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4): “내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 (빌4장)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장로교회 담임]

by wgma posted Jan 2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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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리스도의 복음(4): “내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 (빌4장)

본문: 빌립보서 4:1-23

요절: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주제: 자족하는 믿음으로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 행하자

교독문: 123번(주현 3), 예배의 부름: 갈 2:20

찬송: 446장(통 500장), 442장(통 499장), 95장(통 82장)

일자: 2021년 1월 24일 주일 (주현절 셋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장로교회 담임]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은 빌립보서 4장을 강해합니다. 빌립보서를 기쁨의 서신이라고 하는데 마지막 4장에서는 기쁨의 열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서라.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1절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장 끝에 언급한 대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파멸로부터 완전히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라는 말입니다. 사도는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 my brethren dearly beloved and longed for, my joy and crown”이라고 부릅니다. 목회자가 자기의 성도들을 이렇게 부를 수 있음은 축복입니다. 이미 살핀바 대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편지할 때도 성도들을 소중하게 표현합니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살전 3: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목회자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과 더불어 성도들의 사랑과 기도와 후원으로 살아갑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인정과 목양으로 천국 순례를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사도 바울전도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빌립보 교인들은 “나의 사랑, 나의 사모하는 자들,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이들에게 세 가지 권면을 합니다. 첫째는 “주님 안에 서라”고 권면합니다. ‘서라’는 원어(스테케테 στήκετε stekete)는 ‘굳게 서라 stand firm’는 뜻입니다. 복음의 진리와 교훈 안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주님 안에(in the Lord, ἐν Κυρίῳ)’ 곧 주님의 진리의 지식 안에,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 주님을 사랑함에, 주님의 교훈을 순종함에, 주님을 소망함에, 주님께 대한 충성에, 주님의 진리를 위한 선한 싸움을 싸움에 굳게 서야 합니다. 두 번째 권면은 2절에 있는 대로 주님 안에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유오디아(Euodias)와 순두게(Syntyche)가 어떤 인물인지 우리가 알 수 없으나,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be of the same mind in the Lord.”는 권면 속에 보면, 그 두 사람은 서로 생각과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교회지만, 그 교회 안에도 서로 생각이 맞지 않은 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미 빌립보 2:2-3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부탁합니다. 교회 안에 다투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주님의 진리 안에서, 성경적 교훈에 일치하여,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합니다. 세 번째 권면은 3절에 있는 대로 복음의 동역자를 도우라고 합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멍에를 같이한 자 yokefellow’라는 뜻을 가진 ‘수주고’일 수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교회를 대표할 만한 감독이나 지도자 중 하나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복음 사역에 함께 수고한 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빌립보교회에는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썼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이 전도 부인들은 복음의 일에 전념하였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또 글레멘드(Clement)와 그 외의 그의 동역자들(fellowlabourers)을 언급합니다. 이들의 이름이 생명책(the book of life)에 있다고 증거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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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님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4은 빌립보서의 주제와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있을 때만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Rejoice evermore”에서 설명한 대로 그냥 우리가 기뻐해지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항상 기뻐할 수 있음은 우리 주님은 기쁨의 옹달샘이시기 때문입니다(빌 3:1). 성령님의 열매는 기쁨(희락)이요(갈 5:22), 주님의 영이 함께하시면 언제나 어디서나 기쁩니다. 한국말로 기쁨이 ‘기를 뿜는다’는 말의 요약이라고 합니다. 임마누엘은 좋은 기분이 뿜어 나오는 것입니다. 찬송가 191장 “1절.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주의 팔이 나를 안보함이요, 내가 주의 큰 복을 받는 참된 비결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3절. 나와 동행하시고 모든 염려 아시니 나는 숲의 새와 같이 기쁘다. 내가 기쁜 맘으로 주의 뜻을 행함은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후렴> 성령이 계시네. 할렐루야 함께 하시네, 좁은 길을 걸으며 밤낮 기뻐하는 것 주의 영이 함께 함이라” 주님과 동행하면 환란 중에라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Rejoicing in hope)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옥중에 있는 사도는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라”는 말을 재차 강조합니다(and again I say Rejoice). 1984년 2월에 한달 동안 싱가폴에 가서 제3세계 선교사 훈련과정인 “학개 연구소”(Haggai Institute, Atlanta, GA에서 활동하시는 유대계 목사님 John Haggai가 설립)에서 16개국에서 오신 42명 선교사들과 시간마다 즐겁게 찬양한 곡이 바로 빌 4:4의 말씀이었습니다.

