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53-55

by wgma posted Mar 1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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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53

 

새 하늘과 새 땅 (2)

(요한계시록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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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과 새 땅은 새 창조의 세계로 회복된 창조의 세계이다. 창조의 세계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창세기 1)과 관계로 이루어진 창조세계의 질서(창세기 2)이다. 그런데 인간은 스스로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함으로 타락하고(창세기 3) 그 결과 창조세계의 질서가 무너졌다(창세기 4).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기로 하였으나 먼저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 올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다. 기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이다. 예수님의 재림, 인간세상은 불로 심판을 받고 마침내 무너진 창조의 세계가 회복된다. 바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창조의 세계다.

창조의 세계가 하나님의 주권과 질서를 강조하고 있다면, 새 창조의 세계는 창조의 목적과 에덴동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성경의 시작인 창세기 1-2장과 마지막인 21-22장은 서로 보완적 성격을 가지고 믿는 자들이 들어갈 하나님나라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준다.

창세기 2:1-3에서 보여준 창조의 목적은 새 창조의 세계에서는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으로 등장으로 분명히 한다. 창세기 2장에서 등장하고 있는 에덴동산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보여준다면 새 창조의 세계에서는 에덴동산은 어떠한 곳인지를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보여준다. 이제 요한계시록 21:1-8까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서언으로서 말씀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

[21: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1) 하나님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주기도문에 있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광경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과 땅 온 천지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광경이다.

(2) 창세기 2:1-3은 창조세계의 결론이다. 하나님의 안식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창조한 세계에 대하여 만족을 표하시고 안식하신 날이다. 하나님이 안식하는 날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다. 결국 하나님 창조의 결론은 예배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찬양의 소리를 듣는다. 타락한 세상에서도 제사하는 모습을 본다(창세기 4). 홍수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노아가족의 예배를 또한 본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 돌단을 쌓아 예배하는 광경을 읽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야 할 이유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과 성막제도를 준다. 성막제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길과 예배하는 길을 가르쳐 주셨다. 성막은 솔로몬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된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국가의 목적이 된다. 이스라엘 흥망성쇠가 예루살렘 성전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렸다. 솔로몬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은 바벨론에 의해 무너지고, 수룹바벨에 의해 재건된 성전은 헬라인의 손에 의해 무너진다. 그리고 이방인 헤롯에 의해 복원된 성전은 로마인의 손에 의해 파괴되고 지금까지 예루살렘 성전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3)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나 3일만에 다시 세워질 것을 말씀하셨다. 이제는 건물로서의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믿음) 위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질 것이다. 교회의 출발이다. 요한계시록은 교회를 무장시키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 이야기한다. 교회의 사명이 주어지고 교회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등장한다. 이 모습은 21:11-27에서 자세하게 밝혀진다.

(4)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남편을 위해 단장하는 신부의 모습이다. 오직 남편만을 위한 신부다. 요한계시록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세상의 핍박에 대해 인내하며 타협에 대해 순결을 지키는 자로 이야기 한다. 그 신부가 마침내 남편을 위해 단장을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 예배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남편을 위해 단장하는 신부의 모습으로.

 

에덴동산의 모습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1) 에덴동산은 창조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인간의 저주지로 창설한 곳이다. 새 창조의 세계에서는 모든 곳이 다 새 예루살렘이듯이 또한 모든 곳이 다 에덴동산이다. 에덴이란 행복 또는 기쁨을 뜻하고 동산이란 울타리란 의미를 갖는다. 곧 에덴동산이란 기쁨의 울타리다. 창설이란 말은 나무를 심다의 의미다.

