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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그리스도의 복음(14): “

시내산과 예루살렘” (갈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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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 부활절.
주님 부활하셨습니다.
제목: 그리스도의 복음(14): “시내산과 예루살렘” (갈4장)
Sinai mount and Jerusalem

본문: 갈라디아서 4:1~31

요절: “그런즉 형제들아, 이처럼 우리는 노예 여자의 아이가 아니요 자유로운 자의 아이니라.”(갈 4:31)

주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자

교독문: 133번(부활주일1), 예배의 부름: 사 26:20-21

찬송: 161장(통 159장), 162장(통 151장), 164장(통 154장)

일자: 2021년 4월 4일 주일 (부활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오늘은 부활주일(Resurrection Lord’s Day)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네(Jesus Christ is really risen!) 기쁜 소식을 만방에 전합시다. 그리스도인의 지상명제는 땅끝까지 주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성신님께서 너희에게 임하신 뒤에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그리고 땅의 맨 끝 지역까지 이르러 나를 위한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부활절 날짜를 정하는 것은 AD 325년 니케아 교회 회의에서 정한대로 “춘분 다음에 오는 만월이 지난 첫 주일”입니다. 계산법이 차이(유월절 보름날 The Paschal Full moon)를 산출하는 계산)가 나서 올해 유대인(유대력 5781~5782년)들은 유월절이 3월 28일이고 그 다음날부터 무교절을 지켜 4월 5일까지 무교절입니다. 세계기독교회에서는 올해 부활절을 오늘(4월 4일)로 지킵니다. 올해 벚꽃은 98년 만에 서울에서 일찍 핀다고 합니다. 이번 부활절에 전국에 벚꽃, 목련, 개나리, 매화, 진달래, 튜립, 등 꽃동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지난해 이어 올해도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국민들에게 봄의 향연은 어김없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상화시인(1901-1943년, 대구 서문로)이 1926년에 <개벽>지에 발표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처럼 코로나로 빼앗긴 우리나라에도 봄은 왔습니다. 대구 제일교회 뒷동산에 가보면 “청라언덕”이 있습니다. 지금은 의료선교 박물관이 있는 건물이 북장로교 선교사 스윗즈와 챔니스 선교사 사택이었는데 푸른 담쟁이넝쿨로 뒤덮인 사택이라 있는 곳이라고 靑羅언덕이라고 부릅니다. 1922년 박태준선생(1901-1986년)이 마산 창신학교 교사였을 때 “동무생각”이란 가사를 적어준 것을 동료이시던 이은상선생님(1903-1982년)이 곡을 붙인 것입니다. 박태준선생이 계성학교에 다닐 때 청라언덕을 오르내리면서 이웃에 사는 한 여학생(신명학교)에게 애정이 가서 “백합같은 동무”를 봄, 여름, 가을, 겨울 주제로 4절에 담았습니다. 결국 그 여학생은 일본 유학길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일제 강점기여서 “나라 독립”을 생각하며 백합같은 동무를 한민족으로 승화하여 부르면서 국민 가곡이 되었습니다. 부활의 계절에 주님을 생각하며 불러도 좋습니다.

1.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2. 더운 백사장에 밀려드~는 저녁 조수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저녁 조수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3. 서리바람 부는 낙엽 동산 속 꽃진연당에서 금새 뛸적에

나는 깊이 물 속 굽어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꽃 진 연당과 같은 내맘에 금새 같은 내동무야~

