태복음 24:14은 이렇게 밝힌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리고 또 하나의 징조가 있다. 그것이 교회의 죽음이다.
교회의 죽음
(계11:7)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계11:8)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계11:9)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보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계11:10)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 두 증인이 증언을 마치자 죽음을 당한다는 선언은 마태복음 24:14의 선언과 같다. 사도행전 1:8은 교회는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고 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는 의미가 짙게 배어있다면,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이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선포되어 지는 지역적 의미가 배어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이나 사도행전이나 분명한 것은 복음의 마지막은 유대인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이슬람교 지역을 향한 복음의 불길이다. 이 지역은 초대교회의 상황과 같다. 이슬람권 다음이 이스라엘이다. 곧 복음이 시작된 예루살렘이 복음전파의 마지막 지역이 될 것이다.
(2)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무저갱에서 올라 온 짐승과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교회는 패배한다. 곧 교회의 죽음이다. ‘무저갱’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이 계시록 9장 5번째 나팔사건이다. 황충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 그리고 계시록 20장 천년왕국을 이야기 하면서 무저갱이 등장한다.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 옛 뱀인 용이 무저갱에 결박당한다. 그러나 천년이 차매 사탄이 무저갱 옥에서 놓임을 당한다. 무저갱에서 풀려난 사탄 또는 마귀에게 미혹당한 자들과의 전쟁을 계시록 16장에서는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한다. 아마겟돈 전쟁은 ‘입’의 전쟁이다. 언어전쟁 곧 사상 전쟁이다. 계시록 6장 첫 번째 인 사건에서 보면 화살을 가진 흰 말을 탄자가 이기고 또 이길려고 한다. 믿는 자라도 넘어뜨리려고 하는 미혹의 사건이다. 복음이 처음 세상에 선포되었을 때는 핍박과 순교를 당하면서도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물리적인 핍박이 멈추고 자유롭게 복음이 전하여지는 시대가 오면서 교회는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하고 세상의 사상이 언어의 물결을 타고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타락시키기 시작한다.
(3) 두 증인이 죽자 시체를 큰 성 길에 있게 한다. 이곳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다. 곧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을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한다. 타락한 교회의 모습이다. 소돔은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였다. 윤리의 붕괴다. 현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교인들을 책망할 수 없다는데 있다. 애굽은 정치적인 국가다. 언제나 주변 국가에 힘 우위의 패권을 추구하던 나라였다. 교회가 세상의 경쟁을 끌어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도 세상의 모습을 본다. 믿음이 돈으로 평가되는 교회의 모습을 본다. 교회와 세상의 구별을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신앙의 삶은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삶의 현장에서는 세상의 방식을 따라가는 것이 현재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앞으로는 더 심각해 질 것이다.
(4) 시체를 삼일 반 동안 무덤에 장사지내지 못하게 한다. 세상은 두 증인의 시체를 보며 기뻐하며 심지어 예물을 보내기까지 한다. 어둠은 빛에 의해 쫓겨난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싫어한다. 마태복음 5장에 있는대로 교회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세상이 영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부패하는 것을 막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세상의 어둠이 교회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교회의 세속화다. 세상과 다른 바 없는 교회가 된 것이다. 교회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교회는 한 사람이라도 끌어들이는 프로그램이 다양화 되었다. 세상의 마켓팅이 교회에 도입된 것이다. 그리고 점차 감정화 된다. 교회는 더 이상 영적 윤리적 기반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문제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성적 문제가 사회의 이슈화된 문제 속에 교회가 있다. 세상에서 수군거림의 대상의 주된 고객은 교회다. 목사가 더 이상 거룩해 보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고 장로는 있는 자들의 표상이 되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가장 욕심이 많은 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기 시작했고 더 그러할 것이다. 그렇게 교회는 죽어간다.
(5) 그런데도 아직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는 이유는? 아직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교회가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두 증인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조는 보인다. 예루살렘이 복음을 받아들일 어느 정도의 준비는 되어 있으나 여전히 아직이다. 로마서 11:26에서 언급된대로 이스라엘도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며 받아들일 때가 가까워지고 있음은 사실이다. 땅 끝까지의 복음전파 그리고 교회의 죽음 예수님 재림의 징조들이다.
교회의 부활
(계11:11)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계11:12)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계11:13) 그 때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 삼일 반 후에 두 증인이 부활한다. 이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나는 일이다. 3일 반이란 이방인에게 성전 뜰이 짓밟히게 된 42달이나 두 증인이 복음을 전하는 1260일과 같은 날 수의 상징으로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교회 시대를 말한다. 3년 반으로 표기 될 때는 교회가 핍박받는 수의 상징이다. 그런데 부활을 그리고 있는 이곳에서는 3일 반이다.
(2) 하나님의 생기가 두 증인 속에 들어간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와 같은 그림이다. 사람이 죽으면 영과 육의 분리가 일어난다. 육은 음부에 들어가고 영은 하늘로 간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 때 육은 다시 부활하여 영과 다시 결합된다. 온전한 사람이 된다. 이를 신학적으로는 영화롭게 된다고 한다.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갔다함은 영이 다시 육과 결합하여 살아있는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으로 곧 영화로운 몸으로 하늘로 올라간다. 영원한 생명이 선언되는 순간이다.
(3) 교회 곧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육이 부활 영과 재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그 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를 지켜보며 놀라고 두려워한다. 계시록 1:7의 실현이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이 의존했던 땅을 도구로 심판하신다. 지진이 일어난다. 민수기 16장에 보면 아론의 대제사장직에 도전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 일을 주도했던 자가 아론과 같은 제사장 지파 곧 레위지파에 속한 자 고라였다. 이 일로 인해 고라에 속한 모든 것과 사람들은 지진으로 인해 죽게 된다. 이같은 일이 예수님의 재림때 하나님의 심판으로 땅에 속한 자들에게 일어난다. 이는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한 자들이며 그래서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받아들이지 못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로 말미암아 도시 10분의 일이 무너진다. 인간의 나약함이다. 세상은 인간은 완전하다는 신면을 가지고 인간의 위대함을 부르짖었다. 과학의 진보와 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듯했다. 하나님은 이를 비웃으신다. 10분의 1일 무너져 내린 것이다. 그리고 지진으로 이해 죽음 자가 7,000명이다. 7이란 완전수에 무한한 수 1000가 곱해져 7,000명이다. 인간의 온전함이 완전히 자신들의 기반이 되는 땅에 의해 무너지는 순간이다. 이들은 마침내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며 심판하시는 자이심을 목격하고 있다. 이 모습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구원의 문이 닫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