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24):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 (히 11장) 2020년 6월 14일 주일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장로교회)

by wgma posted Jun 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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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소망(24):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

(히 11장) 2020년 6월 14일 주일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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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산 소망(24):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 (히 11장)

본문: 히 11:1~40

요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주제: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이시다. 반드시 믿음으로 나아가 승리하자

교독문: 136번(성령강림2), 예배의 부름: 롬 1:16~17

찬송: 377장(통 451장), 393장(통 447장)

일자: 2020년 6월 14일 주일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장로교회)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히브리서 11장을 강해합니다. 앞으로 읽을 히12:2에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author)요 또 완성자(finisher)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로 나오는데 히브리서 10장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음의 시작(author)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1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의 완성자(믿음의 장), 12장에서는 예수님은 소망의 완성자, 13장에서는 예수님은 사랑의 완성자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토록 동일하신 분(13:8)임을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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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은 믿음의 장이라고 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믿음의 눈으로 요약합니다. 믿음의 선조들의 예를 들어 우리의 믿음을 격려합니다. “믿음으로”(by faith, Πίστει)란 단어가 21회 나오며, 믿음으로 산 선진(성도)들이

16명 거명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믿음을 완성하신 것이 주제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체가 되시며 시작과 완성자가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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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음이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1-2절은 믿음의 정의와 성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는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음이라. Now faith is the substance of things hoped for, the evidence of things not seen.”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ὑπόστασις)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바라는 것들을 믿는 것인데, 그것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믿습니다. 우리는 바라는 것들을 믿지만, 장차 우리의 믿음대로 그것들이 실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믿음은 또한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πραγμάτων ἔλεγχος)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아직 보지 못하는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근거하여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 못하나 믿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보지 못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믿음의 ‘선진들’(πρεσβύτεροι, elders)은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는데 본장에 언급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등의 16명의 성경의 인물들을 가리킵니다.


3절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사실은 인간 중에 아무도 본 자가 없습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조차도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후에 맨 마지막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천지창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순전히 믿음에 의존하며, 창조의 비밀은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경의 계시를 믿습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ויאמר 혹은 이르시되, 말씀하시기를)’라는 말이 11번 나옵니다. 우리는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믿어야 합니다(요 1:3). 천지창조를 믿지 않는 자는 성경의 다른 진리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하신 영이신 하나님께서 모든 보이는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① 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으나, 둘째 아들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창 4:4). 아벨의 제사의 나은 점은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② 5절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365세를 향수하였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그분께 기도드리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승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의 예표이었고 천국의 실재성에 대한 생생한 증거입니다. 에녹은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는 증거를 얻었고 그래서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옮기워진 것이었습니다.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임이니라.”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늘로 옮기워진 것을 보면 확실히 그 속에 믿음이 있었습니다. 에녹의 믿음은 두 가지로 증거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에녹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기본적으로 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둘째로, 에녹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새 세계에서 영생복락(이를 줄여서 “영락”)을 누리는 상입니다. 즉 에녹은 보이지 않는 천국을 믿은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1절). 이와 같이, 에녹의 믿음은 하나님과 그의 상급인 천국과 영생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③ 7절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창세기 6:9에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녹과처럼, 노아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았고 흠이 없는 신앙인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하고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죄악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경건한 소수의 사람들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일들에 대해 경고를 받았을 때 그것을 믿었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준비하고 구원을 받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방주 짓는 일을 비웃다가 마침내 홍수로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방주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그에게 있어서 믿음으로 얻은 의와 같습니다. 이로써 노아는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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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④ 8절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 12:1).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에 순종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고자 했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믿음의 걸음이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는 과정을 알지 못하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9-10절 “믿음으로 그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설계자요 건축자이시니, 기초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우거(寓居)하였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이다!’ 아브라함의 거처는 이동하기 쉬운 장막이었습니다. 그는 같은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들에 거하였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그네 같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나그넷길입니다. 천국은 아직 미래의 일입니다. 장막을 펼치고 접듯이, 우리의 세상 생활은 때때로 이사하고 이동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듯이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만간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시공하신 천국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 날에는 더 이상 이동이 없는 영원한 집을 얻을 것입니다.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며 나이가 지났으나 출산하였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늙었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고 출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라는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에게 전하는 말씀을 듣고 속으로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 18:12). 그러나 사라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12절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은 아브라함을 가리킵니다. 사라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게 하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셨습니다.


13-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들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이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사라를 가리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순종을 했고 그들은 다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서 우거하며 장막들에 거하였고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안에서 죽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살다가 죽으면 소망이 있습니다(잠 14:32 “악인은 그의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그러나 믿지 않는 악인의 죽음은 곧 절망이요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4백년 내지 5백년 후에 그들에게 실제로 주어질 것입니다. 그들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하만민이 복 즉 구원의 복을 얻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로부터 2천년 이상이 지난 후의 일일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예비하신 천국은 그보다 훨씬 더 오랜 훗날의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기쁘게 믿고 소망하였습니다.