네가 내게서 뛰놀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4. 소리없이 오는 눈발 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 맘에 가등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요한복음 20장에 의하면 부활절 첫날 아침 일찍 갈릴리에서 온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부어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저께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나서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총독을 찾아가서 자기가 최근에 구입한 가족묘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시고 싶다고 부탁하여 허락받은 묘지(지금 예루살렘 북쪽 문인 다메섹 문에서 200미터 떨어진 정원무덤 The Garden Tomb)의 위치를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돌무덤에 와서 돌이 돌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이에 달려가서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인 요한에게 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대제사장 군인들이 주님을 돌무덤에서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베드로와 요한이 나아가 돌무덤으로 갔습니다. 두 제자들이 같이 달려갔는데 요한이 베드로를 앞질러 달려가서 먼저 돌무덤에 이르렀습니다. 그가 몸을 구부려 안을 들여다보고 세마포(a linen)가 놓인 것을 보았으나 아직 들어가지는 아니하였습니다. 그 뒤 시몬 베드로가 그를 따라와서 돌무덤에 들어가 보매 세마포가 놓여 있고 또 그분의 머리 주변에 있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함께 개인 채 한 곳에 따로 놓여 있음을 확인합니다. 그제야 돌무덤에 먼저 왔던 요한도 들어가서 보고 믿었으니 이는 그들이, 그분께서 반드시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나야 하리라(요 11:26), 하신 성경 기록을 아직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두 제자들이 다시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바깥의 돌무덤에 서서 슬피 울었습니다. 그녀가 슬피 울면서 몸을 구부려 돌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흰옷을 입은 두 천사가 예수님의 몸이 놓였던 곳에 하나는 머리 쪽에 다른 하나는 발 쪽에 앉은 것을 보게 됩니다. 성막시절 때 지성소 위의 속죄소(Mercy seat)의 좌우 편에 그룹의 천사가 날개를 연하여 있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시신 놓인 장소가 바로 지성소의 언약궤와 속죄소(시은좌)인 것을 증거합니다. 천사들이 그녀에게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슬피 우느냐?” 하니 마리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입구에 누군가 있음을 느낍니다.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 알지 못합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슬피 우느냐?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그녀는 그분을 동산지기로 생각하고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당신이 그분을 여기서 옮기셨거든 그분을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일러 주소서. 그리하면 내가 그분을 모셔 가리이다,” 하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마리아야,” 하시거늘 그녀가 돌이켜 그분께, “랍보니여(선생님이여),” 예수님께 안기려고 했는지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대지 말라. 내가 아직 내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다만 내 형제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자기가 주님을 보았으며 또 그분께서 자기에게 이것들을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요 20:1-18)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는 최초의 부활의 증인(witness)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부활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인간적으로 실패와 절망의 장소가 재기와 성공의 장소가 되기를 바랍니다. 끝이라고 생각한 순간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믿음으로 마리아는 무덤을 떠나지 않고 주님을 만났듯이, 우리도 이 시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여” 불러주시는 주님께서 여러분의 이름을 각각 부르십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은 갈라디아서 4장을 강해합니다. 갈 1-3장은 교리부분으로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갈 4-6장은 윤리부분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말씀합니다. 4장은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 5장은 자유자로서의 삶(사랑), 6장은 자유자로서의 삶(선행)을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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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 내가 말하노니 상속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아이일 때에는 전혀 종과 다르지 아니하고 2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가정교사들과 감독하는 자들 밑에 있느니라. 3 이와 같이 우리도 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초등 원리 밑에서 속박 당하였느니라. 4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5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영을 너희 마음속에 보내사,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더 이상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상속자니라. 8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는 본래 신들이 아닌 것들을 섬겼느니라. 9 그러나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안 뒤에 혹은 하나님께 알려진 뒤에 어찌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다시 그것에 속박 당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때와 해를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헛되이 수고하였을까 너희로 인해 염려하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과 율법과의 관계를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는 아들과 그의 후견인이나 재산관리인과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1-3절. ‘이 세상 초등원리’라는 원어는 ‘이 세상의 초보적인 것들’이라는 뜻으로 율법을 말합니다. 상속받을 아들은 장차 아버지의 모든 유산의 주인이 될 것이지만, 어릴 때는 자기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며 그의 후견인이나 재산 관리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라의 법이 정한 나이가 되면 그 아들은 자기의 권리를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은 구약시대에는 율법 아래 복종하였습니다.

