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3): “고난 받으신 예수님” (벧전 3장)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신학교/장로교회)

by wgma posted Jan 1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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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소망(3): “고난 받으신 예수님” (벧전 3장)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신학교/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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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 소망(3): “고난 받으신 예수님” (벧전 3장)
본문: 벧전 3:1~22
요절: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벧전 3:18)
주제: 새해에는 고난 받으신 예수님처럼 선을 위하여 고난을 감수하자.
교독문: 123(주현절 3), 예배의 부름: 119:71-72
찬송: 325장(통 359장), 461장(통 519장)
일자: 2020년 1월 19일 주일 (주현절 셋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신학교/장로교회)
 
오늘은 베드로전서 3장을 묵상합니다. 1장에서 산 소망되시는 예수님, 2장에서 보배롭고 산돌이신 예수님을 묵상했는데 오늘은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님을 본받아 선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자라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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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道)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 여러분의 화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7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1절의 ‘순복하라’는 원어(휘포탓소메나이 ὑποτασσόμεναι)는 ‘순종하라,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고 말했고(엡 5:22-23), 또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고 합니다(골 3:18).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아내들의 의무입니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순종해야 할 중요한 한 목적은 복음을 순종치 않는 자, 즉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말로가 아니고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2절 말로 구원하기 힘든 남편들이 그의 행위로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말로 안 되면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을 구원시킬 아내의 행위는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말합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남편을 두려워함을 다 포함하는 것 같습니다. ‘정결한’이라는 원어(하그노스 ἁγóς)는 ‘순결한, 거룩한’이라는 뜻입니다. 아내들은 특히 음란한 세상 속에서 단정하고 순결하며 거룩해야 합니다.
 
3절에서 여성들은 머리를 꾸미고 금은보석의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를 차고 값비싼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 같은 외적인 화장에만 치중하지 말고 마음의 내적 단장에도 신경 써야 합니다. ‘머리를 꾸민다’는 엠플로케스 트리콘 ἐμπλοκῆς τριχῶν=plaiting the hair)는 ‘땋은 머리’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머리단장을 머리털은 깨끗하고 단정한 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또 금은보석과 아름다운 옷도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것들로 단장하는 것이 좋습니다. 단지, 성도들은 외적인 단장(outward adorning)을 크게 여기거나 거기에만 마음을 쓰지 말고 4절에 내면적 치장에도 신경 써야 합니다. ‘마음의 숨은 사람’은 사람의 내면적 인격성을 가리킵니다. 여성도의 내면적 인격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되어야 합니다. ‘안정’ 이라는 원어(헤쉬키오스 ἡσυχίος)는 ‘조용한’ 이라는 뜻입니다. 여성도들은 특히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합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면적 단장, 곧 고상한 인격성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여성들의 화장을 논하면서 가장 자연스럽게 했는지 아니 했는지 모르게 하나 마음을 관리하며 개조하는 하는 삶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인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고 이런 덕으로 자신들을 단장하였던 것입니다.
6절에 그 대표적 예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창 18:12에 보면, 그는 속으로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의 남편에 대한 그의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오늘날도 여성도들은 사라처럼 선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7절에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지식은 결혼에 대한 지식을 가리킬 것입니다. 결혼은 남녀가 결합하여 한 몸과 한 인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입니다. 결혼의 목적은 첫째, 남자가 외롭지 않도록 돕는 아내가 함께 살게 하기 위함이며(창 2:18), 둘째, 자녀 출산을 위함이며(창 1:27-28), 셋째, 음행 방지를 위함입니다(고전 7:2). 결혼에 있어서 남편의 의무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남편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주심같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엡 5:25).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로 첫째, 아내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며, 둘째, 그들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아내를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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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친절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여러분이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분의 귀는 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님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8-9절에서 몇가지 당부하고 있는데
첫째로, 우리가 다 마음 즉 생각을 같이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원어(호모프로네스 ὁμόφρονες “one mind”)는 ‘생각을 같이하여’라는 뜻입니다. 교회의 단합은 생각의 일치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롬 12:16, “서로 생각을 같이하며.” 고전 1:10, “같은 생각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빌 2:2, “생각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생각을 품어.” 생각이 같아야 말과 행동도 같아질 수 있습니다. 분열은 생각의 다름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각이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서로 동정하라고 합니다. ‘동정하다’는 원어(쉼파데이스 συμπαθεῖς “having compassion one of another”)는 ‘같은 감정을 가지다, 동정심(同情心)을 가지다’라는 뜻입니다. 같은 감정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이 같은 것이 좋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공동체가 중요합니다.
셋째로, 그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라고 합니다(필라델포이 φιλάδελφοι, “love as brethren”). 예수님께서는 친히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는다”고 합니다(고전 13:4-7).
넷째로, 우리가 남을 불쌍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다’는 원어(유스플랑크노스 εὔσπλαγχνος “be pitiful”)는 ‘인정을 가지다, 불쌍히 여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의 부족과 연약을 볼 때 멸시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도 이런 마음을 가질 것을 교훈합니다. 엡 4:32, “너희는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다섯째로, 우리가 친절하라고 말합니다. ‘친절하라’는 본문(필로프로네스 φιλόφρονες “be courteous”)은 안디옥 학파 전통사본(Byz)에는 겸손함 보다는 친절함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겸손하며 친절해야 합니다.
여섯째로, 우리가 남에게 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9절에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주 예수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고 말씀하셨고(마 5:39) 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고 하십니다(마 5:44 전통사본). 바울도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교훈합니다(롬 12:17). 우리는 하나님의 복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 복이란 죄 사함과 구원의 복, 평안의 복, 또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의 복입니다.
 
