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 샘(48): "대언자 예수님과 새 계명” (요한일서 2장, 1부)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장로교회/신학교)
제목: 생명 샘(48): "대언자 예수님과 새 계명” (요한일서 2장, 1부)
본문: 요일 2:1~17
요절: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분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 2:5)
주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주님을 사랑하며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
교독문: 115(구주강림1), 예배의 부름: 사 60:1~3
찬송: 96장(통 94장), 84장(통 96장)
일자: 2019년 12월 1일 주일 (대강절 첫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장로교회/신학교)
오늘은 대강절(Advent) 첫째 주일로 교회 달력(Calendar)이 시작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을 축하하며 성탄절을 준비하는 네 번의 주일들을 말하며 “오심 coming”이란 뜻인 라틴어 Adventus(영어, Advent=대강절, 대림절, 강림절)이라 부릅니다. 교회와 각 가정, 직장, 사업터에서 성탄절 장식을 해서 내년 1월 6일(주현절, 동방박사가 경배한 날)까지 성탄을 축하합니다.
강림절 기간에 첫 주일에는 희망(Hope)의 촛불(보라색)을 켜며 제2의 세례[침례]요한이 되어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둘째 주는 평화(Peace)의 촛불(연보라색)을 켜며 회개하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고, 셋째 주일은 기쁨(Joy)의 촛불(분홍색)을 켜며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넷째 주일은 사랑(Love)의 촛불(흰색), 그리고 성탄절 이브/성탄절에는 그리스도의 촛불(가운데 흰색)을 켜면서 대속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초의 색깔이 차츰 밝은 색으로 바뀌는 것은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심을 상징합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중간사이(interim)에 살고 있어 이 대강절을 주님의 재림(다시 오심, Second Coming=Parousia)을 기다리며 신랑 예수님을 기다리는 신부 교회로서 단장하고 준비하는 기간으로 삼습니다.
오늘은 공동서신 중 요한일서 2장의 전반부(요일 2:1~17)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일 2장의 전체 주제는 “형제 사랑은 빛 가운데 사는 생활”입니다. 요한의 서신들은 Truth(진리)=Light(빛)+Love(사랑)+Life(생명)입니다.
1) 대언자 되는 예수님(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씀은 여러분들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은 본 서신에서 그가 편지를 쓰는 교인들을 ‘어린 자녀들아(little children)’라고 자주 부르며(2:12, 28; 3:7; 4:4; 5:21) 1절에서도 ‘나의 어린 자녀들아’라고 친근히 부릅니다. 그의 어투를 보면 그는 나이가 많이 든 사도로 나이 어린 교인들에 대한 사랑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본 서신에서 교인들을 ‘사랑하는 자들아(Beloved ᾿Αγαπητοί)’라고도 여러 번 부릅니다(요일 3:2, 4:1, 7, 11). 또한 본 서신의 목적을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신 중요한 목적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게 하려 합니다. 죄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을 막는 것이 하나님의 주된 관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후에도 때때로 넘어지고 범죄하므로,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즉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대언자(an advocate παράκλητος)이십니다. 여기서 대언자란 명사인 헬라어 파라크레토스는 ‘보혜사’ 혹은 ‘변호자’라는 뜻입니다. 우리 성도가 죄를 범했더라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예수님의 변호를 통하여 속죄가 가능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는 죄 문제에 있어서 대속 사역으로 우리의 무궁한 변호자가 되십니다.
2) 화목 제물(요일 2: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화목제물’이라는 원어(힐라스모스 ἱλασμός)인데 우리의 죄들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제거시키는 제물(the propitiation)이라는 뜻입니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 a propitiation)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막 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a ransom)로 주려 함이니라”예수님께서 성도들을 위하여 계속 변호하시는 것은 그분의 십자가 대속 사역에 근거한 것입니다.
3) 진리 안에 사는 자는 계명을 지킨다(요일 2:3~4)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분을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분을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진리 안에 사는 사람은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하며, 진리 안에 삽니다 (1:3~4).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14:21~25, 요일 4:19~20, 5:2~3).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계명들을 지키면 주를 아는 자임이 증거 된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계명들은 구약성경이며 그 요약은 십계명이고 그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敬天愛人).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 곧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자가 하나님을 아는 자요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입니다.
4) 말씀을 지킨다면 말씀대로 행해야 한다(요일 2:5~6)
5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그분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분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5절에서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우리 속에 온전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계명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쉐마인 신명기 6:4-5,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과거에 세상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육신적 쾌락을 사랑했던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고 변화를 받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을 지킬 때 성취됩니다(요 14:21, 23).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주님 안에 있음이 증거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과의 영적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주님의 생각과 능력을 공급받는 것이며 주님의 특권을 함께 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포도나무 비유에서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5장). 그러나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하고 버림을 받고 불태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 안에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행하시는 대로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행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형제 사랑과 빛 가운데 거함(요일 2:7-11)
7 사랑하는 형제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처음부터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3절에서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말하였는데, 7절에서는 사도가 말한 계명이 어떤 새 계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처음부터 가졌던 옛 계명, 즉 그들이 처음부터 들었던 말씀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의미할 것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새 계명은 분명히 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언적으로 남겨두신 계명, 즉 “서로 사랑하라 ἀγαπᾶτε ἀλλήλους”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 13:1에 보면, 주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친히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죽으심으로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쓰기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십니다(엡 5:25).
