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46-47

by wgma posted Jan 18, 202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46

 

큰 성 바벨론심판 (1)

(요한계시록 18)


 20f4aa8a811ab48ae280dd830340a440.jpg


 


17장의 음녀는 큰 성 바벨론으로 세상을 말한다. 여기에서 세상이란 어떤 곳인가에 대해서는 유다서 1:11에서 밝히고 있듯이 <가인과 발람 그리고 고라의 길>을 따라 행하는 곳이다. <가인의 길>에 대해서는 창세기 4:16-17에 의하면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 에덴의 울타리가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 자신을 지켜 줄 성을 쌓는 길이다. 그렇다면 가인을 지켜줄 성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발람의 길>로 돈으로 쌓는 성이며, 또한 <고라의 길>로 권력으로 쌓아가는 성이다. 그래서 세상을 <큰 성>으로 표현한다.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스스로 주인의 삶을 살기로 결정한 인(간의 길을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에 비유한다. 바벨론의 특장은 크게 3가지다. 교육과 권력 그리고 돈이다. 교육에 대해서는 미혹이란 단어로 요한계시록은 대치하고 있다.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끊임없이 세뇌시키는 미혹이다. 하나님 보시기에의 길을 쫓아가는 유다의 장래의 지도자들을 바벨론의 사고방식을 따라 살아가도록 하는 교육에 능한 곳이 바벨론이었다. 그리고 바벨론의 길은 권력을 지향하는 길이었다. 이러한 길은 왕의 길이었다. 권력은 자신을 지켜주는 큰 성이다. 이러한 권력은 돈이 그 배경이 되는 길임을 보여주는 곳이 바벨론의 길이었다. <교육(미혹) 권력 돈>의 길이 바로 바벨론의 특징이었고 이 바벨론의 길을 따라 행하는 곳이 인간의 나라 세상이다.

 

바벨론심판의 확실성

[18: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2a]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성경에서 <하늘>이란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에 반해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불경건한 곳이다. 이러한 세상에 대해 경고가 주어진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권세를 가지고 외치는데 그 영광으로 인해 땅이 환해 졌다는 것은 하늘로부터의 경고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그 경고의 메시지는 큰 성 바벨론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너졌다>는 부정과거시제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지만 반드시 일어난다는 의미로 고거형으로 표현하고 있다.

 

악령의 활동무대인 세상

[18:2b]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1) 큰 성 바벨론으로 일컬어지는 세상은 악령의 활동무대가 된다. 여기에서 <귀신 demon>이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악령 evil spirit>이다. 이 악령은 <더러운 영>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더러운>이란 깨끗하지 않다는 것인데 <깨끗하다>는 의미는 잘못된 섞임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곧 더럽다는 의미는 불순 것이 섞어있다는 것으로 좋은 것이 악한 것과 섞여 서로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노아시대의 홍수심판은 타협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창세기 6:2을 보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 구절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자기들이 좋아하는>이다. 노아의 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를 버리고 자신이 보기 좋은대로의 삶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이렇게 판결하고 홍수심판을 결정하신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악함을 보시고”(창세기 6:5). 마찬가지로 바벨론으로 묘사되는 세상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 보기 좋은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의 것들이 섞여 있는 더러움으로 보고 있다. 이렇게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더러운 영이 바로 악령이다.

