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무엘 목사:그리스도의 복음(15): “하나님의 영 안에 행하자” (갈5장) 2021년 4월 11일 주일

by wgma posted Apr 0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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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영 안에 행하자” (갈5장)

 2021년 4월 11일 주일




황금의 계절 4월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제목: 그리스도의 복음(15): “하나님의 영 안에 행하자” (갈5장)
Let us walk in the Spirit.

본문: 갈라디아서 5:1~26

요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 안에서 살면 또한 하나님의 영 안에서 걸을지니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갈 5:25~26)

주제: 주님께서 주신 자유안에 굳게 서서 하나님의 영 안에서 날마다 걸어가자

교독문: 134번(부활주일2), 예배의 부름: 눅 24:44]

찬송: 161장(통 159장), 162장(통 151장), 164장(통 154장)

일자: 2021년 4월 11일 주일 (부활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www.samuelyun.com

지난 한 주간 주님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왔습니까?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Jesus Christ was resurrected! The Lord is risen indeed!) 증거하며 남은 생애를 살아갑시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오후에 누가복음 24장에서는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들의 기사를 말하고 있습니다(눅 24:13-35, 막 16:12-13). 이들은 사도들이 아니고 제자들인데 부부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글로바(Cleopas, 눅 24:18)와 마리아(Mary, 요 19:25)입니다. 이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약 25리(11km, threescore furlongs) 되는데 오늘날 “엘 쿠베이베”(El-Qubeibeh)가 성경의 엠마오(뜻은 “작은 온천샘”)라고 여겨집니다.


①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눅 24:13-31)

이들이 오늘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와 두 사도가 주님의 무덤을 다녀온 이야기,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주님의 시신을 도난당했다고 생각하고 슬픈 분위기였습니다. 이때 부활의 주님께서 동행하셨지만 그들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평소의 모습과 다른 모습(변형)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실 때 두 제자들은 몇 일동안 있었던 일을 열심히 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파악하시고,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에 대해 전하셨습니다.(눅 24:26-27) 그들은 큰 은혜를 받고 엠마오에 도착했을 때 자기들의 가정에

주님을 초청하여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 풍조는 나그네를 위해 집주인이 식사 기도하며 축복을 하는데, 이들은 주님께 식사기도를 부탁하시매 주님께서 빵을 집으사 축복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그들의 눈이 열려 그들이 다시 사신 예수님을 알아보았으나 곧바로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주님의 몸은 영체이시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뿐이지 이 가정에 계셨습니다.

②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눅 24:32-35)

글로바와 아내는 서로 말하기를, “주님께서 길에서 우리와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 기록들을 열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는 바로 그 시각에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열한 제자와 또 그들과 함께한 자들이 같이 모여 말하기를, “주님께서 참으로 다시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는 것을 보고 엠마오에서 다시 돌아온 글로바와 아내가 길에서 이루어진 일들과 그분께서 자기 집에서 빵을 떼실 때에 자기들이 그분을 알게 된 일을 보고했습니다.

③ 예루살렘에서 부활의 주님을 다시 만남(눅 24:36-43)

이때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보이지 않게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들과 귀경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한가운데 서서 문안하시기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Shalom eleykem”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무서워하고 놀라며 자기들이 영을 본 줄로 생각하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염려하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고그들에게 자기 손과 발을 보이셨습니다. 그들이 기뻐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여기에 너희에게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그들이 구운 생선 한 토막과 꿀 한 조각을 드리매 주님께서 그것을 받으사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말들 곧 모세의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과 시편에 나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반드시 성취되어야 하리라 한 말들이 이것들이라,” 하시고 그때에 그들의 지각을 여사 그들이 성경 기록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김두완 작곡, 작사

1.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 주셨네.

2.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새 소망 주심을 믿사옵니다.