“Rejoice in the Lord always And again I say, Rejoice(2번)

Rejoice(2번) And again I say Rejoice(2번)” 돌림 찬양.

5절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님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라는 원어(에피에이케스 ἐπιεικὲς epieikes)는 ‘온유함, 친절함, 너그러움 등’의 뜻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할 수 있습니까? 혹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자기와 친분 관계가 없는 모든 자들에게, 인격적으로 부족한 자들에게, 심지어 자기를 미워하고 비난하는 자들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신다. “너희 온유함과 친절함과 너그러움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주 예수님께서 가까이 와 계십니다. 주님의 재림이 심히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을 그분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직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면 됩니다.

6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Be careful for nothing,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but in every thing by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anksgiving 하나님께 아뢰라”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염려하고 걱정할 일들이 많습니다. 학생은 학교 성적이나 진학의 염려, 친구들에게 따돌림 받거나 구타를 당할 염려, 청년은 취직과 결혼의 염려, 장년은 직장, 사업, 경제 문제와 자녀들을 인한 염려, 또 건강의 염려, 노년은 자녀들의 평안, 자신의 건강, 노후의 경제적 대책, 외로움 등의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 두려워 말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실상, 우리가 염려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염려는 우리의 기쁨과 평안과 활기를 빼앗아 갈 뿐입니다. 내과적인 병이 되는 스트레스는 염려 때문에 생깁니다. 잠 15:13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봅시다. 주님께 모든 염려와 걱정, 두려움, 무거운 짐을 감사함으로 기도하고 맡기면 7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할렐루야!

시 56: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혈육을 가진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마 6: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Casting all your care upon him; for he careth for you.”

저는 빌 4:6-7 말씀에 대한 간증이 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미래와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신학을 전공해서 선교사가 되고 싶은데, 서울대 영문과나 철학과를 먼저 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에 목회학석사를 하고 유학을 하느냐? 아니면 이왕 신학을 할 것인데 미션스쿨인 연세대학교 신과대에 가서 전공을 하면서 영문학과 철학을 부전공으로 하고, 그후 장신대 신대원에 진학한 후 유학할 것인가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비고사 준비하던 중 하나님께서 저에게 응답을 주시면서 두 번째 진로로 인도해 주시면서 바로 이 말씀 빌 4:6-7을 주신 것입니다. 기도 응답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담임선생님은 장차 신학을 하더라도 먼저 서울대 진학해서 학교 위상을 높이라고 하시는데 저는 이미 주님의 응답을 받았기에, 아버지의 모교가 되는 연세대학교에 진학하여 신학을 전공하면서, 영문학과 철학과(각기 7과목 이수하면 부전공 인정)에서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구약학을 전공한 후 장신대로 진학하여 공부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입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총신대에 가서도 공부했습니다. 그후 저는 어떤 기도제목이 있으면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그 기도제목이 응답해 주실 것을 미리 감사하며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화가 찾아오며,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는 체험을 수도 없이 해 오고 있습니다. 감사함이야말로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는 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평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고 기도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기도 응답과 그 응답으로서의 마음과 생각의 평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사에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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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지막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8절 ‘종말로’는 빌 3:1처럼 ‘마지막으로, 끝으로 finally’라고 읽는 것이 좋습니다. 개역 성경처럼 ‘종말로’ 번역하면 종말 윤리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8절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목표를 증거 합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영적, 도덕적 완전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덕이나 칭찬이 있다면(if there be any praise) 그것이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은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추구해야 할 바들이 무엇인가는 분명합니다. 로마서 8:5-6은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성령님에 속한 자들이므로 마땅히 성령님께서 주시는 덕들, 즉 성령님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다음 여섯 가지로 열거합니다.

