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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5 08:24
산 소망(6):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자” (벧후 1장)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신학교)
산 소망(6):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자”
(벧후 1장)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신학교)
제목: 산 소망(6):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자” (벧후 1장)
본문: 벧후 1:1~21
요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 1:4)
주제: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자
교독문: 60(시 139편), 예배의 부름: 롬 12:14-18
찬송: 490장(통 542장), 492장(통 544장)
일자: 2020년 2월 9일 주일 (주현절 후 여섯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신학교)
베드로후서 1장을 묵상합니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배로운 약속 가운데 신앙의 성숙과 성장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들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분의 신성한 권능(the divine power)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영광과 덕(virtue)으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알 수 있느니라. 4 이로써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여러분들이 정욕을 통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고, 하나님의 성품(the divine nature)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시몬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라고 부르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며 그분에게 절대 복종하는 자임을 고백한 것이며, ‘사도’라는 말은 예수님께 사명을 받아 복음을 위해 파송된 자임을 뜻합니다. ‘우리의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란 신적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대속(代贖)의 의(義)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율법의 의를 이루셨고 우리의 의가 되셨습니다(고전 1:30).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본 서신을 받는 성도들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도들의 믿음은 ‘보배로운’ 믿음인데, 세상의 금은보화로는 천국과 영생을 얻을 수 없으나 참된 믿음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막 16:16; 요 3:16). 성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매우 값진 보배입니다.
2절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안부합니다. 예수님을 “앎으로” 즉 하나님에 대한 지식(神知識)을 말합니다(벧후 1:6; 3:16). 우리가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아는 것이 명철이며(잠 9:10)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십니다(요 17: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지식이 더할수록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도 더욱 많아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서로 사랑합시다. 받은 은혜와 평화를 이웃에게 나눠줍시다.
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한 권능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권능의 일입니다.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혼들을 다시 살게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신성한 권능으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에게 참된 생명 곧 무궁한 생명을 주셨고 또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참된 경건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시작되며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요 1:14) 또 ‘덕으로 to virtue’라는 말은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 곧 그의 긍휼과 사랑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앎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4절에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exceeding great and precious promises)입니다. ‘이로써 whereby’라는 말은 앞 절에 말한 ‘영광과 덕으로’라는 말을 가리키는데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은 바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내용, 즉 영생과 천국과 부활의 소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원어(데이아 퓌세오스 θείας φύσεως “the divine nature”) ‘신적인 성품’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그 성품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려함’에서 동사는 코이노노이(κοινωνοι)는 교제, 친교라는 단어인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와 같은 어원으로 “하나님의 성품”이란 하나님의 닮은 기질을 가져야 우리는 하나님과 친교를 나누며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자의 성품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한 상태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구원받기 전의 상태와 매우 대조됩니다. 범죄하기 전의 사람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거룩하고 의로운 성품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사람들은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구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은 사람의 본성이 회복되어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입니다. 4절은 첫째로, 구원 내용 즉 영원한 생명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들입니다. 그것은 영광의 부활과 천국에서의 복된 삶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금은보화로 살 수 없는 보화입니다. 둘째로, 구원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하나님인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죄악된 옛 생활 방식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 바라며 성경말씀과 성령의 인도로 거룩하고 선한 삶을 힘써야 합니다.
5 이 외에 여러분들이 모든 열심을 내어 여러분들의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5절에 모든 열심을 내어 여덟 가지의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해야 합니다. 믿음부터 시작하여 사랑까지 한 옥타브(여덟 성품)을 이루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점검하며 모든 열심을 다하여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믿음(faith, 피스티스πίστις)입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마 16:16)의 신앙고백이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모퉁이 돌”(the head stone of the corner)이십니다. 이스라엘의 건물구조는 모퉁이 돌 위에 기둥과 벽이 놓여있어서 이것을 빼면 집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구원의 모퉁이 돌(시 118:22, 마 21:42, 막 12:10-11, 눅 20:17, 행 4:11, 엡 2:20-22, 벧전 2;4-8)이십니다. 아멘(Amen אָמֵן)이란 히브리어의 뜻은 ‘굳게 서다’ ‘동의하다’는 말인데(사 7:9) 하나님 위에 굳게 서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믿음(미 6:8)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믿고 무궁한 생명(the everlasting life)을 얻는 것입니다(요 6:40, 20:31).