(2) 하나님이 에덴의 울타리가 되어 주신다. 하나님이 인간의 행복을 심고 가꾸고 열매맺도록 하여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울타리되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인간 스스로 에덴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하고 하나님을 떠난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이란 울타리 대신 자신을 지킬 성을 쌓는다. 인간은 소유와 성취라는 성쌓기를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으리란 착각을 가지고 행복대신 불행을 경험하며 살다가 마침내 죽음을 맞이한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온전한 울타리가 되시는 에덴동산을 본다. 하나님이 인간이 거주하는 장막이 되어 주신다. 함께 거주하신다는 의미다. 온전한 임마누엘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심고 가꾸어 마침내 행복의 열매를 맺게 하신다. 이러한 에덴동산의 모습은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3) 에덴의 모습이 타락한 인간세상에서의 모습과 대조하여 말해진다. 눈물과 사망 그리고 애통과 애곡 그리고 아픔이 없는 세상 이것이 에덴이다. 애통은 억울함이 배여있는 것이고 애곡은 슬픔에 겨운 것이다. 이러한 5가지 것은 창세기 3장의 심판에 등장하는 삶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고통과 땀이 동반된 수고로운 삶과 그 수고로운 삶의 대가로 이어지는 죽음이 더 이상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 2장의 관계질서가 온전히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새로워진 세계로의 초대

[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는 질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된 세계이다. 여기에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세계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 그리고 온전한 에덴동산인 세계이다. 이러한 새 창조의 세계가 임한다는 것은 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가 마침내 도래할 것이니 기록하라고 말씀하신다. 그 근거는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마치시는 자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1:8)

이 세계는 인간의 노력으로 주어지는 세계가 아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온전한 에덴을 건설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아왔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선언한다. 온전한 에덴은 하나님이 창설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시는 생명수 생물을 마시라는 것이다. 성경의 초대장이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초대장이다. 목마른 인생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이 초대에 응하라. 에덴이 시작된다.

상속으로 받게 된 세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8]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1) 새 하늘과 새 땅의 세계는 이기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속의 개념을 가진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거저 주는 선물로서의 개념이다. 그렇다. 새 창조의 세계 곧 하나님나라와 에덴동산은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하나님과 믿는 자들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을 이기는 자라고 한다. 세상으로부터의 핍박과 타협에서 인내하고 순결을 지킨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진실한 자들이다(17:14). 예수님의 권면에 따라 믿음의 무장을 갖춘 자들이다(2-3). 한마디로 말하면 십자가로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인 자들이다.

(2) 이제 이기지 못한 자들이 열거된다. 8절에 기록된 자들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자들이다. 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움을 당한다.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한다. 첫째 사망은 육신의 죽음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때 육신이 부활하여 영과 재결합하게 되어 마지막 백보좌 심판을 받게 되는데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불못 곧 지옥에 던지우게 되는 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다. 믿는 자는 이 둘째 사망이 없다. 믿는 자는 영원한 지옥이 아닌 영원한 천국 곧 영생의 삶을 살게 된다. 아멘!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54

 

새 예루살렘

(요한계시록 21)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자체가 새 예루살렘이 될 것이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곳이다. 곧 하나님 예배로 충만한 곳이다. 예루살렘 성전 자체가 건물이었듯이 새 예루살렘 역시 건물의 양식을 따라 묘사된다. 벽이 잇고 문이 있고 그 건물의 기초가 있다.

일단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붙어있는 <새롭다>는 의미를 살펴보자. 에베소서 4:22-24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기에서 옛 사람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가는 자이고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라가는 자이다. 이는 타락의 세계와 창조의 세계를 비교해 놓은 것이다. 타락의 세계는 인간이 보기에 좋도록살아가는 세계라면, 창조의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살아가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보기기에 좋은 예배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예배는 로마서 12:1-2에서 밝혀주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드러나는 예배로 무리 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지는 영적 예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어린 양의 신부 새 예루살렘

[21: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 새 예루살렘은 계시록 17장에서 보여주는 음녀 바벨론과 비교되어진다. 음녀 바벨론 곧 타락한 인간 세상은 광야에서 본다. 광야란 땅에서는 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곳이다. 오직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곳이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아무 것도 결실을 맺을 수 없는 광야같은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어리석은 자들의 세계가 음녀 바벨론이다. 이에 반해 새 예루살렘은 크고 높은 산에서 보여지고 있다. 이는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인도하고 있던 모세가 크고 높은 산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음녀 바벨론에는 하나님이 없는 세상이라면,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곳이다.