15-16절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들이 찾았던 본향은 그들이 나왔던 이 세상의 고향 즉 갈대아 우르가 아니었다. 만일 그 고향이었다면, 그들은 그 곳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았던 곳은 그 고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더 나은, 더 좋은’이라는 말이 신약성경 전체에서 19번 사용되었는데, 그 중 13번이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복음은 ‘더 좋은 소망’(7:19)이며 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의 보증’(7:22)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8:6)이십니다. 우리의 속죄는 ‘더 좋은 제물’(9:23)로 이루어졌고 히브리서 수신자들이 복음을 위해 고난도 받고 그들의 재산도 빼앗겼던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10:34)이 있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는 본향 즉 천국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입니다. 그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히 10:34)이며,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 즉 ‘하나님이 건축자요 만드신 이인, 터가 있는 성’(히 11:10)이며, ‘장차 올 영구한 도성’(히 13:14)입니다. 그 성이 바로 주 예수님께서 가서 제자들을 위해 예비하시겠다고 하신 처소이며(요 14:2) 요한계시록 21장에 예언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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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⑤ 17-19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믿음으로 바치는 예증을 듭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의 시험하시는 명령을 받은 때에도 한번 더 드러났습니다.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대로 이삭을 아들로 주신 후 어느 날 그에게 그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에서 아브라함은 믿음의 순종을 하였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敬畏)하였고 그 경외의 마음은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심지어 사랑하는 외아들에 대한 사랑보다 더 강하였습니다. 그는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늘의 별 같게’ 하리라고 말씀하셨고(창 13:16; 15:5), 또 이삭을 주신 후에 ‘이삭에게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창 21:12). 그런 이삭을 하나님은 번제로 드리라고 요구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에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⑥ 20절에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이삭도 믿음 있는 족장입니다. 이삭은 부친 아브라함이 자기를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려 했을 때 대항하지 않고 잠잠히 순종했던 것 같고(창 22장),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의 우물들을 여러 번 빼앗을 때에도 싸우지 않고 피하는 온유한 모습을 보였습니다(창 26장). 이삭의 믿음은 특히 그가 아들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한 말에서 나타납니다. 그는 아들 야곱에게 유언적 축복을 하면서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라”고 말했는데(창 27:29),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을 그가 그대로 믿고 선포한 것입니다. 또 그는 에서에게 “네 아우를 섬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유언이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⑦ 21절에 야곱이 믿음의 선진(족장)으로 살았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헬라어 70인역 본문)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야곱은 하란에서 20년의 세월을 지나며 많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서 인간적, 육신적, 세상적 욕심들과 애착들을 하나씩 제거하셨고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던 아내 라헬을 하란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죽게 하셨고, 몇 년 후에 그의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은 줄로 알았으며 또 22년 후 라헬의 남은 아들 베냐민까지 이집트에 담보물로 감금되었습니다. 그의 심적 고통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고통의 현실 속에서 세상 줄을 끊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마침내 야곱은 요셉의 초청으로 이집트로 이민 오게 되어 죽은 줄로 믿었던 아들과 재회하게 되었고, 그의 마지막 17년의 세월을 고센 땅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자가 되었고 죽을 때에 침상 끝에서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특별히 그가 자기를 찾아온 아들 요셉을 맞이하며 그의 두 아들[손자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축복할 때 오른손을 차자 에브라임의 머리에 두고 왼손을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두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에 이끌리는 그의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⑧ 22절에서 믿음이 선진 요셉의 유언을 읽습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요셉도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타국에서의 종살이 중에서도 범죄치 않았으며, 많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터득하였고 그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형들에게 증거하기를,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자가 형들이 아니고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했고(신본주의, 창 45:8), 형들은 그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간증했습니다(창 50:20).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입니다. 또 그는 임종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나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을 증거하며 그때 자기 해골도 그곳으로 옮겨줄 것을 맹세시키며 부탁하였습니다(창 50:24-25). 그의 후손들은 이를 순종하여 출애굽시 그의 해골을 가지고 나왔으며(출 13:19), 여호수아 장군이 죽은 후 요셉의 뼈를 그의 아들 에브라임 지파 땅, 아버지(야곱)의 우물곁에 묻었습니다(수 24:32). 이 우물에서 예수님께서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공급하신 것입니다(요 4:12, 29,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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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이집트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27 믿음으로 이집트를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⑨ 23~29절에 믿음의 선진인 모세를 소개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한 사람인 모세도 믿음으로 태어났고 장성했고 사역했습니다. 23절에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낳았을 때 그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으로 그 아이를 석 달 동안이나 숨겨 키웁니다. 당시 바로가 ‘남자가 나거든 강에 던지라’(출 1:22)는 명령을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비록 그 기간이 석 달에 불과했고 그 후 더 이상 아이를 집에서 숨기며 키울 수 없었지만(출 2:3), 그들은 그 동안 자신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들이 왕의 명령대로 아이를 죽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믿음은 귀한 믿음이었고 그것이 모세에게 전수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모세의 부모가 석 달 후에 그를 포기한 것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 가운데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되므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인도자가 될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24-26절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은 왕자 급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당한 권력과 부귀와 영광을 수반했을 것이나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였을 때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불림을 거절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세상적 권세와 부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증거대로, 그의 모친 요게벳은 모세의 유모가 되어 자기 아이에게 젖을 먹이게 되었습니다(출 2:8-9). 