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2021년 10월 24일 주일 )
”(고전14장) “대언과 방언의 은사"
제목: 그리스도의 복음(43): “대언과 방언의 은사”(고전14장)
The Gift of Prophecy and Tongues
본문: 고전 14:1~40
요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대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 14:1)
주제: 대언의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니 방언보다는 대언을 힘쓰자
교독문: 22번(시 37편), 예배의 부름: 고전 13:13
찬송: 615장(통 없음), 199장(통 427장), 585장(384장)
일자: 2021년 10월 24일 주일 (성신강림절 후 스물 두번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이번 달 10월은 개혁의 달로 지내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은 교회개혁 주일입니다. 교회의 본질인 복음, 그리스도, 믿음, 말씀, 은혜로 회복되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으로 개혁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1-2) 말씀에 의하여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 a living holy acceptable sacrifice”로 거듭납시다. 오늘은 고린도전서 14장을 통해 “성령의 은사”를 계속 묵상합니다. 고전 12장에서는 여러 가지 은사들에 대해, 13장에서는 최고의 은사인 사랑(아가페)에 대해, 14장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넘어 대언의 은사를 받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 사랑을 따르고 영적 선물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너희는 대언하는 것을 사모하라. (2) 이는 알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가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하느니라. (3) 그러나 대언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나니 (4) 알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나 대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느니라. (5) 나는 너희가 다 타언어[방언]들로 말하기를 원하되 차라리 대언하기를 원하노니 이는 타언어[방언]들로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가 세움을 받게 하지 아니하면 대언하는 자가 그보다 더 나으니라. (6) 이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타언어[방언]들로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대언이나 교리로 너희에게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슨 유익을 끼치리요? (7) 피리나 하프같이 생명 없는 것들이 소리를 낼 때에 음의 구분을 주지 아니하면 피리나 하프 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찌 알리요? (8) 만일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리요? (9) 이와 마찬가지로 너희가 혀로 알아듣기 쉬운 말들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한 것을 어찌 알리요? 너희가 허공에다 말하리라. (10)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소리가 있다 할지라도 그 중에 의미 없는 소리는 하나도 없나니 (11)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면 말하는 자에게 야만인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인이 되리라. (12) 이와 같이 너희도 영적 선물들에 열심이 있은즉 교회를 세우는 일에 너희가 뛰어날 것을 구하라. (13)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말하는 자는 통역할 수 있도록 기도할지니 (14)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이해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15) 그러면 어찌하리요? 내가 영과 함께 기도하고 또 이해하면서 기도하며 내가 영과 함께 노래하고 또 이해하면서 노래하리라. (16) 그렇지 않으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배우지 못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므로 어찌 네가 드리는 감사에, 아멘, 하리요? (17) 너는 진실로 감사를 잘하되 다른 사람은 세워지지 아니하였느니라. (18) 내가 너희 모두보다 타언어[방언]들을 더 많이 말하므로 내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일만 마디 말을 하느니 차라리 이해하면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내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리라.
1절. “사랑을 따르고 영적 선물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너희는 대언하는 것을 사모하라.” ‘사랑을 따라 사모하라’는 원어(디오케테 텐 아가펜 Διώκετε τὴν ἀγάπην·)는 ‘사랑을 구하라’(개역개정)는 말입니다. 앞선 13장에서 강조했듯이 사랑은 은사들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에 먼저 사랑의 덕을 구하고, 그것을 가진 자로서 영적 은사들을 구하라는 뜻입니다. ‘영적인 선물들’은 영적 은사들, 곧 성령의 은사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영적 은사들을 사모하되 대언을 하려고 하라고 권면합니다. 1절의 내용은 14장 전체의 요지입니다. 즉 방언(언어, 다른언어들)보다 대언을 하려고 하라는 것입니다. ‘대언한다’는 원어(프로페튜오 προφητεύητε)는 일차적으로 미래의 일을 미리 말한다는 뜻(예언)보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代言, 대신 전달함)한다는 뜻입니다(출 7:2, 겔 37:4, 7, 9-10). 그것은 물론 때때로 미래의 일에 대한 예언(豫言)도 포함합니다.