(2) 새 예루살렘은 인간의 손으로 세우고자 했던 바벨탑이 아니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 바벨탑은 결국 무너졌으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새 예루살렘은 영원하다. 이는 창세기 2장에 등장하는 에덴동산의 모습이다. 에덴동산은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이 거주하는 곳으로 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위해 창설하셨다. 여기에서 <창설>이란 정확한 의미는 <심다>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나무를 심듯이 심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심으시고 가꾸시고 열매를 맺게 하는 곳이다.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한 에덴동산의 결실로 등장하는 곳이다. 그 열매는 인간이 창조된 된 목적인 하나님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결실이 하나님 예배로 나타나는 곳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3) 새 예루살렘은 어린 양의 신부로 등장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관계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특히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로 충만한 곳이 새 예루살렘이다. 이 관계는 어린 양의 신부로 남편에게 순결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다. 남편으로서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신부를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버리면서까지 사랑하면서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은 무엇인가? 교회다. 예수님이 피 흘려 사신 교회이다. 그렇게 새 예루살렘은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곳으로 특별히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속됨을 예배하는 곳이다.

 

새 예루살렘 성 (21:11-21)

 

새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으로 묘사된다. 이는 바벨론을 성이라고 묘사한 것과 같다. <>이란 지켜지는 것이다. 음녀의 성인 바벨론은 결국은 자신을 지켜내지 못한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성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 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성으로 장엄하게 자세하게 펼쳐지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새 예루살렘은 새 창조의 세계에서 인간이 거주하는 성으로 에덴동산 그 자체이다. 에덴동산에서 동산이란 울타리란 의미다. 하나님이 울타리가 되어주신 곳이 바로 에덴동산이다. 그런데 인간은 울타리되신 하나님을 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선언하며 바벨론 성을 쌓아갔으나 결국 하나님 심판의 결국을 보게 된다. 그리고 온전한 에덴동산이 회복된다. 회복된 에덴동산은 새 예루살렘으로 등장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피로 산 교회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만이 들어가는 곳이다.

 

(1) 성의 크기는 정사면 입장체로 되어 있다. 길이와 넓이 그리고 높이가 똑같다. 이는 성막이나 성전에서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곳 지성소의 모습과 닮아 있다. 12,000 스다디온이다. 12지파에 무한대의 수 1,000을 곱한 수이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곧 구속받은 성도의 충만한 수를 감당하는 수치다. 이들이 하나님의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곳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

(2) 새 예루살렘의 벽 또는 성곽은 성 안에 거주하는 자들을 얼마나 견고하게 지켜주는가에 대한 묘사다. 측량하니 144규빗으로 12의 제곱이다. 4장에서는 12+12=24장로로 신구약 성도의 존재의 수로 신구약의 모든 성도를 대표하는 장로로 묘사되고 있다면, 여기에서는 12x12=144로 신구약 충만한 성도를 대표하는 수로 신구약 모든 성도가 울타리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온전히 보호되고 지켜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측량은 천사가 하고 있지만 상상으로만 그려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측량하고 있는 것과 같이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호되고 지켜짐을 확신시켜고 있다.