10-12절에서 성도는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고 천국의 좋은 날들 보기를 원합니. 죽음은 죄 때문에 왔고 그것은 슬프고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 사함과 영생을 주셨고 천국의 복된 날들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일을 확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은혜를 받고 이런 놀라운 약속의 세계를 바랄진대, 거기에 합당한 자들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우선, 10절에 우리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11절에 성도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은 남에게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또 성도는 서로 간의 화평을 구해야 합니다. 성도는 악과 거짓을 버리고 선과 화평을 구해야 합니다.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하리라.”
12절에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과 돌보심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그가 연약할 때 격려하시고, 낙심할 때 위로하시고, 위험할 때 지키시고 도우시며, 범죄할 때 근심하시고 책망하시는 그의 관심과 돌보심입니다. 또 주님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십니다. 의인이 감사할 때나 회개할 때나 무엇을 간구할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와 간구를 잘 들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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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또 여러분들이 선을 본받는 자라면 누가 여러분들을 해하겠는가? 14 그러나 의 때문에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여러분들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여러분들 마음에 하나님을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여러분들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들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이 여러분들이 악을 행한다고 비난하는 일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13-14절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선을 본받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선하게 살면, 양심이 있는 자들은 그런 우리를 잘 해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 때문에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의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습니다(마 5:10).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근심하고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15절에 우리는 마음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거룩하게 모셔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절대주권자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기 때문에, 악한 자들의 위협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로 통치하시고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자에게 대답할 바를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밝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습니다. 천국 소망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간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연약성과 죄성을 가진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항상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16-17절에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냅니다. 마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우리가 악한 것과 거짓과 음란한 일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위는 악하고 거짓되고 음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거룩하고 선한 일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는 거룩하고 선한 말과 행위를 가질 것입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릇된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끝까지 선하게 말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했던 그들의 악한 비난이 거짓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낫습니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고난이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대언자, 제사장, 사도들, 이 말씀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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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성령님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그분께서 또한 성령님으로 감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었느니라. 20 그들은 예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여러분들을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22 그분은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분께 순복하느니라.”
 
18-22절은 복음의 핵심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대속의 죽으심, 부활, 승천을 간략하게 요약합니다. 18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음을 증거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한 번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습니다. ‘한 번’이라는 원어(하팍스 ἅπαξ)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번에(once)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음을 나타냅니다(히 7:27; 9:12, 26, 28; 10:10, 12, 14). 그분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화목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습니다.
 
19절에 ‘감옥에 있는 영들’은 다음절에 말씀한 대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당한 자들의 영들입니다. 19절은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 하나인데, 예수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왜 저 영들에게 가셨고 또 무엇을 전파하셨는가?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구약 성도들이 거하고 있던 ‘림보’(‘지옥의 변두리’라는 뜻)에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이끌어 천국에 들여보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죽은 악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눅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 나타난 교훈에 배치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너와 우리 사이에 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 여기서 너희들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눅 16:26). 루터교회는 19절을 예수님께서 부활 직전 혹은 직후에 지옥의 영들에게 가셔서 승리의 영광을 선포하셨음을 뜻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 전에 지옥에서 승리적 행진을 하신다는 것은 적당한 생각이 아닐 것이고, 부활 후에 가셨다면 영으로 가셨다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다른 이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의 승리의 선포 사건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바빙크, 크레다너스). 그러나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정통적 성경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옥에 있는 저 영들에게 옛날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20절에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음란하고 강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 동안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의 8식구들 외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다가 마침내 멸망할 자들은 수가 많으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다가 영생에 이를 자들은 수가 적다고 말씀하십니다(마 7:13-14).
21절에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의 물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침례[세례]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침례[세례]는 죄 씻음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물로 받는 침례[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침례[세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침례[세례]받은 자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접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22절에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증거합니다. 고난의 주님께서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천국에 올리우셨고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은 성경 여러 곳에서 증거합니다. 막 16:19, “주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행 1:9,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의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그분을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롬 8:34, “그분은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또한 모든 선한 천사들은 그분에게 순복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심과 부활하심, 그리고 승천, 재림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여 구원받은 성도들이 많아지는데 선교와 전도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말 설날에도 복음으로 덕담을 많이 나누시고 오직 산 소망이신 예수님만 바라봅시다.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 주현절 셋째 주일을 주셔서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 만 바라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낙심되고 어렵고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믿음의 창시자시며 완성하시는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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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금주기도제목:
(1) 새해에 산 소망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매일 매순간 동행하게 하소서!
(2) 영생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예수님을 닮아 믿음, 소망, 사랑의 향기를 날리게 하소서!
1월20일(월) 찬송 191장(통 427장), 299장(통 418장) 수 14장 (땅 분배)
21일(화) 191장(통 427장), 299장(통 418장) 15장 (유다의 땅)
22일(수) 219장(통 279장), 304장(통 404장) 16장 (요셉의 땅)
23일(목) 219장(통 279장), 304장(통 404장) 17장 (므낫세의 땅)
24일(금) 220장(통 278장), 310장 (통 410장) 18장 (나머지 땅)
25일(토) 220장(통 278장), 310장 (통 410장) 19장 (시므온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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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신학교 봄학기 등록 안내
 
샬롬!
겟세마네 신학교
2020년 봄 학기 개강
일시: 2월 10일(월) 10시 (매주 월요일 오전 10시~오후 5시)
장소: 세민교회 (대전광역시 대덕구 우암로 396)
전화: 032-832-0287, 010-9113-1127, 010-4907-7483
 
작년까지 성남 장안중앙교회에서 강의를 했으나 2020년부터 대전 세민교회 3층에 강의실이 마련되어 지속적인 신학 수업이 가능해졌습니다. 동서남북의 중심지인 대전에서 새롭게 시작된 겟세마네 신학교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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