4절.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아버지의 정하신 때(the fulness of the time was come)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습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드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하나님의 독생자 곧 그분의 영원하신 아들이십니다(요 1:1; 17:5).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약 예언의 성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창 3:15). 여자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참 사람으로 오셨음을 의미합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님은 인간의 영과 혼과 육체를 취하신 참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는 또한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그분은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언약의 백성이며 율법을 다 지킬 의무 아래 있음을 나타냅니다. 그분은 과연 율법을 다 지키셨고 율법의 의를 다 이루셨습니다. 그분께서 율법 아래 나신 목적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속량(贖良)한다’는 말은 값을 주고 사셔서 건져내시며 자유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5절. 그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는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셨습니다. ‘아들로 입양 the adoption of sons’이라는 원어(휘오데시아 υἱοθεσία hiothesia)는 ‘양자 됨 즉 양자의 자격’을 말합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하나님의 백성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제 그들은 장성하여 더 이상 후견인과 재산관리인 아래 있지 않는 아들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養子)가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유와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6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증거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드님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롬 8:9; 빌 1:19). ‘그분의 아드님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의 영이 아니고 그분의 신성의 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동시에 하나님의 아드님의 영,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요 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성신님께서 우리 속에 오신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된 사실입니다. ‘아바’ 혹은 ‘아빠’는 아람어로서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친근히 부르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7절.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기업을 상속받을 자입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아들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8-9절. 예수님을 믿는 성도가 또 다시 율법 아래 종노릇하는 것이 잘못임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것들(이방종교의 종교의식이나 도덕적 규례들)에 종노릇하였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아신 바가 되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무지하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 즉 율법으로 돌아가서 그것에게 종노릇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율법으로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에 대해 바로 안다면, 신약 성도가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율법주의는 명백히 잘못입니다. 신약 성도는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10-11절.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지키는 것은 율법주의의 실례들입니다. 깨끗하고 부정한 음식이나 할례에 대한 규례도 첨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의 의식법을 더 이상 지키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건져내어 자유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로 믿어 구원받게 한 일을 말합니다.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음이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음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율법주의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의 복음의 바른 사역이 헛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진리를 다시 상기시킴으로써 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지지 않게 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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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나와 같이 되라. 너희가 내게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너희가 알거니와 내가 처음에 육체의 연약함을 통해 너희에게 복음을 선포하였노라. 14 내 육체 안에 나를 시험하는 것이 있었으되 너희가 그것을 업신여기지 아니하고 거부하지도 아니하였으며 오히려 나를 하나님의 천사같이 곧 그리스도 예수님같이 받아들였도다. 15 그런데 너희가 말하던 그 복된 일이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으면 너희 눈이라도 빼어 내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의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를 열심히 사모하나 좋지 아니하니라. 참으로 그들은 너희가 자기들을 사모하게 하려고 너희를 떼어 놓으려 하는도다. 18 그러나 좋은 일로 열심히 사모함을 받는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뿐 아니라 언제라도 좋으니라. 19 나의 어린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께서 형성되실 때까지 내가 다시 너희를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겪노라. 20 내가 이제 너희와 함께 있어 내 목소리를 바꾸기 원하노니 나는 너희에 대하여 의심하노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중요하지만, 그 믿음을 지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마귀는 성도들의 믿음을 파괴시키고 변질시키려고 지금까지도 활동합니다. 처음에는 바울을 극진히 영접했던 갈라디아교회가 율법주의를 가르쳤던 거짓 교사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그 교회을 의심하면서 그들이 복음에 굳게 서기를 원했습니다.

12절.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다’는 말은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율법적 생활을 버리고 율법이 없는 이방인처럼 되었다는 말입니다. ‘너희도 나와 같이 되라’는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도 바울처럼 율법에 대해 자유하라는 뜻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도덕법을 지키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율법 제도로부터 자유하라는 뜻이며, 도덕법을 지킬 때에도 두렵고 무거운 마음으로가 아니고 기쁨과 자원함으로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않았다’는 말은 처음에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 해롭게 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전에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참으로 위했지만,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 진리에서 이탈함으로써 지금 바울에게 마음의 큰 고통을 주고 있습니다.

