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그리스도의 복음(12)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다” (갈2장)
제목: 그리스도의 복음(12):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다” (갈2장)
Christ liveth in me.
본문: 갈라디아서 2:1~21
요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 2:20)
주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으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자
교독문: 128번(사순절 5), 예배의 부름: 행 2:36
찬송: 146장(통 146장), 150장(통 135장), 407장(통 465장)
일자: 2021년 3월 21일 주일 (사순절 다섯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오늘은 춘분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을 강해합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 그 뒤 십사 년이 지나서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도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라. 2 내가 계시로 말미암아 올라가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포하는 그 복음을 그들에게 전달하되 명성 있는 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하든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던 그리스 사람 디도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우리의 자유를 엿보아 우리를 속박하려고 몰래 들어왔으나 5 우리가 그들에게 단 한 시간도 굴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게 하려 함이라. 6 그러나 무엇이나 되는 것같이 여겨지던 이 사람들에 관하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지 내게는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받아들이지 아니하시느니라) 무엇이나 되는 것같이 여겨지던 그들이 회의에서 내게 아무것도 더해 주지 아니하였느니라. 7 오히려 반대로 베드로가 할례자를 위한 복음을 맡은 것 같이 내가 무할례자를 위한 복음을 맡은 것을 그들이 보았나니 8 (베드로 안에서 효력 있게 일하사 할례자를 위한 사도직을 주신 바로 그분께서 내 안에서도 강력하게 일하사 이방인들을 향하게 하셨느니라.) 9 또 기둥같이 여겨지던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내게 주신 은혜를 깨닫고 나와 바나바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교제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우리는 이교도들에게로 가고 그들은 할례자들에게로 가고자 함이라. 10 다만 그들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줄 것을 원하였는데 바로 그 일은 나 역시 열심히 행하던 바라.
1절. 14년 후에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일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안디옥에 내려와 이방인들도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가르침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크게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고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이 문제를 위해 바울과 바나바와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파송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사도들과 장로들은, 이 일을 위해 모여 많이 변론한 후,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하는 등의 율법의 멍에를 메우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마 이 일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올라갔고 또 디도를 데리고 갔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Cyprus)에서 난 레위족 사람으로 본명은 요셉입니다. 사도들이 그를 일컬어 바나바(Barnabas, “위로의 아들”라 불렀는데 그가 밭이 있으니 팔아 그 값 모두를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던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행 4:36-37). 그는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한 자요(9:26), 착하고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요(11:24), 바울을 안디옥에 초청해 함께 그 교회를 가르쳤던 자요(11:25-26), 그 교회에서 바울과 함께 선교사로 파송되어 바울의 1차 세계선교 여행을 동행한 자입니다(13:2-3). 디도는 헬라인이라는 것(3절)과 그레데(Crete)에 남아 교회를 돌본 사역자라는 것(딛 1:5)이며 할례를 받지 아니했고(갈 2:3), 디도서의 수신자입니다. 디모데와 더불어 바울 사도의 제자이면서 목회자였습니다.
2절. “내가 계시로 말미암아 올라가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서 선포하는 그 복음을 그들에게 전달하되 명성 있는 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하였으니 이것은 어찌하든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안디옥 교회 안에서 일어난 교리적 논쟁 때문이었지만(행 15장)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라고 직접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대언자들처럼 하나님의 직접적 계시를 받은 자들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목적은 그가 그때까지 이방인들에게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예루살렘 교회가 믿고 있는 복음의 내용, 즉 예수님의 사도들이 전파했던 복음의 내용과 같은지를 대조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의 복음 전파의 일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바울이 잘못된 내용을 전파하고 있다면 그의 모든 수고는 헛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했습니다(롬 1:16).
3절.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규례입니다. 그것은 남자의 성기 끝을 덮은 겉가죽(foreskin, 양피, 포피)을 잘라내는 의식으로 평생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의 표식으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 할례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본래 태어난 지 8일 만에 받아야 하며,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면 언제든 할례를 받는 것이 개종의 선제 조건입니다. 유대인의 할례파들은 기독교인이 될 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는 할례가 반드시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할례는 본질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adiaphora=“it does not matter” 현상문제, 비본질문제).
