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심” (히 3장)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장로교회)
제목: 산 소망(16): “예수님은 모세보다 우월하심” (히 3장)
본문: 히 3:1-19
요절: “그분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히 3:3)
주제: 부활하신 주님은 모세보다 훨씬 우월하시다.
교독문: 134번(부활절 2), 예배의 부름: 호 6:1~3
찬송: 171장(통 없음), 170장(통 16장)
일자: 2020년 4월 19일 주일 (부활절 후 첫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장로교회)
지난 한 주간 부활의 증인으로 사셨습니까? “주님께서 진실로 사셨도다 The Lord is indeed risen!” 우리는 부활의 증인으로 계속 살아갑시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부탁하신 말씀이 “오직 성령님께서 너희들에게 임하시면 너희들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부활의] 증인이 되리라”(행 1:8)
최초의 부활의 증인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주님 부활하신 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에 갔다가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말하니, 두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음질하여 갔습니다. 요한이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무덤에 도착했으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베드로 뒤이어 도착하여 무덤에 ㄷㄹ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었습니다. 요한이 따라 들어가 함께 이를 보았습니다(요 20:1~9). 두 제자들은 무덤에서 나와 있는 처소로 돌아가고, 마리아는 혼자 남아 무덤 밖에서 서서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으 들여다보니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시신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있었습니다. 지성소의 언약궤 위 시은좌(Mercy seat, 은혜의 보좌, 히 4:15)에 마주 대하고 있는 천사(그룹)처럼 말입니다. 천사와 대화하고 있는데 부활의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마리아야” 불러 주시는데 깜짝 놀라 “랍오니여[선생님]” 불러니 주님께서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님을 보았다“하고 주님께서 부탁하신 말씀을 전했습니다(요 20:11~18). 이후 주님께서는 40일간 주님의 형제 야고보와 열 제자들에게와 500문도들 앞에 보이신 후 승천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할렐루야!
오늘은 히브리서 3장을 강해합니다. 예수님께서 모세보다 우월하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 2 그분께서 자기를 세우신 분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3 왜냐하면 그분께서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음이니라. 4 이는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6 그리스도는 그분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분의 집이라.
1절에서 ‘하늘의 부르심 the heavenly calling’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효력 있게 부르시는 부르심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다 이러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거룩한 형제들 holy brethren’이란 히 2장 11절에서도 증거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아 단번에 거룩함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성도’ 또는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불립니다. ‘믿는 도리 our profession’란 우리의 신앙고백을 말합니다.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보냄을 입은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자주 언급하셨습니다(요 3:17; 5:36, 38; 6:29, 57; 7:29; 8:42; 10:36; 11:42; 17:3, 18; 20:21 등).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 드리고 기도하는 중보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consider). ‘깊이 생각하다’의 헬라어 카타노에사테(κατανοήσατε, 원형:)의 뜻은 ‘중히 여기다. 존경하다’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귀중히 여기며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만을 가장 귀중히 여기며 존경해야 합니다,
2절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께 충성하신 자로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충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셨고 또한 죽기까지 충성하셨습니다. 요 4:34,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빌 2: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분을 ‘충성된 증인 the faithful witness’이라고 부릅니다(계 1:5; 3:14).
3-4절에서 우리가 예수님을 가장 존귀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는 그분께서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으실 만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구약시대에 큰 인물입니다. 그는 가장 위대한 선지자이었고 하나님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입니(신 34:10).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영광을 얻으실 분이신 이유는 모세는 집이며 예수님은 집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집은 이스라엘 곧 구약교회를 암시하며, 집 지은 자는 이스라엘과 온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집 지은 자에 비교한 것은 그가 곧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증거합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다는 말은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보입니다. 집을 지은 자가 없다면 집이 있을 수 없습니다. 피조세계의 정교함, 질서정연함, 목적성이 있음 등의 사실은 그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창조주의 존재를 증거합니다. 집을 보면 집 지은 자가 있음을 알고 정교한 기계를 보면 그것을 만든 자가 있음을 알듯이, 우리가 우주 만물을 보며 그것을 만드신 창조주의 존재를 믿는게 됩니다.
5-6절에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분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분의 집이라.” ‘장래의 말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사역에 관한 것을 말합니다. 모세를 통해 계시된 구약의 율법은 바로 이것들을 증거한 것입니다. 모세는 이 상징적 계시의 내용들을 다 증거하고 기록했습니다. ‘사환’이라는 원어 세라폰(therapon θεράπων)은 ‘수종자, 종’이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온 집 곧 구약교회에서 하나님의 종과 수종자로서 하나님께 충성하였습니다.