우리도 코로나로 절망과 슬픔, 공포와 불경기, 분열과 격리의 현장에서 방향을 바꾸어 부활과 예배, 소망과 기쁨이 있는 교회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은 갈라디아서 5장을 강해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 안에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성도의 삶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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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께서 자유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그러므로 그 자유 안에 굳게 서고 다시 속박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이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시리라. 3 내가 할례를 받은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온 율법을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 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율법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너희는 은혜에서 떨어져 나갔느니라. 5 이는 우리가 거룩한 영을 통해 믿음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기 때문이라 6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으되 오직 사랑으로 일하는 믿음뿐이기 때문이라. 7 너희가 잘 달렸는데 누가 너희를 막아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이렇게 설득하는 것은 너희를 부르시는 분에게서 나지 아니하느니라. 9 작은 누룩 하나가 온 덩어리를 뜨게 하느니라. 10 나는 주님을 통하여 너희에 대해 확신하되 너희가 조금도 다른 생각을 품지 아니할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는 자기의 심판을 담당하리라. 11 형제들아, 나 곧 내가 아직도 할례를 선포한다면 어찌하여 아직도 핍박을 받겠느냐? 그리하였더라면 십자가의 실족하게 하는 것이 그쳤으리라. 12 나는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아예 잘려 나가기를 원하노라.


1절. “그리스도께서 자유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Christ hath made us free” 갈라디아서는 기독교인의 자유의 대선언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갈 5:1절은 기독교의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 Libertatum = the Great Charter of Freedoms)라고 부릅니다. 마그나 카르타란 1215년 6월 15일에 영국의 존 왕이 귀족들의 강요에 의하여 왕에게 몇 가지 권리를 포기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선언하여 영국 민주주의의 시발점이 된 문서를 말합니다.그리스도인의 자유(liberty)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로, 곧 율법의 정죄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언한 것입니다. 롬 7:6 “우리를 붙들던 것 안에서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구출되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고 글자의 낡은 것 안에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요 8:32에도 “[하나님의 복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리라”고 했습니다. 죄로부터의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의요 구원이요 생명입니다. 율법과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습니다. 롬 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킹제임스 성경) 그러므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와 오늘 우리에게도 복음의 은혜와 자유 안에 굳게 서고 종의 멍에(the yoke of bondage)를 메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종의 멍에란 율법의 종으로서 짊어졌던 멍에를 가리킵니다. 구약시대 곧 율법 제도 아래 있는 자들은 율법의 공포, 율법의 정죄, 율법의 형벌이라는 무거운 멍에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代贖)으로 그 멍에를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2-4절. 갈라디아교회는 할례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로 만족할 것인가, 두 갈래 길에 서 있습니다.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 할 것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인가? 바울은 이 두 갈래 길에 서서 혼란스러워하는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거나 육체의 행위를 따라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하지 말고, 오직 복음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영을 따라 믿음으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율법 안에서’라는 원어(엔 노모 en nomo)는 ‘율법으로’라는 뜻인데, 할례를 받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는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할례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라, 할례가 옛 언약의 표이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은 율법을 통해 맺어졌습니다. 율법의 요구 조건은 ‘하나님의 모든 법들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살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영원한 저주 아래 있음을 의미합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율법 아래 속하여 율법을 다 지키겠다는 결심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않고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가 될 것입니다.