첫째로, 그는 ‘무엇에든지 참되며 whatsoever things are true’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참되고 진실한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위선과 거짓과 속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악이며 결국 들통 납니다. 그것은 마귀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비록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고 자란 가정적, 사회적 환경이 나빠서 유능한 인물이 못 된다 할지라도 참되고 진실한 인물은 되어야 합니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whatsoever things are honest’라고 합니다. ‘경건하다’라고 번역된 원어(셈노스 σεμνός semnos)는 디모데전서 3:8, 11에서 ‘단정하다, 존경할 만하다, 품위 있다’는 말입니다. 성도들은 범사에 존경받을 단정한 태도로 무엇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모범이 됨을 말합니다.

셋째로, 바울은 ‘무엇에든지 옳으며 whatsoever things are just’라고 합니다. 옳은 삶, 의로운 삶,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불의하고 불법, 위법하고 부당한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항상 정정당당하게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넷째로, 바울은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whatsoever things are pure’라고 말한다. ‘정결하다’는 원어(하그노스 ἁγνός hagnos)는 ‘순결하다, 거룩하다’ 입니다. 죄는 더럽습니다. 우리는 불의한 일을 멀리하고 부정당한 욕심, 사사로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거듭난 성도는 순수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마 5:8).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면 주님을 만나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 문제나 이성 문제나 명예와 권리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흠 없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윗은 참회하면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0) 이 기도가 내 기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섯째로,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whatsoever things are lovely,”입니다. 소년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셨습니다(눅 2:52, 삼상 2:26). 먼저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아야 하며, 이웃으로부터 인정과 사랑을 받게 행동해야 합니다. 나의 언행과 마음씨가 얼마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자기 관리를 합시다. 언행일치가 되어야 하며, 속과 겉이 같아야 합니다.

여섯째로,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whatsoever things are of good report”입니다. 칭찬을 받는 인격의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습 3:20 “내가 그 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 때에 너희를 모을지라. 내가 너희 목전에서 너희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에 너희에게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진실함, 존경받을 만함, 의로움, 순결함, 사랑할 만함, 칭찬할 만함 등은 인격의 완전함을 잘 드러냅니다.

9절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원문에서 ‘내게’라는 말은 ‘내 안에서’라는 뜻이며 ‘본 바’라는 말을 수식합니다. 9절을 다시 정확하게 번역하면, “너희는 배우고 받고 듣고 또한 내 안에서 본 그것들을 행하라 Those things, which ye have both learned, and received, and heard, and seen in me, do”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배우고 받고 들은 것들이란 앞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 도덕적 완전함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이런 도덕적 완전함의 한 모범(good example)을 바울의 신앙생활 속에서 보았습니다. 바울은 범사에 모범적 삶을 살았습니다. 비록 그가 엄격한 의미에서 완전한 모범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는 비교적 흠이 없는 인격자로서 성도들 앞에서 행하였습니다. 지난 주일에 읽은 대로 빌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고전 4:16,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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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내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0절에서 바울의 전도 사역 초기에, 빌립보 교인들은 그를 물질적으로 후원하였으나 얼마 동안 그 일이 중단되었다가 그들이 다시 바울에게 물질적 도움을 보내왔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물질적 도움은 그들이 그의 복음 사역과 그 고난에 동참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빌 4:14). 또 그것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진실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고후 8:8; 9:13).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 드려 성전 봉사의 일에 전념하는 레위인들의 생활비로 쓰게 하셨습니다(민 18:21; 신 12:19).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마 10:42).