(3) 벽이란 단지 지켜진다는 의미 외에 밖과 구별시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거룩하지 못한 것과는 구별된다. 이런 면에서 열두 문이 등장한다. 동서남북 세 문씩 열두 문이다. 이는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자리잡고 있는 모습과 닮아 있다. 단순히 문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각 문마다 각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각 문에는 천사가 지키고 있다. 이는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는 그룹이나 언약궤에 있는 속죄소 위의 두 그룹과 같이 심판자의 의미를 가진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자는 반드시 심판 후 들여보내진다. 그 심판은 속죄소 위에서 모든 죄가 덮어지는 은혜가 주어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만이 들어가는 곳이 새 예루살렘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은 성령의 인치심을 받으 자들로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새겨진 자들이다. 곧 구속받은 전 성도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은 결단코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성 밖에 버려질 수 밖에 없으니 곧 지옥에 던져지게 된다. 성곽은 벽옥으로 성 자체는 정금으로 쌓았고 문은 진주로 쌓는데 맑은 유리처럼 투명하다. 결코 흠이 있는 자는 들어올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아 깨끗하게 된 자만이 들어간다. 그래서 27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4) 새 예루살렘은 열두 기초석이 놓였는데 이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 에베소서 2:20을 보자.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곧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위에 세워진다. 마태복음 16:18에 보면 이 신앙고백의 믿음위에 교회를 세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은 온전한 믿음의 신앙고백자가 들어오는 곳이다.

 

새 예루살렘의 빛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다. 이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한 것을 말한다. 그 하나님의 기쁨을 귀한 보석 같은데 너무 맑더라고 한다. 그만큼 하나님의 기쁨이 충만해서 그 기쁨이 새 예루살렘의 빛이 된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는, 새 창조의 세계에는 빛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면 하나님 자신이 빛이 되어 환히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모든 자는 빛 가운데 살게 된다. 어둠이 없고 빛 가운데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는다는 의미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는 의미 속에서는 하나님이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함께하시는 임재를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따로 성전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왜냐면 하나님 자신이 함께 계신 그곳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성도의 삶 자체가 예배가 된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서는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의 존귀함이 된다. 온전한 창세기 2:1-3의 회복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안식이다. 하나님의 만족이다. 그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성도들 역시 영원한 안식에 거한다. 모든 수고로운 짐이 벗어지고 쉼을 얻는 에덴의 행복이 보장된다.



김성철목사의 요한계시록 읽기 55

 

에덴의 회복

(요한계시록 22)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자체가 새 예루살렘이다. 이는 창조의 결론인 하나님의 안식이 온전히 회복된 곳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하늘과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진다. 하나님 예배가 온전히 회복되었다. 창세기 1장의 회복이다.

새 예루살렘은 또한 그 자체가 에덴동산이다. 요한계시록 22:1-5은 창세기 2장의 에덴동산이 완벽하게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창세기 2장의 회복이다. 온전한 행복(에덴)이 충만한 곳이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의 모습이다.

 

생명이 있는 삶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깨끗한)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하나님은 인간의 거주지로 에덴동산을 창설하셨다. 에덴동산의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었다. 그러나 새 에덴동산에는 생명나무만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없다. 왜냐면 새 창조의 세계에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 자만이 들어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는 곳이 바로 새 창조의 세계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섬김이 있는 새 예루살렘이며 인간에게는 영원한 행복이 있는 에덴동산이다.

성경에서 생명이란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생명을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말한다. 영적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생명을 얻었다 함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됨을 의미한다.

 

(1) 창세기 2장에 보면 강이 에덴으로부터 네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흘러간 곳에는 값진 보석으로 가득한 곳이 된다. 에스겔 47장을 보면 물이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와 사해에 도달하고 죽은 물이 되살아나 물고기들이 넘쳐난다. 그렇게 새 창조의 세계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석으로 비유되는 생명이 다시 살아난 자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곧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성전이란 어떤 곳인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인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곳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이다. 그래서 생명수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 생명수는 수정처럼 투명하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숨김이 없다. 투명한 관계 진심이 통하는 생명있는 관계다. 그래서 생명수로 가득 찬 강은 깨끗하다. 새 창조 세계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이상 흠이 없다.

 

(2) 생명수가 흐르는 강 자체가 길이다. 본문의 정확한 번역은 그 길 가운데와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다. 생명나무로 넘쳐나는 곳이 새 창조의 세계다. 하나님과의 생명있는 관계가 풍성하다는 이야기다. 그 풍성함은 12달 동안 열매가 맺힌다. 그리고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한다고 한다. 오해하지 말자. 새 창조의 세계에도 질병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곳에는 더 이상 병이 없다. 그럼 무슨 말인가? 새 창조의 세계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상 무라는 이야기다. 이제 다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될 일은 없다는 행복한 에덴의 이야기다.