5-6절.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the Spirit)으로’라는 말은 ‘육체로’라는 말과 대조되고, 또 ‘믿음을 좇아’라는 말은 ‘행위를 따라’라는 말과 대조됩니다. ‘의의 소망’이란 ‘의에 근거한 소망’이라는 뜻입니다. 죄는 죽음과 지옥 형벌을 가져왔지만, 의는 영생과 천국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것이 의의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사심으로 우리에게 의가 되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의롭다 하심을 얻고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도 무할례도 중요하지 않고(in Jesus Christ neither circumcision availeth any thing, nor uncircumcision) 오직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faith which worketh by love)이 중요합니다. 할례는 비본질문제라는 것입니다. 고전 7:19 “할례가 아무것도 아니요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Circumcision is nothing, and uncircumcision is nothing, 오직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뿐이니라.” 또한 갈 6:15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효력이 없고 in Jesus Christ neither circumcision availeth any thing, nor uncircumcision; 새로운 창조물만 있느니라.” 이 세 구절에서 할례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헬라어로 아디아포라(a-diaphora) 즉 “본질이 아님” (no matter, it does not matter)입니다. 본질은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7-9절. 갈라디아 교인들은 복음을 받은 후 신앙생활을 잘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 선생들 때문에 복음 진리를 거역하는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복음 진리와 반대되는 권면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권면은 성경 말씀으로 분별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권면은 ‘누룩’과 같습니다. 비록 그 오류가 작게 보일지라도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듯이 잘못된 권면은 온 교회를 부패시키고 변질시킵니다. 작은 오류가 점차 큰 오류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 들어온 작은 오류를 작게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10절. “나는 주님을 통하여 너희에 대해 확신하되 너희가 조금도 다른 생각을 품지 아니할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희를 어지럽히는 자는 자기의 심판을 담당하리라.” 비록 큰 오류가 갈라디아교회 안에 들어왔고 심각한 탈선이 일어났지만, 바울은 사랑하는 교인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 확신합니다. ‘다른 마음’은 복음 진리와 배치되는 생각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고 하셨습니다(요 10:27). 갈라디아 교인들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라면, 그들은 바울이 다시 강조하는 바른 복음 진리의 교훈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요동케 한 자들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11-12절. 바울은 할례를 전하지 않고 오직 바른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습니다. 만일 그가 할례를 전했더라면,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핍박 때문에 진리를 변질시키거나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진리에 관한 한, 바울은 비타협적입니다. 이만큼 이 문제는 중요합니다. 곡식과 가라지는 분명히 구별되어져야 합니다.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온 거짓 교사들은 참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끊어져야 할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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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형제들아, 너희가 부르심을 받아 자유에 이르렀으나 오직 자유를 육신을 위한 기회로 쓰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를 섬기라. 14 이는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기 때문이라. 15 그러나 만일 너희가 서로 물고 삼킬진대 너희가 서로에게 소멸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3-14절. 그리스도인은 자유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복음 안에서 이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신 것을 말합니다. 율법으로부터의 이 자유가 갈라디아서의 중심 주제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는 의를 행하고 선을 행하라고 주신 자유이지, 결코 육체의 기회를 삼으라고 주신 자유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이 자유를 죄를 짓는 일에 쓰거나 자기 뜻대로 사는 데 써서는 결코 안 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고 합니다(롬 6:12-13).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은 상대방이 나의 주인이요 나는 그의 종인 것처럼 서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서로 섬겨야 하는 까닭은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요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요약됩니다(마 22:37-40). 사랑은 이웃을 섬기는 행위로 나타납니다. 주님의 비유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나 죽게 된 사람을 최선을 다해 도왔고 섬겼습니다(눅 10:33-35). 예수께서도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십니다(마 20:28, 막 10:45).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며(고전 13:5),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요 15:13).

15절. ‘서로 물고 삼키다’는 것은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을 말합니다. 남을 비난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데서 나옵니다. 미움은 마음의 살인과 같습니다. 서로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서로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피차 멸망하는 길입니다. 그것은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국가에서도, 또 온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2:25).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은 우리가 서로 헐뜯고 비난한다면 그 자유를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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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그런즉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하나님의 영 안에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육신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이는 육신은 하나님의 영을 대적하여 욕심을 부리고 하나님의 영은 육신을 대적하나니 이 둘이 서로 반대가 되므로 너희가 원하는 것들을 너희가 능히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18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니라.


16절.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는 하나님의 영(the Spirit)을 좇아 행함으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영을 좇아’라는 원어(프뉴마티 pneumati)는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라는 뜻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성화는 인간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물론 성도는 영적으로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노력할 수 있고 또 노력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화는 성도가 하나님의 영을 좇아,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행할 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롬 8:13-14도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하나님의 영(the Spirit)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거룩한 영의 도우심으로 의를 행하게 된다는 것은 이미 구약성경에 예언된 바입니다. 겔 36:24-28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故土)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7절. 구원받은 성도의 속에는 육체의 소욕과 하나님의 영의 욕심의 대립과 싸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성도가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가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받는다면, 그는 육체의 욕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싸움은 단순히 영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성도의 싸움은 인간 본성의 타고난 죄악성과 하나님의 영의 싸움입니다. 본문에 ‘육체’라는 원어(사르크스 sarx)는 단순히 ‘몸’(소마 soma)을 가리키지 않고 ‘본성의 죄악성을 가진 몸’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싸움은 죄성과의 싸움입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도 두 개의 대립되는 원리가 있습니다. 육신의 남은 죄성과 혼의 새로워진 성향이 그 두 원리입니다. 후자를, 바울은 롬 7장에서 ‘속사람,’ ‘마음의 법,’ ‘마음’(누스 nous) [생각]이라고 표현합니다(22, 23, 25절). 그러나 중생한 자는 새 마음, 새 성향만으로는 성화가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롬 7:24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하였던 것입니다(24절). 성도는 하나님의 영을 좇아 행함으로 육신의 부패성을 극복해 나갑니다.

