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독교 선교역사※※
※일본 기독교 역사의 두 줄기는 로마 가톨릭과 기독교 선교역사이다.
1) 가톨릭 선교역사
일본이 천주교를 처음 접하게 된 때는 1549년 8월 15일 중국에서 선교하든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소속 하비에르(Xavier1505~1552) 선교사 일행이 규슈 남단 가고시마를 찾음으로 이다.
그는 가고사마 영주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를 찾아 인사를 드리고 성모자(아기 예수 안고 있는 마리아) 성화를 드렸더니 마리아의 아름다움에 영주와 그 어머니가 감탄했다고 한다.
호감을 가진 영주는 하비에르에게 선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그들이 살 집을 마련해주어서 그곳에 천주교가 자리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하비에르는 일본에 2년 3개월가량 머물면서 가고시마, 히라도, 야마구찌 지방에 신자들이 생겨났다. 그가 떠난 뒤에도 신자가 계속 늘어 1556년 경엔 2천 명이 넘는 신자가 생겨났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기독교를 기리시단(Kirishitan,キリシタン 切支丹)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기독교란 포르투갈어 끄리스떵(cristão)의 발음(音借)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은 크리스천(クリスチャン)이라고 부른다.
※500년 전 가톨릭이 일본에 들어올 때는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는 전국 시대로 각 지방의 다이묘(영주)들은 세력을 키우며 경쟁하고 있을 때였다.
이때 처음 포르투갈 상인들을 대한 다이묘들은 서양 상품과 조총에 큰 관심을 가졌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무역을 하면서 함께 포교활동도 하였는데, 마침 유력한 다이묘들이 무역과 포교활동을 허락하면서 천주 교당도 지어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처음 천주교는 사회의 빈민과 천민들이 받아들였으나, 시간이 가면서 유력한 다이묘들도 개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영지의 다이묘(영주)가 개종하면, 영지의 백성들도 따라서 개종하므로 천주교인 수는 늘어나게 되었다.
※※쇼군(しょうぐん, 將軍)과 천주교※※
※그때 일본의 정치제도는 실권이 없는 왕은 상징적인 국가수반이며, 국정 최고 권력자, 통치자는 쇼군이다. 쇼군은 대장군의 줄인 말이다.
※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1573년 오다 노부나가는 천주교 다이묘들의 지원으로 일본 전국을 통일 하게 되자, 그는 천주교를 불교에 대항할 세력으로 보호하려고 교토(그때 수도)에 교당도 짓고 신학교도 세우도록 지원하였다.
이제 일본은 천주교를 믿는 영지와 불교 영지와 갈등하면서 무력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불교.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보내 교토 불교의 본산지를 초토화 했다.
정치적으로 천주교를 잘 보호해 주던 쇼군 ‘오다 노부나가’가 1582년 부하에게 살해당하자, 천주교에 고난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였다.
※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7~1598)※
오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서 너그러 웠다.
그러나 도요토미(豊臣)가 천주교를 탄압하게 된 데는, 스페인이 식민지 확장을 위해 먼저 선교사를 파견하여 현지인들의 환심을 얻은 후에 군대를 보내 식민지로 삼는다는 이야기를 들은데 있다고 전해진다.
1597년 2월에 외국인 26명의 천주교인을 나가사키에서 처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많은 천주교인이 순교를 당하면서 탄압을 받게 된다.
※바테렌(사제)(伴天連追放令)※
※1587년 6월 1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주교 사제들에게 추방령을 내린 사건이다.
그리고 모든 사제들에게 20일 내로 일본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탄압은 주로 외국인들에게 편중되면서 내국인에게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아서 어느 정도 고난은 있었지만, 견디고 넘어갈 만하였다..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 규수 지방의 천주교 다이묘들을 모두 임진왜란에 동원하였는데, 조선 침략의 선봉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독실한 천주교 다이묘였으며 그의 휘하 병사들도 대부분 천주교인이었다
※쇼군 도꾸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 1543-1616)※
※1598년 도요토미가 죽자, 도꾸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막부의 중심을 교토에서 에도(도쿄)로 옮겨 막부 정권을 수립하면서 전국시대가 끝난다. 그리고 천주교를 맹렬히 핍박하기 시작한다.
※금교 령(禁敎令)※
※1614년 1월 27일 도쿠가와는 전국적으로 천주교를 믿지 말라는 금교 령을 내렸다.
도쿠가와는 정토종 불교로 평소에 천주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불교와 유학자 세력의 부추김이 더해져서 서양 종교 탄압과 외국인을 추방하면서 쇄국 정책을 폈다.
전국의 성당들을 파괴하고 배교하지 않는 선교사나 다이묘들은 필립핀으로 추방하였다. 이때부터 천주교도들에 대한 탄압은 아주 조직적이고 구체적 이었다.
※천주교의 뿌리를 뽑기 위해서 배교하도록 회유하는 고문 방법은 잔인하다.