그런데 이 더러운 악령을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로 묘사하고 있다. <가증하다>는 말은 <증오하다>는 의미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왜 악령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깨끗하지 못하고 증오할 수밖에 없는 새로 묘사하고 있는가? 마태복음 24:28을 보자.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시체는 부정한 것이다. 새는 죽은 것과 연관되어 있다. 영어의 demon이란 단어는 de(무엇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mon(경고)가 결합된 단어다. 결국 demon은 인간을 악으로 인도하는 영이다. 죽음으로 끌고가는 존재다. <사탄>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항하도록 미혹해서 하늘법정에 고소하는 자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마귀>로서 인간을 결국 파괴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사탄이면서 마귀의 하수인으로서의 <악령>은 인간을 죽음 곧 지옥으로 인도하는 영이다. 어떻게? 그것이 더러운 길을 인간으로 하여금 걷게 하며 결국 하나님으로 하여금 증오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2) 아주 흥미로운 단어가 이곳에 등장한다. <처소 또는 장소()>라는 단어다. 이 단어를 정확하게 번역하면 <감옥>이다. 이 단어는 베드로전서 3:19에 등장하는 단어다. “(예수)가 또한 영으로 가서 <>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시니라.” 하나님께 불순종한 인간의 삶을 감옥 안에서의 삶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 자유롭게 스스로 보기 좋은대로 살기를 원했으나, 악령들에 의해 참 자유를 잃어버리고 더럽고 가증한 삶의 감옥에 갇혀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삶에 에베소서 2:2-3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결국 인간은 죄와 허물로 이미 죽은 자의 삶을 살고 있단 것이다. 이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로 감옥에서의 삶으로 인간의 삶을 규정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2:9에 보면 인간을 미혹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여 인간이 스스로 주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 결국 인간을 지옥으로 인도하고자 하여 땅으로 내려가는 용과 그의 하수인 악령들을 본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땅은 용과 악령들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그래서 12:12에서는 땅과 바다는 화가 있다고 말한다.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3)물론 땅 역시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역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땅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땅의 것들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욕심을 따라 땅의 것들을 소유함으로 인간의 욕심을 채우려고 했다. 그렇게 땅은 인간으로 인해 망가지기 시작했다. 인간은 하늘에의 소망을 버리고 땅의 것으로 자신을 지키고자 했다. 가인이 땅의 것으로 성을 쌓아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그 길을 인간들은 따라 행한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삶은 기반이 없이 바다의 요동함에 흔들리는 물 위에 있는 존재들로 요한계시록은 표현한다.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가 앉아 있는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창세기 3장에 등장하는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땅과 뱀이 저주받았다고 선언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땅을 배로 기는 뱀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자들 하나님께로의 소망을 버리고 오직 땅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자들은 저주의 심판이 있음을 경고 하고 있는 것이다. “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창세기 3:14) 이렇게 땅은 악령들의 활동무대가 되고 인간은 저주받은 땅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의 삶 곧 옥에 갇힌 삶을 살고 있음을 요한계시록은 경고하고 있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47

 

큰 성 바벨론심판 (2)

(요한계시록 18)

 

인간이 삶의 주인으로 살기로 선언한 인간, 그러나 실제 드러난 삶의 현실은 사탄의 무리들인 악령들의 미혹에 놀아난 삶이었다고 요한계시록은 보여준다. 인간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밑도 없는 웅덩이 곧 무저갱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렇게 인간세상은 죽음으로 끌고 가는 악령의 처소가 되었다. 인간세상은 악령이 만든 감옥이 되어버린 것이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형수가 있는 감옥 안의 삶을 살고 있는 곳이 인간세상이다. 곧 음녀의 세상 바벨론이다.

 

큰 성 바벨론의 실상

[18: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의 이야기는 삶의 주인으로 살기로 선언한 인간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을 죽이는 생존경쟁의 치열한 삶이다. 생존경쟁의 치열한 삶은 가인의 성으로 묘사된다. 창세기 4:16에 보면 가인이 여호와를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간이 의존해야 할 창조주 하나님을 가인은 떠난 것이다.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가인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곳으로 떠난 것이다. 마치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한 탕자의 비유에 등장한 둘째 아들과 같다. 탕자는 아버지가 더 이상 간섭할 수 없는 먼 나라로 가버린 것과 같이 가인이 그러했다. 하나님이란 울타리를 떠난 가인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성을 쌓기 시작했다(창세기 4:17). 여기에서 <성을 쌓았다>는 미완료형이다. <성을 계속해서 쌓아가고 있었다>이다. 가인의 성은 인간들이 각자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멈출 수없는 성을 쌓고 있는 인간의 삶을 보여준다.

가인의 뜻은 <소유> 또는 <획득>이다. 에덴의 울타리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인간은 땅의 것들을 소유 또는 획득함으로 자신을 지키는 성을 쌓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바벨론을 <큰 성>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유다. 바벨론으로 칭해지는 인간세상은 음녀로도 불린다. 결국 바벨은 자신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무너질 것을 예고한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을 버리고 땅의 것들을 소유함으로 자신을 지키는 성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고 피조물인 땅의 것들에게 소망과 믿음을 보인 인간의 삶을 영적 음행으로 보고 있다.

인간이 소유하고자 한 내용은 <>이고 <상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왕은 권력을 지향하고 상인은 돈을 추구한다. 이것이 바벨론의 세계이다. 인간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며 함께 살아가도록 창조되었다. 여기에 인간세상의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각자가 우리 공동체 안에서 주인이 되고자 한다. 마침내 우리 공공체에서 가장 힘있는 자가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된다. 우리 공동체는 부족이 되고 도시가 되고 국가로 발전한다. 창세기 10장에 등장하고 있는 니므롯은 최초의 도시국가의 건설자가 된다. 국가의 결정은 그 국가에 속한 모든 자들에게 모든 분야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곧 그 국가에 속한 자에게 구속력을 가진다는 의미다. 이렇게 국가는 합당하게 부여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우리 공동체에서 합당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한 투쟁을 벌인다. 인간세상은 이렇게 권력에 아부한다. 그런데 상인계급이 등장하고 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하면서 돈이 권력이 되기 시작한다. 물론 돈은 타락한 인간에게 자신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유효했지만 인간 각자의 주권을 국가의 주권으로 여기는 민주주의 국가는 돈이 권력이 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재물과 하나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돈이 권력이 되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다. 인간세상 바벨론은 권력에 취하고 돈에 취한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바벨론은 받게 될 것이다.