18절. 성도가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아 산다면, 그는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원받은 후의 성도의 죄 문제에 대하여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이라는 말씀은 구원받은 자를 말합니다. 롬 8:14도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의 영을 받았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받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말씀은 율법 제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율법 제도 아래서는, 사람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한마디로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것입니다. 구약 아래서 사람들은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여 죄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줄 뿐, 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암시된 메시아께서 오셔서 친히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율법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영께서 죄인들로 하여금 이 복음을 믿고 구원받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신 바가 되면 그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이 의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의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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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제 육신의 행위들은 명백하니 이것들이라. 곧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과 20 우상 숭배와 마술과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21 시기와 살인과 술 취함과 흥청댐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내가 또한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 같이 이것들에 대하여 미리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런 것들을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19절. ‘육신의 행위’ 즉 죄악된 행위들은 분명합니다. 첫 번째 부류는 음란입니이다. 킹제임스 번역의 대본인 전통사본에는 ‘음행’ 앞에 ‘간음’이라는 말이 하나 더 들어 있습니다. “간음과 음행과 부정함과 색욕.” 이것들은 모두 다 성적인 죄악들입니다. 세상의 많은 죄악들 중에 가장 대표적이고 두드러진 죄악이 음란입니다. 음란은 부부관계를 벗어난 모든 육체적 관계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성(性)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은 부부관계에서만 사용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육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악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음란의 죄악입니다. 유황불 심판을 받았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은 매우 음란했습니다. 그들의 음란은 동성애라는 변태적 행위로 나타났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 전에 그곳의 원주민들은 매우 음란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근친상간적인 음행이 있었고, 동성간의 음행이 있었고 짐승과의 음행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가증한 행위들을 인하여 그 땅의 사람들을 진노하시고 이스라엘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해 그들을 진멸하셨습니다. 현대 사회는 매춘, 불륜이 보편화되는 매우 음란한 시대입니다. 또 컴퓨터와 인터넷 문명은 음란을 더욱 부추킵니다. 음란에 대한 최선의 대책은 건강한 결혼입니다. 고전 7:2-5에서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거절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또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은 성적 자극이나 시험에 떨어지지 않도록 그런 환경을 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입니다.

20-21절. 육체의 일의 두 번째 부류는 우상숭배입니다. “우상숭배와 마술”은 더 근원적 죄악이지만, 음란보다 더 드러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상’은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나 유교 문화의 전통에는 우상숭배적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교에서 유래되었을 제사와 차례의 조상숭배 행위는 부모 공경과는 실제로 관계가 없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해야 하는 것이지 돌아가신 후에는 할 수 없습니다. 장례식 때 고인의 사진이나 시신 앞에 절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절은 인격자 앞에 하는 것이지 돌아가신 부모님이나 죽은 자 앞에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더욱이, 제사와 절은 후손들이 조상신에게 화를 받지 않고 복을 받고자 예법과 정성을 갖추는 행위이기 때문에 분명히 우상숭배적이다. 미신 혹은 샤머니즘도 잡신 숭배 곧 우상숭배입니다. 전통 문화나 민속 문화 속에는 이런 요소들이 많습니다. 결혼이나 취직이나 승진을 앞두고 점이나 궁합 혹은 사주팔자를 보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거짓된 신비주의도 일종의 잡신 숭배입니다. 가톨릭의 마리아 숭배도 우상숭배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중보자,’ ‘보혜사,’ ‘하늘의 여왕’으로 부르며 그녀에게 기도하며 그녀를 경모하며 의지하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입니다.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의 포스트를 걸어놓는 것도 우상숭배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대신 하나님처럼 가치 있게 여기고 삶의 목표로 삼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우상입니다.