11-12절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자족하기(therewith to be content)를 배웠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의 자족하는 생활신조를 간증합니다. 그것은 아마 그들의 물질적 후원에 대한 바울의 기쁨이 그가 단지 물질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성도들이 전도자들을 생각하고 물질로 돕는 것이 선한 일이지만, 전도자들은 물질에 속박을 받지 않고 물질을 초월하여 자족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하십니다(마 10:9-10). 복음 전파자들이 복음으로 사는 것이 합당하지만,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 자신은 그 권리를 쓰지 않았다고 증거 하였습니다(고전 9:12). 자족하는 생활 즉 어떠한 환경과 처지에도 만족하는 삶은 전도자들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성도들이 배워야 할 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고 합니다(딤전 6:7-8). 자족하는 생활은 중세의 수도사들의 신조처럼 가난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자족하는 삶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배부를 줄도 알고 배고플 줄도 알며,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확신하고 소망하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빈부귀천의 삶에 대해 만족하거나 불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자마다 탐욕도 염려도 버리고 언제나 어떤 형편에서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자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13-14절 내게 능력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개역, 개역개정, 모든 현대역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 대신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는 자가 선생, 영웅, 위인, 성자 심지어 자신도 될 수 있습니다. 뉴에이지 사상처럼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 원문(네슬판이 아니라 개혁자들의 성경)에 보면 분명히 “그리스도”가 명시 되어 있습니다. 13절 말씀을 다같이 따라 외웁시다. “내가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창 18:14). 여호와의 손은 짧아지지 않으십니다(민 11:23). 그분은 지금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며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해 능력을 베푸십니다(대하 16:9). 우리는 그 호흡이 코에 있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사 2:22). 돈도 환난 날에는 더러운 것같이 여겨질 것입니다(겔 7:19). 사람은 피곤하고 무능하기도 하지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려가도 곤비치 않을 것입니다(사 40:30-31).

작년 12월 달(2020년 12월 12일 토) 황준석 목사님(필라 큰믿음 침례교회)께서 토요 아침예배(송도에 있는 황우여 장로님 사무실)에서 다윗의 믿음은 “담을 뛰어넘는 신앙”(시 18:29)이란 제목으로 말씀하시면서 다음의 예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유진 피더슨(Eugene Hoiland Peterson, 1932~2018)의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Leap Over a Wall: Earthy Spirituality for Everyday Christians (HarperCollins Canada/Religious, 1997)에서 삼하22편을 묵상하면서 시18편을 가리켜 “이 시편만큼 다윗의 생명력이 약동하는 기도문도 없다”고 하면서 삼하22:30절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라는 구절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서 다윗의 묘비명으로 삼을 수 있는 구절이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윗의 생애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담을 뛰어 넘은 사람”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한 운동화가 약 5억에 경매되어 팔린 적이 있습니다. 스포츠에 ‘기록이란 깨어지려고 있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담에 가로 막혀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 담을 훌쩍 뛰어넘는 것을 볼 때 순간! ‘나도 저 담을 넘을 수 있구나’ 하는 새 희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운동화의 주인공은 <로저 베니스터> 육상선수였답니다. 1954년 5월 6일 베니스터 라는 의대생이 4분벽을 깰 때가지는 1마일(mile)을 달리는데 4분 안에 달린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만약 인간이 1마일을 4분 안에 달린다면 폐와 심장이 파열하고 인대가 끊어진다는 것이 당시의 통념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니스터>가 마의 4분벽을 깨뜨린 이후에 한 달 만에 무려 10명의 선수가 4분벽을 넘어 섰고, 2년 후에는 무려 200명 이상 선수가 4분벽을 넘어 섰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고등학교 선수도 이 4분벽을 넘어 선다는 것입니다. 결코 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장벽을 배니스터라는 한 젊은이가 허물어 버리자, 사람들이 너도나도 따라서 허물었던 것입니다. 한 젊은이의 통념을 깬 도전이 사람들의 마음을 `할 수 없어, 안 돼`에서 `할 수 있어, 돼!`로 움직이게 했고 그만큼 세상을 바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다윗은 바로 우리에게 ‘담을 뛰어넘는 신앙의 삶의 본’을 보인 인물입니다. 다윗이야 말로 죽음과 불가능의 장벽이 겹겹이 둘러 싸였던 삶이었습니다. 그는 사울의 벽도 넘었고, 불레셋 아말렉 모압 압몬 가나안 족속의 벽도 넘었고, 뿐만 아니라 집안으로도 압살롬의 반란, 신복의 반역 그리고 개인적 잘못으로 밧세바와 불륜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죄의 보응(4개의 참회시를 썼습니다. 시 51편) 이루 말할 수 없는 벽을 넘었습니다. 다윗은 생애 많은 담을 훌쩍 넘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모델로 떠오른 인물이 된 것입니다. 다윗이 어떻게 그 담을 넘을 수 있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담을 넘게 하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어떤 이에게 담을 뛰어 넘는 은혜를 주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담을 뛰어넘는 믿음을 주셔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5. 향기로운 제물(빌 4:15-23)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21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2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 2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15-16절 ‘복음의 시초에’라는 말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던 초기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AD 47년경 시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었고(행 13:1-3) AD 50년경 제2차 전도 여행 때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가 그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하였습니다(행 16:12).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하였다’는 말은 ‘주고받는 일로 나와 교제하였다’는 뜻인데,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나 다른 곳들에서 복음을 전파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전도 후원금으로 바울을 도왔음을 말합니다. 그때 바울을 도왔던 교회는 그 교회뿐이었습니다. 그가 그들을 떠나 이웃 도시 데살로니가로 가서 전도했을 때(행 17장)부터 그를 돕기 시작했었습니다. ‘한 번 두 번’이라는 말은 ‘몇 번’ 혹은 ‘여러 번’이라는 뜻입니다. 헌금은 전도와 구제를 위해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인데, 여기서 말하는 전도는 국내외의 전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지교회의 목회 활동을 포함합니다.