고전 7:19-20 “할례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 6: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그래서 헬라인 출신 디도에게는 할례를 강요하지 아니했습니다. 특히 문제가 사람이 구원을 받기 위해 할례를 받아야 하는가 하는 그 논쟁의 시점에 바울은 디도를 예루살렘 회의에 데려감으로써 행동으로 그 진리를 증거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4-5절. 바울이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교회 안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회에 당당하게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것이 마귀의 전술입니다. 마귀는 자기 사람들을 비밀 첩보원처럼 가만히 교회 안에 투입시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계 속에 많은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사이비이단의 누룩들이 침투합니다. 진실한 목회자들은 그들을 분별합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할례당들이 몰래 들어온 목적은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엿보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함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자유’라는 하나님의 복음의 핵심적 내용을 말하는데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할례의 규례와 의무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모든 의식적 율법들, 예를 들어 성전 의식들, 제사 의식들, 절기들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단번에 완전한 의를 이루셨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았기 때문에 누리는 자유입니다. 물론 그 자유가 도덕적 율법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복음 안에 있는 자유는 방종에 빠지게 하는 자유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과 계명을 행하게 하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우상 숭배하지 말아야 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고 거짓 증거하지 말고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도덕적 율법들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안에서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이지 공포와 두려움 가운데 무거운 짐을 진 심정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가만히 들어와 바울과 성도들이 가진 자유를 파괴시키고 그들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오해한 자들이며,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아군들이 아니고 적군들이며, 하나님의 교회의 건설자들이 아니고 파괴자들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피흘려 사신 형제들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고 실상 미워하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긍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 안에 사는 자들이 아니고 아직도 사망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입니다. 잠 25:26은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의 흐리워짐과 샘의 더러워짐 같으니라”고 합니다. 진리를 가진 자는 진리를 가지지 못한 자 앞에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그 거짓 형제들의 사상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진리와 배치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 진리 곧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이 진리가 자신뿐 아니라 자기가 전도하여 믿게 된 모든 성도들에게도 있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6-9절. ‘유명한 이들’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오직 성경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해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께만 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어떤 직분보다 모든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형제자매이며 한 식구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복음과 열두 사도들의 복음은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자신이 전해 받은 복음의 내용은 바로 열두 사도들이 전파하였던 그 복음이었음을 확증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고, 바울은 헬라인들을 위한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 즉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바울과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이 교제의 악수는 바울의 복음과 베드로의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그들이 인정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 교제의 악수는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라는 것을 증거한 것입니다. 이렇게 확인된 그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이 세상에 없으며, 오늘도 그 복음만이 모든 인생들에게 구원과 생명과 소망이 됩니다.
10절. “다만 그들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줄 것을 원하였는데 바로 그 일은 나 역시 열심히 행하던 바라.”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바울에게 부탁한 것이 있다면 단지 예루살렘과 동족 유대인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행 11:29에 보면, 글라우디오(=클라우디우스 Claudius로마 제국의 제4대 황제, BC 10년 ~ AD 54년) 황제 때 큰 흉년이 들었는데 AD 50년 예루살렘 회의가 개최될 당시 유대에는 가난한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구제에 대하여, 바울은 이전부터 자신도 그 일을 힘써 행하여 왔다고 증거합니다. 선행과 구제는 하나님의 명하신 뜻이며(신 15:7-11)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당연한 의무입니다(고후 9:13).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선을 행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11 그러나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책망받아야 했으므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으나 그들이 오매 할례자들에 속한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가 뒤로 물러가 자신을 분리하였으며 13 다른 유대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고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느니라. 14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걷지 아니하는 것을 내가 보고 그들 모두 앞에서 베드로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의 방식대로 살고 유대인들처럼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이방인들을 강요해서 유대인들처럼 살게 하느냐? 하였노라.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인에 속한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되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느니라.