13-15절.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은 바울이 처음에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하려 했을 때 여러 가지 육체적인 핍박과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이곳 저곳을 이동하며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든지(고후 11:23-30), 혹은 그가 어떤 육체적 질병 때문에 갈라디아 지방에 머물게 되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너희를 시험하는 것’은 ‘육체의 약함’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그런 일들이 초신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버리셨거나 그를 징벌하시는 표처럼 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바울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멸시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가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그를 하나님의 천사처럼 혹은 그리스도 예수님처럼 영접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핍박하였지만, 하나님의 진실한 성도들은 그를 극진히 사랑하고 영접하였던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그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은 증거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종 바울에 대한 갈라디아 교인들의 그러한 태도가 변하고 있었습니다. 이전에 그들은 바울을 사랑하여 그를 위해 자신들의 눈까지도 빼어주려 하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16절. 사도와 갈라디아 교인들 간에 생긴 간격은 그가 그들에게 복음 진리를 전했다는 사실 때문에 생겼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복음 진리를 가감 없이 그대로 선포하고 가르쳤다는 사실이 그와 그들의 관계를 나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었습니다. 어떻게 진리의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 때문에 원수가 될 수 있는가요? 그러나 실상은 그들이 거짓 교사들의 말에 미혹되어 진리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았더라면 서로 원수 될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른 복음 진리 안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교회의 참된 일치와 연합은 성경 진리와 바른 교훈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17절. 거짓 교사들, 즉 율법주의자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뜨겁게 사랑하는 것 같았으나 그들의 그 열심은 좋은 열심이 아니고 나쁜 열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리 중심, 그리스도 중심의 열심이 아니고 인간 중심, 자기 중심의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봉사자들의 열심은 인간 중심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이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 중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복음 진리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사이비이단들도 열심히나 진리의 말씀 밖에 벗어나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떼어 놓으려 한다(이간 붙인다)’는 원어(엑클레이오 ekkleio)는 ‘분리시킨다’는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이 그들을 이간 붙인다는 말은 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시킨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열심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바울과 분리시키고 자기들에게 속하게 하기 위한 열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참된 종과 분리시키는 것은 마귀가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마귀의 일입니다.

18절. 성도들이 목회자의 기쁨이요 자랑임을 생각한다면, 목회자가 성도들을 사모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무도 그를 귀히 여기거나 필요한 인물로 아껴주지 않는 것보다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꼭 필요하고 요긴한 인물이 되고 진실한 성도들이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9절. ‘나의 어린 자녀들아’라는 원어(테크니아 무 tekna mou)는 매우 친근감 있는 호칭이라고 합니다. 보통 ‘자녀’라는 말(테크논 teknon)보다 이 말(테크니온 teknion)은 문자적으로는 ‘어린 자녀’를 가리키며 ‘사랑하는 자녀’라는 뉘앙스를 가집니다. 본 서신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형제들아’라고 불렀던(1:11; 3:15; 4:12, 28, 31; 5:11, 13; 6:1, 18) 바울은 오직 이 곳에서 그들을 ‘나의 어린 자녀들아[사랑하는 자녀들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그의 진심의 사랑을 나타낼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에서 떠나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복음 진리 위에 세우기 위해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구원하고 복음 진리 위에 바로 세우는 일은 자녀를 낳아 잘 기르는 일보다 더 수고로운 일입니다.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라는 말은 직역하면 ‘너희 속에 그리스도가 만들어지기까지’라는 말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만들어지도록 수고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도는 그리스도로 구원을 받았고 그리스도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그리스도로 영생을 얻었고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나의 생명입니다. 예수님 믿는 믿음이 없으면 나는 영원한 지옥에 던지울 죄인, 아무 가치가 없는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굳게 거하며 그리스도만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살아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20절. ‘목소리를 바꾸려 한다’는 것은 사랑과 위로의 음성을 책망의 음성으로 변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음성을 변하려 하는 까닭은 그들을 향해 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심하노라’는 원어(아포레오 ἀποροῦμαι aporoumai)는 ‘당황하다’는 뜻도 가집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진실히 믿었던 그들이 이토록 속히 변한 일 때문에, 또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게 된 것처럼 느껴지는 일 때문에, 또 마치 마귀의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보다 더 강하게 보이는 상황 때문에, 그들을 향해 의심이 생겼고 당황케 되어 그의 음성을 변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과거에 바울의 육체적 연약을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를 하나님의 천사나 그리스도 예수처럼 영접했었고 그를 위해 눈이라도 빼어줄 정도로 그를 사랑하였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강한 빛으로 인해 그는 평생 안질로 고생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에게 눈이라도 기증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과 바울 사이에 간격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율법주의에 빠진 거짓 교사들 때문에 생긴 간격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왜곡시켰고 바울과 그의 전한 복음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에 대해 의심과 당황함을 가지고 그의 음성을 변하려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교훈의 목표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고 그가 전한 복음대로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만들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만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인격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 안에 거하며 그분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그리스도로 충만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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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너희가 율법을 듣지 아니하느냐? 22 기록된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노예 여종에게서 났고 다른 하나는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느니라. 23 그러나 노예 여자에게서 난 자는 육체를 따라 태어났고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난 자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그것들은 풍유(allegory)니라. 이들은 두 언약인데 하나는 시내 산에서 나와 속박 당하게 하는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이요,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 해당하는 곳으로 자기 아이들과 더불어 속박 중에 있느니라. 26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로운 자니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 27 기록된바, 수태하지 못하는 자여, 너는 기뻐할지어다. 산고를 치르지 못하는 자여, 너는 소리 지르고 외칠지어다. 황폐한 자가 남편 있는 여자보다 더 많은 아이를 두느니라, 하였느니라. 28 형제들아, 이제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아이들이니라. 29 그러나 그때에 육체를 따라 태어난 자가 성령을 따라 태어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지금도 그러하도다. 30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기록이 무어라 말하느냐? 노예 여자와 그녀의 아들을 내쫓으라. 노예 여자의 아들은 자유로운 여자의 아들과 함께 상속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이처럼 우리는 노예 여자의 아이가 아니요 자유로운 자의 아이니라.