육체의 일의 세 번째 부류는 싸움입니다. “증오와 불화와 경쟁과 진노와 다툼과 폭동과 이단 파당과 시기와 살인” 이 악들은 다 이웃을 미워하는 데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반대됩니다. 물론, 정당한 싸움, 선한 싸움, 진리의 싸움이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엘리야는 850명의 거짓 대언자들과 싸워야 했고, 미가야는 400여명의 거짓 대언자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신약시대에 바울은 많은 사람의 버림을 당하면서도 진리를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의와 진리를 위한 싸움은 우리가 치루어야 할 선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그런 싸움 말고 육신의 죄악성에서 나오는 싸움이 있습니다. 남을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혹은 자기 명예나 세상 권력이나 물질적 이익 때문에 하는 싸움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 싸움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웃을 향해 분노를 품고 파당을 만들어 그를 해칩니다. 친밀한 교제와 파당은 다릅니다. 우리는 성도들 간의 참된 친밀한 교제는 나누어야 하지만, 파를 만들고 사조직을 만드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육체의 일의 네 번째 부류는 술취함입니다.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알코홀 중독은 사람을 방탕에 빠뜨립니다. 마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술취함이나 마약은 사람에게서 바른 정신을 빼앗아 가고 사람을 비현실적 환각 상태에 빠뜨리고 사람으로 하여금 책임 있는 인격자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성경 시대에는 술이 어느 정도 허용되었지만, 성경은 완전 금주(禁酒)를 교훈합니다. 술취함은 천국 갈 수 없는 큰 죄악입니다. 술이 가져오는 폐해들이 큽니다. 술은 몸에 해롭고 경제적 낭비가 크고 또 살인, 강간, 교통사고 등의 사회적 해악도 큽니다. 그래서 서대문 유치장의 벽에 혈서로 “술은 악마의 피”라고 쓰여진 때가 있었습니다. 잠 23:21에 “술주정뱅이나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게 되며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는 누더기를 입으리로다.”고 경고합니다. 술은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습니다. “너는 포도주가 붉거나 잔에서 제 빛깔을 내거나 스스로 똑바로 움직일 때에 그것을 바라보지 말라. 마침내 그것이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쏘나니” (잠 23:31-32) 술 중독이나 마약 중독에서 해방되는 길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면 됩니다. “술 취하지 말라. 거기에는 과도함이 있나니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라 be filled with the Spirit” (엡 5:18)

이상과 같이 육체의 죄악 18가지(음란과 우상숭배와 원수 맺음과 술취함)를 행하는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합니다. 천국에 못 들어가면 지옥밖에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들을 지은 자들은 다 회개해야 하여야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이 이런 죄들을 회개치 않으면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 구원받은 성도는 이런 일을 행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일곱 번 넘어졌을지라도 또 다시 일어나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성도가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이런 육신의 죄악된 일들을 모두 다 과감히 버려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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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부드러움과 선함과 믿음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대적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 안에서 살면 또한 하나님의 영 안에서 걸을지니 26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시기하지 말지니라.

If we live in the Spirit, let us also walk in the Spirit.


22-23절. 하나님의 영(the Spirit)안에서 맺어지는 열매를 적어도 아홉 개 열거합니다. ‘열매’라는 원어(카르포스 karpos)는 단수명사로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아홉 가지 열매가 한 열매로, 여러 면으로 나타나는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열매는 분리된 것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하심을 받는 바른 신앙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한 열매의 요소들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열매는 ‘사랑Agape’입니다. 사랑은 최고의 덕입니다. 천국은 사랑의 세계입니다. 거기에는 미움이 전혀 없고 사랑만 충만합니다.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을 다 포함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첫 번째 명령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신 6:5), 또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은 가족 사랑, 교인들 간의 사랑,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두 번째 열매는 ‘기쁨’입니다. 성도가 들어갈 미래의 천국은 기쁨이 넘친 세계일 것이지만(롬 14:17), 범죄함으로 저주받은 세상은 슬픔과 근심 걱정이 많은 곳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기뻐해야 할 이유를 발견했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게 됩니다. 기뻐하는 삶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빌 4:4; 살전 5:16).