 

바벨론에서 나오라

[18: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5]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에게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소리를 듣는다. 이 내용은 예레미야 51:6에서 이미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벨론 가운데서 도망하여 나와서 각기 생명을 구원하고 그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끊어짐을 보지 말지어다.” 그런데 실제로는 바벨론이라는 인간세상에 교회가 있고 그 세상 안에 성도가 살아간다. 그렇다면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이야기는 어떤 의미인가? 바벨론이 범하는 죄에 참여하지 말라고 친절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정확한 번역은 <죄들>이다. 이 죄들의 내용은 <불의>로 나타난다. 불의란 하나님께 대항하여 잘못 행하고 있는 것들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권력에 취하고 돈에 취해 행한 것들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행위가 아니라 인간들이 보기에 좋은 것으로 짝한 모든 행위들이다. 이러한 죄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한 것으로 하나님은 이를 기억하신다고 경고한다. 그 결과는 재앙이다.

재앙하면 유대인들에게 연상되는 장면은 애굽에게 내려진 열가지 재앙이다. 이 재앙의 끝은 죽음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하여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향하여 가도록 하셨다. 영적으로 애굽은 죄악의 장소이다. 거기다가 애굽은 단순히 죄악의 도성이 아니라 국가라는 제도 아래에서 하나님께 반하는 죄들이 저질러지는 곳이다. 계시록에 따르면 큰 성 바벨론이다.

그렇다면 왜 떠나야 하는가?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믿음의 조상을 인간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명령은 떠나 가라는 것이다. 창세기 12:1이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떠나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보여줄 땅으로 가기 위해서다. 아무리 떠나고 싶어도 가야할 곳을 모르면 떠날 수가 없다. 왜 바벨론에서 나와야 하는가?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세상에 대치된다. 인간세상은 인간이 보기에 좋도록 살아가는 세상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살아가는 사람들 곧 성도다.

성도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17:14에서 잘 정리해주고 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성도란 예수님과 함께 있는 자들로 (1)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 (2)세상에서 빼내심을 받은 곧 택하심을 받은 자로 (3)예수님께 믿음을 보이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심판

[18:6]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두 배를) 갑절을 갚아 주고 그가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7]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왕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함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8]그러므로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라.

 

(1) 강하신 심판주 하나님 : 강하다는 것은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다. 인간세상 바벨론은 행한대로 갚음을 당할 것이다. 인간세상 바벨론은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망하기 전까지 깨닫지 못한다. 돈의 권력에 취한 자들은 그들의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자부하지만 하루 동안에 망한다. 재앙의 내용은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이 순식간에 무너지듯이 666의 바벨탑이 하루만에 애통으로 변한다. 인간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대부분의 경우다 먹지 못해서 죽는 것과 같은 재앙의 현실이 인간세상 바벨론에 임한다. 인간세상은 과학의 놀라운 성과로 신의 문을 인간이 열고 닫고자 하는 바벨의 정점에서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이다. 이들은 불로 심판받게 될 것인데, 이는 인간세상이 불로 태워지면 지푸라기가 타면 아무 것도 남지않고 오직 재만 남는 것과 같을 것이다.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심판주되신 하나님은 강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힘은 인간이 이루어 놓은 바벨을 제압하기에 충분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모든 유를 무로 만들 힘을 가졌다.

(2) 요한계시록 18:9-19은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내용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 심판의 대상자는 왕과 상고와 무역상이다. 인간은 삶의 주인이라는 어리석은 미혹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돈은 인간을 결코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될 것이다.

(3) 20절은 바벨론 세상이 망함으로 기뻐하는 성도들을 그리고 있다. 승리에의 환호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은 교회의 승리다. 21-23절에서는 큰 성 바벨론이 다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더 이상 빛이 비취지 않는다. 21:1에서의 광경을 본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보이는 것은 24절에서 밝힌 대로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및 땅 위에서 죽임을 당한 모든 자의 피.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성도들만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



8e807b19234993332e7eb907c345f2f8.png




Articles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T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