21-23절.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믿은 후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 곧 사탄의 미혹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예를 들어 복음에 속한 자와 율법의 속한 자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지요. 하나는 그의 아내 사라에게서 난 이삭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의 여종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입니다. 한 사람은 자유인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자손이 크게 번창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후 10년이 지날 때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자 아브라함은 그의 아내 사라의 제안으로 그의 여종 하갈을 취해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하신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라를 통해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게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얻은 후 14년이 지나 그의 나이 100세가 되었을 때,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아들이었다면,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얻은 아들이었습니다.

24-28절. 바울은 아브라함의 두 아들인 이스마엘과 이삭, 그리고 그의 여종 하갈과 그의 아내 사라를 풍유(allegory)로 사용합니다. 하갈과 사라를 두 언약과 같다고 합니다.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 곧 예루살렘과 같고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구약교회에 해당합니다. 다른 한편, 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표현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신약교회를 가리킵니다. 신약교회를 신자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복음을 통해 영혼들이 구원받고 또 구원받은 영혼들이 교회에서 양육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과 이삭의 차이는 오늘날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입니다. 유대교는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녀들에 불과하고, 기독교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아브라함의 영적 자녀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참 자녀들이요 복음의 자유를 가진 자유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성령 안에서 받은 의와 영원한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자유가 있습니다. 구약교회는 육신적 이스라엘을 교인들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자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교회는 복음 전도를 통해 구원받은 많은 자들, 곧 아브라함의 수많은 영적 자녀들, 약속의 자녀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우리가 바로 그런 자들입니다. 특히 25절에 있는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이요” 라고 되어 있는데 시내반도에 있는 가까 시내산은 가톨릭이 주장하는 것으로 역사적 근거가 희박합니다. AD 250년 경부터 지금의 카나리나 수도원(Saint Catherine’s Monastery)에 성 안토니오(AD 251-356, 사막의 교부)를 추종하던 수사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이곳에 있는 떨기나무가 모세가 부름을 받을 때 본 떨기나무(출 3:1-6)로 주장하고, AD 330년 비잔틴 제국 황후인 헬레나가 이곳에 마리아에게 봉한한 작은 성당을 짓게 했다는 것입니다. AD 331년 이곳에서 신약성경의 가장 오래된 사본인 시내산 사본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곳 근처에 있는 한 돌 산을 지정하여 시내산(호렙산)이라고 해서 돌계단을 3750개 만들어 고행하게 했습니다. 한국교회도 이곳이 15년 전까지 시내산 성지순례로 많이 다닌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966년-1982년까지 이 지역이 6일 전쟁 이후 이스라엘 영토였는데 200여명의 고고학자들이 조사를 해도 이 지역에서는 출애굽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히브리대학 고고학자들은 카트리나 수도원 근처에 시내산이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1989년 미국의 테네시 주에서 살던 남자 간호사인 론 와트(Ronald Eldon Wyatt, 1933-1999)가 오늘날 사우디 아라비아 미디안 지역에 있는 라오즈(Lawz)이 모세의 산(Jabal el Musa) 즉 호렙산임을 주장했습니다. 김승학 장로님은 사우디 아라비아에 취업되어 근무하던 중 북경 국제 침구 연구소에서 훈련받은 것으로 16년 동안 메카 주지사인 마지드 왕자의 주치의를 하면서 7년간 12차례 라오즈 산을 탐사하며 촬영한 사진들과 함께 탐사 기록을 2007년 <떨기나무> (두란노서원) 책을 출판하여 한국 교계에 알렸습니다. 바로 갈 4:25에 시내산이 아라비아에 있다고 기록한 바울서신이 결정적입니다(출 3:1). 감사하게도 코로나가 마무리 되면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이곳을 개방하여 성지순례를 허락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관광시설을 건축하며 준비하고 있답니다.