 

에덴의 삶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새 창조의 세계에는 생명이 넘쳐나고 에덴 곧 행복과 기쁨이 넘쳐나는 삶이 있다. 에덴의 삶을 3가지로 이야기 한다.

 

(1) 다시 저주가 없는 삶이다. 타락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창세기 3:14-19에 주어졌다. 고통과 땀이 동반된 수고로운 삶을 살다가 죽음으로 마쳐야 하는 인생여정이 심판으로 주어졌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어야 할 땅이 저주를 받았다. 하늘이 아닌 땅을 목적을 삼고 사는 인생은 저주가 있을 것이란 심판의 소리를 인생은 들어야 했다. 이러한 인생의 삶에 대하여 전도서는 해 아래 곧 하나님 없는 인생은 헛된 것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이 없는 타락한 인간의 삶 자체가 저주 아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인생이란 무엇인지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 자들의 결론은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고통이 없는 낙원(에덴)을 인간은 꿈꾸어 왔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 세상은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에덴의 꿈을 버렸다. 함께 할 에덴은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3장에서 이야기 했듯이 오직 자신의 기쁨만을 추구하는 세상에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 여기에서 저주가 없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스가랴 14:11의 말씀이 새 창조의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성경에서 저주라는 단어가 주어질 때마다 상기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간이 거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에 보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삶의 현장에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하나님 없는 인간은 저주의 상태에 놓여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마태복음 5:3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작된다고 선언함으로 행복한 사람의 출발을 알린다.

본문에서 그래서 선언한다. 새 창조의 세계에서는 다시는 저주가 없다. 왜냐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 곧 다스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 곧 하나님나라의 백성은 그 다스림에 만족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곧 예배하는 삶을 산다.

 

(2) 하나님이 함께 해주는 삶이다.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 성경은 부모가 없는 고아와 남편이 없는 과부 그리고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나그네로 비유하였다. 여기에 예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신다. 그리고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란 의미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성도는 세 창조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 것이다. 영생이다. 분명하게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고 성도는 영원히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 하나님의 지켜주심 안에 있게 될 것이다.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이는 666을 이마에 인치는 것에 비교하여 말하고 있다. 이마에 새겨진 것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드러내 놓고 나는 이런 자다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 성도는 나는 하나님의 것이다고 드러내 놓고 선언하는 자이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직접 빛이 되신다. 새 창조의 세계에는 그래서 빛이 필요없게 된다. 왜냐면 하나님이 직접 빛이 되시기 때문이다. 빛이 있기에 가야 할 길을 분명히 가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신다. 그러기에 염려와 걱정이 없다. 참으로 에덴(행복)이 넘쳐나는 삶이다.

 

(3) 왕 노릇하는 삶이다. 창세기 1:26-282:15의 온전한 회복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땅의 피조물을 다스리는 삶으로의 사명을 주셨다. 이는 에덴의 삶을 지키며 다스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의 다스림 곧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을 때 가능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 주권을 거절하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될 것을 선언했다. 인간의 타락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벗어나자 인간은 땅을 다스리는 자에서 땅에 끌려 다니는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은 물질의 종이 되어야 했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고 악에 끌려 다녀야 했다. 여기에 예수님은 온전한 다스림에 대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주기도문이다. 땅을 온전히 다스리려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우선 구하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인간은 온전히 땅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 다스림의 영역은 물질과 인간관계와 악이다. 요한계시록은 온전한 왕 노릇으로 막을 내린다. 땅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바로 감당할 때 인간은 행복을 누리게 된다. 새 창조의 세계에는 다스림의 온전한 회복이 있는 삶이다. 파괴된 에덴동산의 완벽한 회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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