둘째는 덕(virtue, moral excellence, goodness, 아라테 ἀρετή)입니다. 덕(德)은 선한 성품을 가리킵니다. 한문의 뜻은 “열 네 가지의 심성을 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 즉 열넷의 감정 조절을 한마음으로 조화를 이루는 마음이란 뜻입니다. 참된 믿음에는 선한 성품이 필요합니다. 그 믿음 위에 덕을 쌓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으로 선한 성품의 인격으로 거듭나야 하나님과 소통이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 위에 선한 인품, 즉 덕스러운 인품을 갖추도록 힘써야 합니다. 건물을 세우고 집을 세우는 것을 덕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덕을 세우는 말을 하며 덕을 세우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셋째는 지식(knowledge, understanding, consideration, 그노시스γνῶσις)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덕뿐 아니라, 지식도 필요합니다. 그 지식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며, 구원의 디자인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19).
넷째는 절제(temperance, self-control, 엥크라테이아 ἐγκράτεια)입니다. 절제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인데, 매사 절제가 필요합니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중 가장 마지막이 절제입니다. 아무리 다른 열매가 풍성해도 절제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탐내지 말라(covet not)는 것인데 모든 죄악은 탐심에서 비롯됩니다. 절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이를 절제하지 못하면 사고를 치거나 병이 나거나 정상에서 벗어납니다. 그래서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합니다(covetousness, which is idolatry, 골 3:5). 나쁜 일에도 절제가 필요하지만 좋은 일에도 절제가 꼭 필요합니다. 봉사와 신앙생활에도 절제하지 아니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공부도 절제가 필요하며 취미생활도, 전공분야에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전도서는 사람이 먹고 마시며 심령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하였고(2:24; 3:13; 5:18; 8:15) 또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사는 것도 복이라고 말합니다(9:9). 그러나 우리는 비록 죄 되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너무 육신적 즐거움에 빠지지 않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고전 6:13, “식물은 배를 위하고 배는 식물을 위하나 하나님이 이것저것 다 폐하시리라.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우리는 지식이나 육신의 즐거움에 있어서 절제의 생활을 힘써야 한다.
다섯째는 인내(忍耐 patience, perseverance, endurance, 휘포모네 ὑπομονή) 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겪는 여러 가지 고난 중에서 오래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세에 대환난의 시대에 믿음과 인내를 가져야 합니다(마 24: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계 13:10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사랑은 인내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 7). 소망도 인내입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인내는 체험(experience)을, 체험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3-4)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때에도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바로 처벌하시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철이 들 때까지 기다려 주시고 회개하고 변화 받을 때까지 참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여섯째는 경건(敬虔 godliness, piety, godly life, 유세베이아 εὐσέβεια)입니다. 인내 다음으로 경건의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경건이란 영, 혼, 육의 전 인적인 성숙과 거룩함을 말합니다. 요즘 영성(靈性)이란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는데 이 단어는 가톨릭 용어요 동방정교회에서 주로 쓰는 단어인데 성경에서는 한 마디도 없습니다. 영성하면 육성, 심성을 말해야 하는데 이렇게 나누면 영지주의 이단에 빠집니다. 영지주의에서는 영은 거룩하나 육은 악하고, 영은 구원의 대상이나 악은 죄를 지어도 좋다는 이원론적 논리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마니교(일종의 영지주의)에 빠져 있을 때 육으로는 죄(간음죄, 도둑질, 탐욕)를 짓는 방탕한 생활을 했습니다. 구원파에서 가르치는 구원론이 바로 영지주의 구원을 가르쳐, 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니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도둑질하거나 사기를 쳐도 구원 받는데는 지장이 없다고 가르치며, 간음을 해도, 살인을 해도 구원받는데 지장이 없다고 가르쳐 세월호 사건, 오대양 사건에도 양심의 가책을 가지지 아니합니다. 잘못된 구원관입니다. 전인적인 구원을 받은 우리는 전인적인 경건생활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벧후 3:11-12) 한국교회가 영성이란 말을 사용한 1980년대 중반부터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원파적인 구원관이 전국적으로 퍼졌습니다. 제발 “영성”이란 단어 쓰지 맙시다. 한국교회는 다시 성경적인 경건(piety)로 돌아가야 합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훈은 학문, 경건입니다. 총신대 교훈은 지성, 영성, 인성인데 영성을 경건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경건은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는 전인적 거룩성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딤후 4:5-8) 사이비이단들이 좋아하는 영성을 버리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합시다. 전인적인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일곱 번째는 형제우애(brotherly kindness, 필라델피아φιλαδελφία)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요 13:34-35)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에서 우리가 서로 같은 생각과 같은 감정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고 상대에 대해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친절한 생각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벧전 3:8). 롬 12:19에서,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라”고 합니다. 다른 성품을 다 갖춘다고 해도 형제 우애가 없으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여덟 번 째는 사랑(love, charity, 아가페 ἀγάπη)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형제 우애’라는 말보다 더 강한 뜻을 가집니다. 이것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같은 희생적인 사랑, 친구를 위해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사랑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고 우리에게 용서를 비는 형제의 죄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명하십니다(마 5:44; 18:22).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 10)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세상 끝날까지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만족한즉 여러분들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더욱 힘써 여러분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이는 여러분들이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11 이는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여러분들에게 주실 것임이니라.