※1. 오인조(五人組) 감시 체체※
조직적으로 교인들을 찾아내기 위해 마을마다 오 인조(五人組)(五人組) 조직을 만들어 서로 감시케 했다.
※2. 현상금※
천주교인을 고발하는 자에게와 외국인 사제 신고자에게는 더 많은 현상 금을 주었다.
※3. 후미에(踏繪) 제도※
※배교의 표시로 예수의 초상화를 밟고 지나가게 하는 후미에(踏繪) 제도도 만들었다. 그래도 의심스러우면 예수상이 달린 십자가에 침을 뱉게 하고, 성모 마리아를 창녀라고 크게 말하도록 강요했다.
※4. 잔인한 고문과 사형 방법 화형※
1) 인두로 낙인을 찍고, 톱으로 사지를 자르고, 뜨거운 온천물을 몸에 끼얹는 고문
2) 화형, 참수형
3) 갯벌에 세운 십자가에 묶어놓아 밀물 때 바닷물에 잠겨 죽게 했다.
4) 수장-산채로 가마니로 말아 묶어 바다에 던져서 죽게 했다..
5) 아나츠루시 고문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으로 밧줄로 몸을 감아 거꾸로 매달아 이마나 관자 놀이의 정맥에 작은 구멍을 내어 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게 하여 천천히 죽게 했다.
며칠 동안 죽지도 못하고 당하는 고통으로 선교사들 마저 신앙을 버리게 만들었다. 배교하지 않으면 죽는 길 밖에 없었다. 이런 천인공노할 잔인한 학살로 250년 동안 약 20~3020~30만 명의 천주교도들이 순교했다.
※엔도 슈샤쿠의‘수난’이란 소설에 당시의 처형 장면이 많이 묘사되어 있다.
※Silence(침묵) 영화--일본 초기 천주교도들의 핍박을 다룬 영화로 유튜브 로 볼 수 있다.
※카쿠레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
금교 령을 통해서 탄압은 상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천주교도들은 지하에 숨는다. 규수의 여러 섬 지방에 숨어서 끈질기게 믿음을 지키며 지낸다.
250년이 지나는 동안 그 땅에서 천주교도들의 씨가 말리는 듯하였지만, 에도막부가 미국에 의해 강제로 개항하게 되고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1973년 새 정부 메이지 6년에 금교령이 폐지되면서 기나긴 고난의 은둔 생활이 끝났다. 1865년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환난과 핍박을 피하여 숨어서 산 교도들이 22만여 명이나 되는데, 이들을 카쿠레(은둔) 기리시탄(隠れ キリシタン)이라고(은둔)기리시탄(隠れキリシタン)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살던 마을은 성지로 그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은 성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2. 기독교 선교역사※
※기독교의 선교는 미일 화친조약이 맺어진 이후에 시작되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惟新)으로 막부 정부가 끝나고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 통치가 시작되었다.
1854년 미국의 위협적인 압력으로 미일 화친조약을 맺음으로 개항하게 된다.
요코하마가 외국인 중심 거류지였으므로 외국에서 오는 모든 사람이 여기로 모여들었다.
그때는 아직 외국인 선교가 금지되어 있어서 미국 선교사들은 자국민들을 목회하면서 의료와 교육 사업으로 일본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만나고 있었다.
※제임스 헵번(James C. Hepburn,1815~1911) 미국 개혁교회 의료 선교사※
※일본에 온 첫 번째 의료선교사로 진료소를 내어 일본사람들을 치료하면서 교육기관도 세워 영어와 신학문을 가르치니 일본 사람들이 우러러보았다.
그가 세운 헵번 숙(塾,(塾, 학교)은 나중에 명치 대학이 되었다. 그는 또 성서 번역 위원회를 만들어 1888년 일본어 신구약 성경을 펴내는 큰 업적을 남겼다.
※일본의 첫 교회※
※1861년 온 미국 개혁교회 소속 바라 선교사도 바라 숙을 세워 청소년 들을 가르쳤다. 학생들 가운데 9명이 회심하자 이들을 중심으로 요코하마 카이칸 교회를 세우니, 일본의 첫 교회이다.
※일본 정부의 종교 신앙 자유화 선포※
1873년 일본 정부의 신앙의 자유화로 기독교 일본 선교가 활성화되면서, 한국의 기독교 선교의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R. S. McClay 선교사와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일본의 신앙 자유와 함께 중국에서 선교하던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 (R.S.McClay, 1824~1907)가 1983년 일본으로 와서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874년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자유주의 신학 계열의 김재준, 송창근, 김정준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이 맥클레이 선교사는 조선의 선교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이 계속 선교의 문호를 닫고 있을 때 개화파인 김옥균의 협력을 얻어 1884년 6월 27일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을 만나 외국인들이 병원과 학교 사업을 할 수 있는 허락을 받음으로 1884년 9월 20일 의사 알렌이 조선의 첫 선교사로 오는 길을 열었다.