모세와 비교할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셨습니다. ‘맡은’이라는 원어(에피 epi)는 ‘위에서’라는 뜻으로 ‘다스림’을 나타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 안에서(엔 ein) 종으로 충성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 위에서(에피 epi) 아들로 충성하셨습니다.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분의 집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집, 곧 교회를 말합니다. ‘담대함’이라는 원어 파르레시아 (παρρησία parresia)는 ‘확신’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소망(elpidos)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은 믿음의 복음의 본질적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대속(代贖), 그것에 근거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내용일 뿐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는 부활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을 포함합니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롬 8:24).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의 담대함과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믿음이며 성도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1~6절 사이에 우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모세보다 더 영광을 받으실 분으로 모세가 충성한 하나님의 아드님으로 충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집(교회)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하기 때문입니다.
7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들이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네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들의 조상이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40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저 세대를 노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7~11절에서 시편 95:7-11를 ‘성령의 말씀’즉 영감의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으로 주어졌습니다(딤후 3:16). 개역 성경에서 이를 감동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입니다. 영감과 감동은 많이 다릅니다. 한국 사람들이 감동을 좋아해서 이렇게 번역한 것인지 모르나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로 주신 영감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옛날 이스라엘 백성처럼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했을 때 하나님을 시험했었습니다. 그들은 물이 없었거나 만나 말고 다른 것을 먹고 싶었거나 길이 힘들었을 때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가 하고 하나님을 의심했고 하나님과 지도자 모세를 향해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강퍅케 했었습니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할 때 믿음과 순종이 뒤따르지만, 교만하고 완고할 때는 불신앙과 불순종만 뒤따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노를 격동했었습니다. 마음이 강퍅해지지 않으려면 자신이 부정되고 부서져야 합니다. 그때 마음이 가난해지고 애통함이 있고 온유한 마음이 생깁니다.
9절에서 “나를 시험하여”란 단어 페이라조 (peirazo)과 ‘증험한다’는 말(도키마dokimazo)은 원어에서 비슷한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의 하시는 많은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기적들도 있었고 두려운 징계들도, 긍휼의 구원도 있었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공급하심과 인도하심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만나를 날마다 먹을 양식으로 주셨고 반석에서 물이 솟아나게 하셨고 40년 동안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하나님의 길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노하셨고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안식’이란 일차적으로는 가나안 땅을 가리킬 것이지만, 좀더 깊이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서 주시는 참 안식과 또 장차 들어가 누릴 영원한 천국의 안식을 가리킵니다. 천국은 참 안식의 땅입니다.
12~13절에서 옛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의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중에 불신앙을 품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없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악심’은 ‘불신앙의 악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인간으로서 지극히 마땅하고 기본적인 일인데,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그것이 곧 근본적인 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밀착하여 그를 붙잡고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불신앙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일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그 결과는 죽음과 불행이요 영원한 멸망입니다.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은 성도들의 현재 상황을 가리킵니다. 우리에게는 오늘이 중요합니다. 어제는 이미 지나갔고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바로 할 때 그것이 우리의 좋은 과거로 기록되고 기억될 것이며,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바로 할 때 우리의 내일도 좋아질 것입니다. 오늘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 믿음으로 살고 순종으로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또 우리는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서로 권면함으로 우리 중에 죄로 강퍅케 되는 사람이 없도록 힘써야 합니다. ‘권면한다’는 원어 (파라칼레오 parakaleo)는 ‘격려한다, 위로한다’는 뜻입니다. 살전 5:11, 14,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불붙는 장작을 각각 따로 놓으면 쉽게 꺼지지만, 서로 포개어 놓으면 더 잘 붙듯이, 우리는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써 더욱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죄의 유혹’이라는 말은 ‘죄의 속임수’라는 뜻입니다. 죄는 사람을 속입니다. 죄는 사람에게 좋은 것, 유익한 것, 기쁘고 즐거운 것을 줄 것처럼 다가옵니다. 죄가 일시적으로 그런 것을 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죄는 갈등과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과 파탄을 가져옵니다. 죄는 행복을 주지 않고 불행만 줍니다. 죄의 속임으로 사람이 강퍅케 된다는 것은 경험적으로 사실입니다. 죄는 사람을 강퍅케 만듭니다. 그러므로 죄는 즉시 회개해야 합니다. 죄는 기생충이나 병균과 같기 때문에 몸속에 오래 둘수록 해롭습니다. 그것은 즉시 퇴치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죄를 회개할 때 온유해지고 믿음이 회복되고 순종하는 발걸음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중에 죄로 인해 마음이 강퍅하게 되는 자가 없도록 매일 서로 권면하고 격려함으로써 믿음과 선행의 삶을 힘써야 합니다.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15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좇아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17 또 하나님께서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분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14절에서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은 ‘확신의 시작’이라는 말로서 ‘처음 확신’을 말합니다. 모든 성도는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모든 성도는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는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구주이심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영생을 얻었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과 천국 등을 확신해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 곧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혹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혹은 이 세상 끝날까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불신앙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 모든 진리들을 다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행 24:14; 딤후 3:14). 우리가 처음 확신을 끝까지 붙잡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참된 안식과 기쁨과 평안을 얻으며,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예비하신 복된 천국에 들어가며, 거기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존귀를 영원히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15~16절에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날 너희가 그분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로 말미암아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여기서 ‘모세로 말미암아(dia)’는 ‘모세의 인도로 말미암아’라는 뜻입니다. 모세의 인도로 말미암아 이집트에서 나온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었으나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으로 모세를 부르셔서 그에게 모든 율법들을 주셨습니다(출 19:19; 20:21-22; 24:18).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집트에서 구출되었고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여 하나님을 화나게 하였었습니다.