모세는 아마 젖을 먹던 어린 시절부터 모친을 통해 자신이 누구이며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정보를 들었을 것이며 커서도 기회 있는 대로 그러했을 것입니다. “너는 이집트 사람이 아니고 이집트의 공주의 아들이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너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고 천국 백성이다”는 생각이 심겨져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전에서 화려한 왕자의 생활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하였습니다. ‘더 좋아하다’는 원어(헬로메노스 ellomenos)는 ‘선택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적 부귀와 영광을 버리고 고난의 길을 택한 것이 모세의 귀한 점입니다. 모세는 단지 민족주의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이라는 표현은 구약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메시야 약속을 알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메시야의 사역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죄를 대속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세상 영광은 사망과 멸망을 가져오지만, 메시야의 사역은 영원한 생명과 평강입니다. 27절에 모세는 믿음으로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것 즉 위로부터 주신 새 원리를 따라 새 삶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과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 삶을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세는 이집트를 떠날 때 이집트 왕 바로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바로보다 더 크시고 두려우시고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명령만을 두려워하며 모든 인간적 두려움을 물리쳤던 것입니다. 28절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규례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 ‘정하다’는 원어(포이에오 poieo)는 ‘만들다, 지키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유월절과 피뿌림의 규례를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선포하고 지켰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어린양의 피를 이스라엘 백성의 집의 문설주(양 기둥)와 문인방(위, 아래를 가로지르는 나무)에 바르게 했는데, 이는 장자를 멸하는 심판의 천사로 하여금 이스라엘 집을 건드리지 않고 넘어 가도록 한 것입니다. ‘유월’(逾越)이라는 말은 심판의 천사가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건드리지 않고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29절에 “믿음으로 그들이 홍해를 육지같이 건넜으나 이집트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일은 모세의 믿음을 증거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증거합니다. 출애굽기 14장에 보면, 이집트에서 출발한 이스라엘 백성은 얼마 안 가서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것은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놓여 있고 뒤에는 이집트 군대가 다시 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음으로 손을 들어 홍해를 가리켰으며 백성들은 믿음으로 홍해 바다 속으로 담대히 나아갔던 것입니다.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모세는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이집트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출 14:13-14) 이에 하나님께서는 앞의 홍해를 육지같이 갈르시고 구름기둥으로 뒤에 따라오는 이집트 군인들의 진로를 방해하시며 마침내 홍해바다로 끌어 들이사 모두 수장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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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믿음으로 칠 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으며 31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 32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33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⑩ 30-31절에서 여리고의 라합의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리고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조용히 돌라. 6일 동안 그렇게 하라. 제7일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일곱 번째는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고 백성들은 큰 소리로 외치라. 그러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수 6:3-5) 이 하나님의 명령은 사람의 이성과 상식에 비추어볼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의 명령대로 순종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었던 성벽이었습니다. 그 성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소식을 듣고 마음이 녹아내렸고 성문을 굳게 닫고 결사적 각오로 성을 지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문이 굳게 잠긴 큰 성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정복에 있어서 첫 번째 큰 어려운 문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벽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성으로 들어갔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 성안에 있는 남녀노소와 우양과 나귀를 다 칼날로 멸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한 가정은 예외적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라합의 가정이었습니다. 라합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벌써 40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홍해가 갈라져 바다를 육지같이 건넌 것을 듣고 알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멸한 소식을 듣고 알았습니다. 라합은 이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서와 땅 아래에서 참 하나님이시며 또 그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실히 주셨음을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여리고 성을 정탐하기 위해 들어와 자기 집에 머물렀을 때 그들을 지붕 위에 벌여놓은 삼대 속에 숨겨주었고 신고를 받고 달려와 그들을 찾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두워 성문을 닫을 때쯤에 나갔다고 속였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하여 숨겨주고 하나님의 일에 협조한 그의 중심은 귀한 것이었습니다. 정탐군들은 살아남았고 약속대로 라합과 그의 형제들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또 주님의 일을 수행하면서 여리고 성 같은 큰 어려운 문제를 당했을 때, 우리는 그 문제를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합시다. 문제는 여리고 성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과 순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만 산다면 우리 앞에 놓인 여리고 성 같은 난관은 곧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32-34절에서 거명된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게 됩니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⑪ 기드온, ⑫ 바락, ⑬ 삼손, ⑭ 입다와 ⑮ 다윗과 ⑯ 사무엘과 및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 그들이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사도 바울은 믿음의 사람들의 예들이 더 많지만 그것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고 말하며 단지 몇 사람의 이름을 추가하고, 그가 언급한 혹은 언급하지 않은 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행위와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체험에 대해 열거합니다. 이들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한 경험들을 하였습니다. 사무엘이나 다윗 같은 인물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한 자들이었습니다(삼상 12:4; 삼하 8:15). 또 다윗 같은 이는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지 약 10년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유다 왕이 되었습니다(삼상 16, 17장; 삼하 5:4). 다니엘은 믿음을 지키다가 사자굴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사자들의 입을 막아주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단 6장). 다니엘의 세 친구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믿음의 절개를 지키다가 불무불에 던지웠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불의 세력으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단 3장). 다윗이나 엘리야는 사울과 이세벨의 칼날을 피하였고, 삼손이나 히스기야는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었었습니다.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그리고 요나단 등은 믿음으로 이방인들의 진을 물리쳤습니다.