11절. 게바(Cephas)는 베드로와 같은 인물로 주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으로 게바는 아람어며 베드로는 히브리어로 “돌stone, 반석rock”이란 뜻입니다(요 1:42, 마 16:18). 안디옥은 이방인들을 위해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했던 교회가 있었던 수리아(=시리아, 구약시대는 아람) 지방의 도시입니다.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 바울은 그가 위선한 일에 대해 책망할 일이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행동의 실수를 한 것입니다. 3년간이나 주님께 직접 배웠고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아 복음 진리를 밝히 이해하고 고난을 무릅쓰고 증거했던 베드로는 인격적으로 상당히 성숙되어 있었을 것이지만, 그에게도 실수가 있었습니다. 12-13절에 보니 예루살렘의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그들이 도착하니 할례자들에 속한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가 뒤로 물러가 자신을 분리하였습니다. 다른 유대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고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고 있다”고 말했었습니다(행 10:28). 이것은 구약의 율법에 의거한 것은 아닙니다.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 것은 유대인의 관례법으로 음식에 대한 법이나 우상숭배를 금한 계명, 또는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말 것을 규정한 율법(신 7:3-4) 등에 근거한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이 왔을 때 그들을 두려워해 떠나 물러갔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에게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고 공격할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떠나 물러간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약한 마음에서 나온 행동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의 두려워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베드로의 위선적 행동에 실망을 느꼈습니다. 사람 앞에서 그를 공의와 겸손으로 책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훌륭한 행동입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습니다(잠 27:5-6).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한 목표는 책망받을 일이 없는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화의 목표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단번에 훌륭한 인격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의 인격적 성숙은 예수님 믿기 전에 그가 살아온 상태와 관계가 많은 것 같습니다. 성화는 매우 더디게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실히 믿는 것 같은데도 인격적 흠과 결함이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이 자신의 인격적 결함을 알고 있지만, 종종 자기의 부족을 모르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참 큰 문제입니다. 인격적 결함 중 대표적인 것은 말의 실수입니다. 잠 10:19-20,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의인의 혀는 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잠 11:12,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 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잠 17:27,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잠 26:20,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장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약 1:19,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라.”
베드로뿐 아니라,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였고, 바울의 동료인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연약함은 그 혼자의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가 물러가자 함께 먹던 유대인들도 같이 물러갔습니다. 거기에 함께 있었던 바나바까지도 그러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회자와 제직의 역할, 교사와의 역할, 각 선교회 회장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말과 행실에 있어서 모범이 되면 교회에 유익을 끼치지만, 그들이 본이 되지 못하면 해를 끼칩니다. 덕을 세운다는 것은 교회를 건립하는 것을 말하며, 부덕한 것은 교회를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믿음에 바로 서서 덕을 세우는 자, 즉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14-15절. 베드로의 외식은 복음 진리대로 행하지 않은 실수이었습니다. 복음 진리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방 죄인’이라는 표현은 이방인들이 본래 죄인이었음을 말합니다. 이방인들은 본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 우상들을 섬기며 살았고 도덕적으로도 여러 가지 더러운 죄악들 가운데 파묻혀 살았었습니다.
16절.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복음의 핵심을 말합니다. 복음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모든 죄악된 처지 곧 죄인의 신분과 죄성에서 구원받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의는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신 6:25, “우리가 그 명하신 대로 이 모든 명령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삼가 지키면 그것이 곧 우리의 의로움이니라.” 그러나 세상에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참된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롬 3:11,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20에서도,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함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분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는 말씀과 같습니다. 롬 3:21-22는,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합니다. ‘율법 외에’라는 말은 ‘율법과 별개로, 율법과 관계없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과 다른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율법과 대언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 곧 구약시대에 성막 제도와 제사 제도에서 암시된 바입니다. 또 이 방법은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적용되는 방법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남녀노소, 빈부귀천, 유무식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왜 예수님만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은혜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 초기부터 예배 제도를 통해 암시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형벌을 담당하셨으므로, 우리가 그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롬 3:24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찬송가 518장(통 252장) “갈라디아서 주제가”를 부릅시다.
(1) 기쁜 소리 들리니 예수 구원하신다. 만민에게 전하라 예수 구원하신다.
주님 명령하시니 산을 넘고 물건너 온 세상에 전하라 예수 구원하신다.
(2) 바다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죄인 들으라 예수 구원하신다.
모든 섬아 일어나 메아리쳐 울려라. 복음 중의 복음은 예수 구원하신다.
(3) 환난 중에 하는 말 예수 구원하신다. 다시 살아나시어 예수 구원하신다.
지은 죄로 인하여 슬픈맘이 있어도 숨질 때에 내 할말 예수 구원하신다.
(4) 바람들아 외쳐라. 예수 구원하신다. 기뻐하라 나라들 예수 구원하신다.