17-19절에서 “또 하나님께서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분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노하셨고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셨습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였기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죽음입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무엇보다 불경건의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로 믿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그분을 거역하고 불평, 원망하였습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가데스 바네아에 와서 열두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었었다. 그런데 그들 중 열 정탐꾼의 보고는 불신앙적이었고 백성들의 마음을 낙망시켰습니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들을 하였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노하였고 맹세하며 그들에게 징벌을 선언하셨습니다.
신 1:26-28,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우리가 어디로 갈까?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로 낙심케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신 1:34-35,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소리를 들으시고 노하사 맹세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악한 세대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
18절에 ‘그분의 안식’ 곧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신 1:35). 그 땅은 이집트나 광야와 비교해 볼 때 안식의 땅입니다. 노예생활로 시달렸던 이집트나 불안정하고 위험한 광야에 비하면, 가나안 땅은 비교적 안정된 곳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만 사람들에게 참 안식이 됩니다.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은 하나님의 예비하신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순종치 아니하던 자’는 ‘믿지 않던 자들’(that believed not, KJV) 즉 불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안식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는 자들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불신앙적이고 불순종적인 자들에게 진노하셨고 그들이 약속의 땅에 결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4절부터 19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시작할 때 확실한 것’ 곧 확신의 시작 혹은 처음 확신이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기본적 진리들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가리킵니다. 이런 확신은 성경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우리 모든 성도는 이런 확신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처음 확신을 끝까지 견고하게 잡아야 합니다. 확신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 안에서 순종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의 진리들을 확신하게 하기 위해 성경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말씀을 항상 묵상하며 그 말씀을 믿고 날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말씀을 순종하고자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확신 중에 붙드시고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셋째로, 성경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과 안식에 참여할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영생 복락을 누리는 길입니다. 그러나 불신앙과 불순종은 하나님을 격노하시게 만들며 천국의 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롬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우리가 참으로 천국의 영광과 안식을 원한다면, 우리는 믿는 자, 확신하는 자가 되고 또한 성실하게 순종하는 자가 되고, 결코 불신앙과 불순종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귀한 말씀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고 말씀을 전적으로 순종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하옵소서.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만 깊이 생각하고 가장 소중하게 대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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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금주기도제목:
(1) 2020년에 산 소망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매일 매순간 동행하게 하소서!
(2) 영생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예수님을 닮아 믿음, 소망, 사랑의 향기를 날리게 하소서!
4월20일(월) 찬송166장(통 156장), 167장(통 157장) 삼상31장 (사울 전사)
21일(화) 166장(통 156장), 167장(통 157장) 삼하1장 (다윗의 조가)
22일(수) 168장(통 158장), 170장(통 16장) 2장 (다윗-유다 왕됨)
23일(목) 168장(통 158장), 170장(통 16장) 3장 (다윗의 아들들)
24일(금) 171장(통 없음), 174장(통 161장) 4장 (이스보셋 살해)
25일(토) 171장(통 없음), 174장(통 161장) 5장 (다윗 전국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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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겟세마네 신학교(본교: Faith Christian University & Theological Seminary)의 내일(2020년 4월 20일(월) 11주차 강의:
1,2교시 상징주의(류재이), 3교시 복음신학(송인성), 4교시 종말론(유석근)
장소: 세민교회 (대전광역시 대덕구 우암로 396) 3층
전화: 032-832-0287, 010-9113-1127, 010-4907-7483
총장 윤사무엘 박사,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바탕;fo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