35-38절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엘리야 때에 사르밧 과부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엘리사 때에 수넴 여인도 그러하였습니다(왕상 17장; 왕하 4장). 그러나 그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려 하지 않고 더 좋은 부활을 소망한 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므낫세 때에 무죄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었는데(왕하 21:16) 그 중에는 그런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더 좋은 부활’(크레이톤 아나스타시스 kreitton anastasis)이란 죽은 자가 살아나는 현세의 부활(아나스타시스 anastasis)과 비교할 때 그것보다 더 좋은, 더 나은 내세의 영광스런 부활을 가리킵니다. 아사 왕은 말년에 범죄하여 자기에게 바른 말을 전해주는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습니다(대하 16:7-10). 이스라엘 왕 아합 때에 참 대언자 미가야는 동료 선지자에게 뺨을 맞고 옥에 갇힘을 당하였습니다(왕상 22:24-27). 대언자 예레미야는 매를 맞았고 차꼬에 채움을 받았으며(렘 20:2) 또 토굴 옥 음침한 방에 감금되었고 물 없는 진흙 구덩이에도 던지워졌습니다(렘 37:16; 38:6).

하나님의 영의 감동으로 바른 말을 했던 스가랴는 성전 뜰 안에서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대하 24:21). 대언자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게 톱으로 켬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제사장 아히멜렉과 동료들 85명은 칼에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 22:18). 또 어떤 이들은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며,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서 유리하였습니다. 이들은 세상을 크게 여기지 않았고 세상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믿음으로 고난과 핍박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39-40절에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믿음의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증거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증거, 그들이 하나님의 친 백성이요 구원을 받은 자들이요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증거를 말할 것입니다. 그들은 증거를 가진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보지 못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더 좋은 것이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택자들의 구원을 다 이루셨습니다(요 19:30; 롬 3:24; 10:4). 그러나 그 구원은 아직 우리에게 소망 중에 주어졌습니다(롬 8:24). 이 구원은 장차 영광스럽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믿음의 완성자이십니다.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은 소망 중에 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을 맞이할 마지막 세대들은 그 영광의 구원을 직접 눈으로 보고 체험합니다. 믿음의 시작이요 완성자이신 예수님 안에서 믿음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을 완성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구약의 선배들은 믿음으로 살아가서 승리했지만, 이제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믿음의 과정을 주관하시고 성령님께서 구원의 서정으로 인도하시니 우리는 행복합니다. 이런 믿음의 승리가 날마다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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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6월15일(월) 찬송 286장(통 218장), 287장(통 205장) 왕하2장 (엘리야 승천)

16일(화) 286장(통 218장), 287장(통 205장) 3장 (모압과 전쟁)

17일(수) 288장(통 204장), 289장(통 208장) 4장 (과부 구제)

18일(목) 288장(통 204장), 289장(통 208장) 5장 (나아만 회복)

19일(금) 292장(통 415장), 300장(통 406장) 6장 (쇠도끼 찾음)

20일(토) 292장(통 415장), 300장(통 406장) 7장 (아람군대 패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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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내일(6월 15일) 여름학기 마지막 강의가 있습니다.

6월 15일 월 오전 10시~오후4시
과목: (1) 요한계시록 (2) 조직신학
교수: 윤사무엘 총장

수업장소: 인천광역시 연수구 해돋이로 107(서문) 더샵퍼스트월드 A동 104호
(주차는 지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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