※※도시샤 영 학교(同志社英學校,)※
※1875년 교토에 도시샤 영 학교를 설립한 니지마 조(1853~1890)는 일본 사람으로 원래 하급 무사의 아들로 무신정권이 몰락하자 새로운 희망을 찾아 서구 문물을 배우기 위해 1864년 미국으로 밀항하였다.
미국에서 학교에 다니며 교회 생활을 통해 그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아모스트 대학과 연이어 청교도 정신에 철저한 안도바 신학교를 졸업하고 1874년 회중 교회 선교사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본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독교 대학을 설립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교토에 도시샤 영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설립되자마자 많은 학생이 모여들었다.
도시샤에서 신학 수업을 받고 졸업을 하여 전도자의 길을 나서게 되었는데 그들은 니지마(新島)를 중심으로 일본 조합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어 일본 기독교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샤대학은 조선의 많은 젊은이도 수학한 곳으로 서울여대 설립자 겸 초대 총장인 고황경, 정지용 시인,*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유명한 민족 시인 윤동주도 이곳에서 수학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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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로마가톨릭의 역사※※
아래는 일본 로마가톨릭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다.
일본 기독교인들이 사용한 책
나가사키에서 죽은 26명의 순교자 기념비
※로마 가톨릭의 상륙편집※
※일본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들어온 시기는 1549년이며, 예수회 선교사이자 바스크 출신의 에스파냐 사람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들여왔다.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하비에르는 ‘무슬림과 유대인이 없는 일본은 선교 활동을 하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으며,
1548년에는 ‘야지로’라는 당시 35세의 청년 부시(무사)를 만나게 된다. 막부 시대 당시 일본에서는 자국인의 외국 출입을 제한했기 때문에 야지로는 국가에서 무역을 허락했다는 증서를 소유한 무역선인 슈인선(赤印船)을 타고 인도에 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비에르와의 만남으로 로마 가톨릭교회 신앙과 에스파냐 말에 능숙해진 야지로는 1549년 일본에 귀국하자 선교사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이때 하비에르는 다이묘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전도하였으며, 세례성사를 집전하느라 팔이 아플 정도로 많은 신자를 얻게 된다.
그 자신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영지에서는 다이묘의 영향으로 영지 내 주민이 모두 로마 가톨릭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이묘들이 로마 가톨릭교회를 묵인한 진짜 이유는 로마 가톨릭교회나 기독교인들이 믿는 예수에 대해서 호감을 가져서가 아니라, 학식이 풍부한 예수회 선교사를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는 통로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 중 일본 제국주의 욕심을 촉발시킨 서양 발명품인 총기에 관심이 많았다
※기독교 탄압 시기※
※기리시단들에 대한 탄압때문에 불교의 예불로 위장한 미사를 드리고 있다. 하지만 교회에 대한 환영은 잠시 동안이었고, 바오로 미키를 위시한 26명의 순교자가 나가사키에서 발생하는 등 탄압의 길을 걷게 되었다.
물론 조선인 기리시단도 탄압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에서 온 상인들이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식민주의 세력이라고 선동했고,시마바라의 난(1637년)이후 카톨릭교는 일본의 국가 체제에 전면 배치되는 위험한 체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은 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 이외의 로마 가톨릭 국가와는 거래하지 않았으며, 가톨릭 신자들은 ‘기리시단들은 사회 기강을 흐리므로 금한다.’라는 내용의 〈기리시단 금지령〉 발표[1](1612년), 청동으로 만든 예수의 성화를 밟게 하는 후미에 실시, 로마 가톨릭에서 성인으로 공경하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모독 강요 등의 탄압을 받자, 불교 예불로 가장한 로마 가톨릭미사를 드리거나, 이불(異佛)이라고 불리는 불상을 가장한 성모 마리아의 성상을 사용하면서 몰래 신앙 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수난사는 그 자신이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엔도 슈사쿠의 신앙소설 《침묵》과 《여자의 일생》에 잘 언급되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편집※※
※십자가를 숨긴 불상. 일본의 기독교인들은 탄압때문에 자신들의 신앙을 숨겨야만 하였다.
세월이 흘러 이들 가쿠레다 기리시단들은 1857년 강제 개항된 일본에 입국한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신부 앞에서 자신들이 로마 가톨릭 신자임을 밝혔으며, 탄압으로 소멸된 줄 알았던 일본의 기독교 신자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은 세계 기독교계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이 가쿠레다 기리시단이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얻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메이지 유신 정부는 신토 이외의 종교(불교, 기독교)를 금했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는 일본 천황을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천황 숭배에 반대 하였고, 이성교제를 하는 등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천황주의자로부터 공개적으로 반대받고 배척받았다.
PS,라는 이름으로 프로테스탄트의 문서회손이 발생되었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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