17-20절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는 헌금이 성도의 열매임을 증거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행실이 있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구원받은 성도는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헌금은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은 구약성경 레위기 처음 부분들에 여러 번 나오는 표현입니다(레 1:9, 13, 17; 2:2, 9; 3:5, 16). 하나님께서는 번제와 소제[곡물제사]와 화목제에서 제단에 태워지는 제물의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합니다. 바울을 위한 물질적 후원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제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헌금하는 자들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며 부요하시고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성도들의 생활의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21-23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고(히 10:1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형제자매가 되었습니다(엡 2:19; 마 12:50).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서로 문안하기를 원하며 또 자기와 함께 있는 성도들의 문안도 그들에게 알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항상 주님 안에서 기뻐합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감사함으로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구합시다. 그리하면 주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인격을 추구하며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기도]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주님, 새해에 더욱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받으며, 칭찬을 받으며 자족하는 믿음을 가지게 하옵소서. 다윗처럼 담을 넘는 믿음을 주옵시고 내게 능력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매사 행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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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묵상, 찬송, 합심기도, 주기도문]

(1)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매일 매순간 동행하게 하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예수님을 닮는 믿음, 소망, 사랑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1월25일(월) 찬송 302장(통 408장), 191장(통 427장) 시19편 (말씀의 특성)

26일(화) 302장(통 408장), 191장(통 427장) 20편 (응답하소서)

27일(수) 299장(통 418장), 446장(통 500장) 21편 (구원의 즐거움)

28일(목) 299장(통 418장), 446장(통 500장) 22편 (메시야의 수난)

29일(금) 300장(통 406장), 95장(통 95장) 23편 (임마누엘 생활)

30일(토) 300장(통 406장), 95장(통 95장) 24편 (영광의 왕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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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신학교 겨울방학 중(2020년 12월 1일 ~ 2021년 2월 14일)

2021년 2월 15일 월 ~ 5월 17일 봄학기

[방학숙제: ① 성경 쓰기, 영어(King James Bible)와 한글

②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소요리문답 107문답. 노트에 쓰기

*후원방법:

1) 정기적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기도후원

2) 재정 후원(일시적, 정기적)을 부탁합니다. 액수는 자유롭게.

후원계좌. 농협 302-0280-1002-11 (Yun Samuel)

하나 263-890778-58307 (Yun Samuel)

우체국 107 367 0205 8032 (Yun Samuel)

3) 바이블 아카데미 저서 구입:

신간출판, 윤사무엘 목사 저, <복음으로 본 세계교회사> (쿰란출판사, 2020)

<한국교회와 바른 성경이해>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한국교회와 성지순례> 등 3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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