29-31절. 이스마엘과 이삭은 14살 가량의 차이가 났습니다. 어느날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습니다(창 21:9). 자기 아들을 희롱하는 것을 본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그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쫓으라고 요구하여 집안에서 추방합니다(창 21:11).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난 자이었고 이삭은 약속을 따라 난 자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이런 교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됩니다. 갈라디아교회 안에 있었던 율법주의 이단자들도 그런 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진실히 믿고 전파했던 바울과 성도들을 비난하고 핍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교회의 회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참 교회의 회중에서 제외되고 제명되어야 할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약교회의 성도들은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 곧 자유자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주제이며 이 서신이 증거하는 핵심적 진리입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음, 성경적 복음의 진수요 핵심입니다. 복음은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은 의가 죄인을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하고 참 평안과 기쁨을 줍니다.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모든 율법주의에서 해방받고 참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171장 “하나님의 독생자”를 부릅시다. 그리고 부활의 증인이 됩시다.


1.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날 위하여 오시었네
내 모든 죄 사하시려고 십자가 지셨으나 다시 사셨네
God sent His son, they called Him, Je-sus,
He came to love, heal and for-give;
He lived and died to buy my par-don,
An emp-ty grave is there to prove my Sav-ior lives.
<후렴>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두려움이 사라지네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의 기쁨 늘 충만하네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Be-cause I know He holds the fu-ture,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2. 주 안에서 거듭난 우리 기뻐하며 찬양하리

가슴 속에 넘치는 확신 우리의 가는 길에 소망 넘치네

3. 선한 싸움 다 마친 후에 우리 주님 뵈오리라

사망 권세 다 물리치고 주님이 다스리니 영광 넘치네


[오늘의 기도]

오늘 부활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갈라디아서 4장을 통하여 약속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신령한 복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오늘 주님과 더불어 함께 부활하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영안이 열려 부활의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보게 하옵소서. 살아계신 주님, 주의 참된 소망이 되셔서 모든 두려움, 근심, 걱정, 사라지게 하시고 저의 갈길을 인도하셔서 제 모든 삶의 기쁨이 늘 충만하게 하옵소서. 다시 사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___________
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1) 다시 사신 예수님 안에서 매일 매 순간 동행하게 하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예수님을 닮는 믿음, 소망, 사랑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4월5일(월) 찬송 159장(통 149장), 160장(통 150장) 마 28(주님 부활하심)

6일(화) 159장(통 149장), 160장(통 150장) 막 16장(부활의 주님)

7일(수) 161장(통 159장), 162장(통 151장) 눅 24장(엠마오의 주님)

8일(목) 161장(통 159장), 162장(통 151장) 요 20장(부활의 증인)

9일(금) 164장(통 154장), 165장(통 155장) 요 21장(내 양을 먹이라)

10일(토) 164장(통 154장), 165장(통 155장) 고전 15장(부활의 장)
-------------------
*겟세마네 신학교 봄학기: 매주 월요일 만 수업.

2021년 2월 15일 월. 오전10시~오후5시 [종강. 5월 10일 월]

4월 5일(월) 1~2교시 성경적 상징주의(류재이)

3~4교시 한국신학(유석근)

장소: 대전광역시 대덕구 우암로 396(비래동 52-1), 3층

연락처: 010-9113-1127, 010-4907-7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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