구원하는 복음을 산과 들에 전하라. 우리들의 승전가 예수 구원하신다
17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자 하다가 우리 자신 또한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런 까닭으로 죄의 사역자가 되시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이는 만일 내가 헐었던 것들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내 자신을 범법자로 만들기 때문이니라. 19 이는 내가 율법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이니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17절. 의(義)라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키며 구원의 정도로 가는 것을 뜻합니다. 의는 무죄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 완전입니다. ‘의롭게 한다’는 원어(디카이오오 δικαιω dikaiow)는 ‘의롭게 만든다’는 뜻이 아니고 ‘의롭다고 간주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루신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만 믿고 그것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줄 알았다가 그것이 아니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18절.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지,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일 수는 없습니다. ‘내가 헐었던 것’이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생각을 말합니다. 바울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될 수 없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생각을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세우면’이라는 말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바울이 그렇게 말하면, 그는 죄인이 될 것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사람이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해 왔고 그 주장이 틀린 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9절. ‘하나님을 향해,’ ‘율법을 향해’라는 말은 원문에서 관계성을 나타냅니다(데오 Theo, 노모 nomo - 관계의 여격).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율법과의 관계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향해 살기 위하여’라는 말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은 자가 아니고 산 자가 되기 위하여’라는 뜻이며, 또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 곧 율법의 계속된 정죄, 누적된 정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언제, 어떻게, 누구로 말미암아 죽었는가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과의 관계에서 완전히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20절은 오늘의 요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뭇박혔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가 우리를 대신해,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의 죗짐을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우리의 죄로 인한 죽음이며 곧 우리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은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속했던 나, 곧 옛사람 나를 가리킵니다. ‘산 것’이라는 말은 ‘사는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 그 ‘나’는 죄로 인하여 정죄되었고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본래의 나, 율법 아래 정죄되었던 나, 곧 옛사람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요? 어떤 이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을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했습니다. 1930년대에 이단인 황국주 씨는 “머리도 예수의 머리, 피도 예수의 피, 마음도 예수의 마음 ... 전부가 예수화하였다’고 주장하며 예수님의 모습을 흉내낸다고 머리를 기르고 수염도 길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자로 판명되고 정죄되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말은 육신적으로, 신비적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즉 ‘옛사람 나는 이미 죽었고 나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사람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속에 거하시므로, 이것은 마치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참된 회개를 동반합니다. 자신의 죄를 통회하는 자만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또한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얻고(요 1:12) 영생을 얻습니다(요 3:16). 성도의 삶은 믿음의 삶입니다. 성도에게 예수님 믿는 믿음이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아닙니다.
21절.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만일 의롭게 되는 것(디카이오쉬네 dikaiosyne)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죄인을 구원하심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였고 지금 그것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사람은 율법으로 의롭게 즉 도덕적으로 완전하게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해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또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욕과 욕심과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고 새롭게 태어납시다. 찬송 407장(통 465장)
(1)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구주와 함께 나 살았도다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후렴. 언제나 주는 날 사랑하사 언제나 새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만 바라봅니다
(2) 맘 속에 시험을 받을 때와 무거운 근심이 있을 때에
주께서 그때도 같이하사 언제나 나를 도와주시네
(3) 뼈아픈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주께서 그때도 같이하사 언제나 나를 생각하시네
(4) 낸 몸의 약함을 아시는 주 못 고칠 병이 아주 없네
괴로운 날이나 기쁜 때나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네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복음으로 은혜와 평강과 자비로 감싸주시고, 사순절에 우리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박게 하시고, 주님께서 제 속에 살아있음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언제나 주님은 저를 사랑하사 언제나 새생명 주시나니 영광의 그날에 이르도록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귀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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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1)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님 안에서 매일 매 순간 동행하게 하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예수님을 닮는 믿음, 소망, 사랑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3월22일(월) 찬송 380장(통 424장), 368장(통 486장) 시67편 (온 백성의 구원)
23일(화) 380장(통 424장), 368장(통 486장) 68편 (구원의 하나님)
24일(수) 370장(통 455장), 369장(통 487장) 69편 (주님을 위한 열성)
25일(목) 370장(통 455장), 369장(통 487장) 70편 (주님, 건져주소서)
26일(금) 365장(통 488장), 363장(통 479장) 71편 (주님께 피합니다)
27일(토) 365장(통 488장), 363장(통 479장) 72편 (솔로몬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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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신학교 봄학기: 매주 월요일 만 수업.
2021년 2월 15일 월. 오전10시~오후5시 [종강. 5월 10일 월]
3월 22일(월) 1~2교시 성경적 상징주의(류재이)
3~4교시 한국신학(유석근)
장소: 대전광역시 대덕구 우암로 396(비래동 52-1), 3층
연락처: 010 9113 1127, 010 4907 7483
*후원방법:
1) 정기적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기도후원
2) 재정 후원(일시적, 정기적)을 부탁합니다. 액수는 자유롭게.
후원계좌. 농협 302-0280-1002-11 (Yun Samu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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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107 367 0205 8032 (Yun Samuel)
3) 바이블 아카데미 저서 구입:
윤사무엘 목사 저, <복음으로 본 세계교회사>, <한국교회와 바른 성경이해> <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한국교회와 성지순례>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