8-9절에서 만일 우리에게 위와 같은 성품들이 있으면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지식에 있어서 무기력하거나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겠지만, 이런 성품이 없는 자는 내세와 천국을 바라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고 하나님께서 그의 옛 죄들을 깨끗케 해주셨음을 잊어버린 자와 같습니다.
10절에서 ‘부르심과 택하심’은 우리의 구원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얻은 증거는 우리의 참된 믿음과 회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여덟 가지 하나님의 성품으로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가 더욱 힘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할 이유로 첫째는 우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11절에서 우리가 더욱 힘써 우리의 구원을 굳게 해야 할 두 번째 이유를 나타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같이 행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 즉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2 이러므로 여러분들이 이것을 알고 현재의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여러분들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여러분들을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여러분들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여러분들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분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분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여러분들이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말한 것임이니라.
12-15절에서 우리는 성경 진리들을 이미 알고 있어도 그것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13절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라는 말은 살아 있을 동안을 가리킵니다. ‘장막’은 육체를 가리키는데, 그것은 천막이 영구적인 집이 되지 못하고 이동하는 것이듯이 우리의 육체도 영구적이지 못하고 늙고 쇠하여 마침내 죽을 것이며 땅에 묻혀 썩을 것입니다. 요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주께서는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21:18-19), 베드로는 자신의 장막을 벗어날 것 곧 자신의 죽음이 임박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러기 때문에 더욱 성도들을 교훈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는 베드로의 유언적 내용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죽은 후에도 성도들에게 필요한 때 이 진리가 생각나게 하려고 힘써 교훈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대로 성경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늘 기억하며 충만한 은혜와 유익을 얻어야 할 것이다.
16-18절에서 베드로는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증거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다음 주에 살펴볼 2장에 말한 대로 이단들이 주님을 부인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란 그의 신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또 ‘그의 강림하심’이라는 말은 그가 본래 하늘에 계신 신적 존재이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자’라고 증거하셨습니다(요 3: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과 성육신(成肉身)을 바로 아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고 자신들이 그분의 크신 영광을 친히 본 자라고 증거합니다.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마태복음 17장에 기록된 대로 그와 다른 두 제자들(야고보, 요한)이 주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에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변화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로부터 친히 음성으로 그분에 대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거하신 내용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존귀와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베드로의 첫 번째 증거입니다.
19-21절에서 예수님의 영광에 대한 두 번째 증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더 확실한 예언’ 즉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성경책은 인간의 그 어떠한 증거보다 더 확실한 증거의 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해 성경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성경말씀은 어두운 곳을 비취는 등불과 같다. 어두운 밤에 불빛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불편할 것인가요? 성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이 어둡고 죄악된 세상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구주에 대해 바로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19절에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라는 말은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할 때 바른 깨달음이 생기는 것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와 그 속죄의 복음을 바로 깨달을 때까지 성경책을 가까이 하며 읽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20절에서 성경이 예수님에 대한 중요한 증거이지만 그것을 사사로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주관적인 해석을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건전한 성경 해석의 방법은 우선 문법적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그 다음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면서 해석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성경을 전체적 통일성이 있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을 연구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구하면서 읽고 묵상하고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사사로이 해석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이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예언은 사람의 뜻으로 주어진 적이 없고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 곧 대언자들을 통해 전해진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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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2월10일(월) 찬송 595장(통 372장), 314장(통 511장) 삿 8장 (사사 기드온)
11일(화) 595장(통 372장), 314장(통 469장) 9장 (아비멜렉 비행)
12일(수) 524장(통 313장), 415장(통 471장) 10장 (사사 입다)
13일(목) 524장(통 313장), 415장(통 471장) 11장 (입다의 딸)
14일(금) 394장(통 449장), 411장(통 473장) 12장 (에브라임 사람)
15일(토) 394장(통 449장), 411장(통 473장) 13장 (삼손의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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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무엘~성경해석학, 류재이~<span style="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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