하나님의 영의 세 번째 열매는 ‘화평’입니다. 화평은 마음의 평안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에게 편히 쉼을 주십니다(마 11:2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평안을 누립니다. 화평은 또 다른 사람들과의 화목을 포함합니다. 서로 다투고 원수를 맺는 것은 죄악된 일입니다(갈 5:20). 하나님의 영을 따라 사는 성도는 남과 싸울 것이 없고 원수를 맺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네 번째 열매는 ‘오래 참음’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조급하지 말아야 하고 쉽게 분노하거나 또 쉽게 낙망해서도 안 됩니다. 모든 일은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 때를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려운 일들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온전한 인격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다섯 번째 열매는 ‘자비’이다. ‘자비’라는 ‘친절함’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가지시는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가리키는 말로 자주 사용됩니다(롬 2:4; 11:22; 엡 2:7). 하나님의 영께서는 우리를 감동하셔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향해 친절한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의 여섯 번째 열매는 ‘양선(良善)’입니다. 양선은 선한 마음입니다. 악은 남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에게 물질적 손실을 끼치거나 남을 비난하고 그의 명예를 손상시킴으로 정신적 피해를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양선은 남을 위하고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남에게 유익을 주고 교회에 덕을 세우는 언행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의 일곱 번째 열매는 ‘충성’입니다. ‘충성’이라는 원어(피스티스 pistis)는 ‘믿음’이라는 단어입니다. 충성은 믿음이 충만하여 믿을 만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에 인도 받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며 충성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믿을 만하지 못한 자는 쓸모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영안에 사는 성도는 믿음의 인격 또 믿을 만하고 충성된 인격의 소유자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여덟 번째 열매는 ‘온유’입니다. ‘온유’라는 원어(프라오테스 praotes)는 ‘온유, 겸손, 예절’ 등의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품성입니다(마 11:29). 교만은 온유와 반대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려면 온유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낮추시고 부드럽게 하셔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와 같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3).

하나님의 영의 아홉 번째 열매는 ‘절제temperance’입니다. 절제는 우리의 삶의 여러 면에 관계됩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술이나 오락에 적용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감정이나 시간과 물질 사용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욕구나 즐거움은 죄가 아니지만, 과도하게 추구하거나 거기에 빠지는 것은 나쁩니다. 잠 16:32는 “노하기를 더디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용사보다 낫다”고 합니다.

23절 끝에,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는 말은 “이 같은 것을 율법이 거스르지 못하느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의 열매는 율법에 반대되지 않고 오히려 일치됩니다. 하나님의 영의 열매는 실상 율법의 성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따라 행함으로 율법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롬 8:4는, “육신을 좇지 않고 하나님의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합니다.

24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란 구원받은 성도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을 받은 자들이며 그에게 속하고 그와 연합된 자들입니다. 그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여기에 ‘육체’라는 말은 타고난 죄악된 본성을 가리킵니다. ‘정과 욕심’은 죄악된 감정과 욕심을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 우리의 죄악된 감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는가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 그렇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5-26절은 오늘의 결론의 말씀입니다.

25절. ‘하나님의 영(the Spirit)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아 중생(重生)하여 새 생명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며 또 하나님으 영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 영으로 새 생명을 얻었을진대,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행해야 합니다.

26절. 헛된 영광은 세상 영광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부귀, 권세, 명예, 쾌락 등을 가리킵니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것들은 영원하신 영광의 하나님과 그가 약속하신 영광의 천국과 비교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단지 얼마 동안만 누리는 헛된 것들입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이 죄악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탐하여 남을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또 속입니다.

하나님의 영안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영의 열매를 맺어가시는 모든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이 좋은 부활의 계절에 하나님의 영으로 살게 하시며 모든 육체적인 소욕과 욕심, 죄악들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하옵소서. 더 가지려는 욕심,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교만, 더 유명해지려고 하는 유혹으로부터 자유함 받게 하옵소서. 거짓과 허위와 소문과 인기로부터 자유함 받게 하옵소서. 온전히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 받아 자유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___________
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1) 다시 사신 예수님 안에서 매일 매 순간 동행하게 하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예수님을 닮는 믿음, 소망, 사랑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4월12일(월) 찬송 166장(통 156장), 167장(통 157장) 시 73편(주께 가까이함)

13일(화) 166장(통 156장), 167장(통 157장) 시 74편(나의 왕이시라)

14일(수) 168장(통 158장), 170장(통 16장) 시 75편(감사의 이유)

15일(목) 168장(통 158장), 170장(통 16장) 시 76편(찬송의 이유)

16일(금) 171장(통 없음), 615장(통 없음) 시 77편(주님을 찾음)

17일(토) 171장(통 없음), 615장(통 없음) 시 78편(소망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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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신학교 봄학기: 매주 월요일 만 수업.

2021년 2월 15일 월. 오전10시~오후5시 [종강. 5월 10일 월]

4월 12일(월) 1~2교시 복음적인 조직신학(윤사무엘)

3~4교시 복음신학(송인성)

장소: 대전광역시 대덕구 우암로 396(비래동 52-1), 3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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