8절에서 새 계명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행하고 있었습니다. 행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물질적 유무상통으로 드러난 서로 사랑함은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어두움에 속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때에 무지와 죄악이 우리를 지배하였습니다. 그러나 참 빛이 우리에게 비추어 왔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지식과 의가 우리에게 찾아 왔습니다. 엡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분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이렇게 구원받은 증거가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9절 ‘그 형제를 미워한다’는 말은 형제를 계속 미워하는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거짓된 구원과 헛된 확신을 조심해야 합니다. 비록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을 안다, 구원을 받았다, 빛 가운데 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할지라도, 만일 그가 자기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입니다. 그가 받았다는 구원은 거짓된 구원이요 그의 확신은 헛된 확신입니다. 그는 구원받은 표를 가지고 있지 않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고백과 구원의 확신은 형제를 사랑하는 그의 삶을 통해 확증되어야 합니다.
10절에 형제 사랑은 빛의 증거요 구원의 증거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들어왔고 구원을 받았다는 증거를 가진 자입니다. 그는 자기 속에 걸림돌 혹은 걸려 넘어질 원인이 없습니다. ‘거리낌’이라는 원어(스칸달론 σκάνδαλον)는 ‘걸림돌, 걸려 넘어질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빛은 우리의 길을 밝게 비춥니다. 빛 가운데 사는 자는 자신의 행위의 잘못을 밝히 봅니다.
11절에,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있고 어두움 가운데 행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어두운 밤에 산속을 헤맨다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과 같이,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갈 곳’이라는 원어(푸 휘파게이 ποῦ ὑπάγει)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라는 뜻입니다. 그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즉 무지와 죄악들 가운데 사는 자들이 갈 곳은 오직 한 곳, 지옥뿐입니다. 그의 눈이 멀었기 때문에 그는 그가 지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2)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2-17)
12 어린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었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young men),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받을 교인들을 어린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로 구별하여 언급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연령을 따라 구별한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신앙적 상태를 따라 구별한 것 같습니다.
첫째로, 어린 자녀들 혹은 아이들(little children)은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교인들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요한은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었고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자들이라고 묘사합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기본적 상태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의 보혈(寶血)로 죄 씻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떤 자선행위나 행함이나 약식 세례 의식을 통해서나 가톨릭 신부(神父)에게 하는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통해서나 마리아를 통해서 죄 씻음 받은 것이 아니고, 오직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죄 씻음을 받았습니다.
찬송 257장(통 189장)에서
(1)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후)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2)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속죄함 받은 것 아니오
거룩한 하나님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3) 나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앞에 옳다함 얻음은
확실히 믿기는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4) 거룩한 천국에 올라간 후에도 넘치는 은혜의 찬송을
기쁘게 부름은 어린양 예수의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성도는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입니다.
둘째로, 아비들(fathers)은 믿은 지 오래된 자들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연령도 많은 자들입니다. 참된 신앙은 태초부터 계신 하나님, 곧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입니다.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입니다(요 17:3). 신앙생활은 그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며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을 섬기며 그분의 뜻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도의 신앙생활의 여정은 바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그를 점점 더 아는 과정입니다.
셋째로, 청년들(young men)은 믿음이 강하여 주님을 위하여 일할 만한 자들을 가리킨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악한 자들인 사탄과 악령들과 그의 종들을 이겼습니다. 청년들이 그들을 이긴 방법은 그들이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속에 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에게 강해지라고 교훈합니다. 고전 16:13,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 엡 6:10-11,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악한 계획을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하나님의 말씀은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는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검입니다(엡 6:17).
15절에서 우리는 왜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말은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20: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들 가운데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마 22:37-38; 신 6:4-5). 또 그는 우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마 6:24).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만 전심전력하여 사랑하려면 우리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마 6:24, 왕상 18:21). 하나님께서 주신 집이나 돈이나 직장은 우리가 감사하게 사용하기는 하지만, 거기에 애착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남편, 아내, 자녀들도,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교훈 안에서 그들을 사랑할 뿐이지 그 이상은 아니어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과감하게 하나님께 바쳤습니다(창 22:9~10).
16절에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께 대한 사랑이 우리 속에 없는 이유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육신의 정욕(the lust of the flesh)과 안목의 정욕(the lust of the eyes)과 이생의 자랑(the pride of life)에 속하는 것들이며, 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육신의 정욕 즉 음란한 욕망으로 더러워져 있고, 안목의 정욕 즉 눈으로 보는 육신적 아름다움의 추구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육신적 아름다움은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이 못됩니다. 그래서 잠언에는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고 하십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생의 자랑 즉 명예나 권세 등 이 세상의 자랑거리들을 추구하는 것으로 더러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천국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헛되고 죄악된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거나 그것들을 추구하며 살 수 없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니 참으로 세상의 것들은 지나가고 맙니다. 또 이 세상과 함께 우리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다 지나가고 맙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헛됨을 반복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전 1:2, “전도자가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Vanity of vanities, saith the Preacher, vanity of vanities; all is vanity.” 헛되다(vanity)가 다섯 번 나옵니다. 전도서 전체에서 ‘헛되다’는 말(헤벨 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