2절. “이는 알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말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말하나니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나 그가 영 안에서 신비들을 말하느니라.”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한다’는 말(호 랄론 글로쎄 ὁ λαλῶν γλώσσῃ)는 ‘방언으로 말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방언은 ‘외국어’를 가리키며 ‘알지 못하는 언어’입니다. 왜 방언보다 대언을 하려고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데 그 내용은 4절까지 반복됩니다. 즉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며 알아듣는 자가 없고,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내용을 ‘비밀’이라고 말한 것은 말하는 자나 듣는 자가 그 내용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4절 “(3) 그러나 대언하는 자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그들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나니 (4) 알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말하는 자는 자기를 세우나 대언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느니라.” 대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세운다’는 원어(오이코도멘 οἰκοδομὴν)는 문자적으로는 ‘(집을) 세운다(build)’는 뜻이고, 비유적으로는 ‘영적 유익을 준다(edify)’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대언(代言)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교훈과 권면, 위로와 격려 등 영적 유익을 줍니다. 방언은 자기와 하나님과의 대화이므로 자기에게만 유익하지만, 대언은 다른 이들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므로 그들의 신앙 지식과 인격과 생활에 도움을 줍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유익을 생각할 때 고린도 교인들은 알지 못하는 방언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대언을 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5절. “나는 너희가 다 타언어[방언]들로 말하기를 원하되 차라리 대언하기를 원하노니 이는 타언어[방언]들로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가 세움을 받게 하지 아니하면 대언하는 자가 그보다 더 나으니라.”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다 방언들로 말하기를 원하지만, 그보다 그들이 대언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바울이 그들이 방언들로 말하는 것보다 대언하기를 원하는 까닭은, 방언들로 말하는 자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통역하지 않으면 대언하는 자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원문에는 “대언하는 자가 그보다 더 크다”고 되어 있습니다. 대언이 통역 없는 방언보다 더 큰 은사라는 뜻입니다.
6-9절. 사도는 만일 자신이 고린도교회에 가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인 방언으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대언이나 가르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교인들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고 묻습니다. 이와 같이 통역 없는 방언이 대언보다 가치가 적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필요한지 예언하는 것이 필요한지 그 답은 분명합니다. 심지어 피리나 거문고 같은 생명 없는 악기들도 그것들의 독특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것이 피리인지 거문고인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또 나팔소리도 다양한 신호의 역할을 합니다.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때 금관악기(트럼펫, 트럼본, 호른, 튜바)과 목관악기(바순, 오브에, 클라리넷, 피콜로, 플루트)의 소리가 각가 다르며 현악기(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콘드라베이쓰, 피아노, 하프, 합시코드)과 타악기(트라이앵글, 팀파니, 캐스터네츠, 실로폰, 드럼 등)과 어울려 아름다운 선율을 만듭니다. 다양한 은사들도 함께 뭉치면 아름다운 협주곡이 만들어 집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을 할 때 나팔을 통해 모이라고 알리기도 하였고 앞으로 진행하라고 알리기도 하였습니다. 또 나팔은 적의 침입을 알리는 신호의 역할도 했습니다. 나팔의 소리에 따라 그 의미가 달랐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방언을 잘해도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해야 합니다.
10-12절.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소리들이 있지만 의미 없는 소리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내게 무슨 말을 했을 때 내가 그 말의 뜻을 알지 못한다면 나는 내게 말하는 그에게 야만인이 되고, 내게 말하는 그 사람도 내게 대하여 야만인이 될 것입니다. 12절에 ‘뛰어날 것을 구하라’는 것은 ‘풍성하기를 구하라’는 말로 교회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지 말고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기를 구하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영적 성장, 영적 건립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훈은 분명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성령의 은사들을 사모하였으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이제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 곧 다른 이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13-14절. “(13)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말하는 자는 통역할 수 있도록 기도할지니 (14)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이해하는 것은 열매를 맺지 못하느니라.” 방언과 대언에 대해 설명하였기 때문에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자신의 방언을 통역하는 것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통역하지 못하면, 교회에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언은 통역하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다른 이들에게 어떤 교훈이나 권면이나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은 영의 활동이기는 하나 마음으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방언은 하나님의 영께서 성도의 영을 직접 사용하시는 현상입니다. 그것은 성도의 영의 활동이었음에 불구하고 그의 지성(知性)은 방언의 내용을 깨닫지 못합니다. 14절에 ‘이해하는 것’이라는 원어(누스 νοῦς)는 ‘마음, 생각, 지성, 이해력’을 뜻합니다. “나의 마음이 열매를 맺히지 못한다”는 말은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15-17절. “(15) 그러면 어찌하리요? 내가 영과 함께 기도하고 또 이해하면서 기도하며 내가 영과 함께 노래하고 또 이해하면서 노래하리라. (16) 그렇지 않으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배우지 못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므로 어찌 네가 드리는 감사에, 아멘, 하리요? (17) 너는 진실로 감사를 잘하되 다른 사람은 세워지지 아니하였느니라.” ‘영과 함께’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것은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지성으로 이해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영과 함께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과 함께 찬미하고 또 마음으로 찬미하리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가 내용을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찬미하고 스스로 통역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이가 방언으로 찬미하고 그것을 통역하지 않으면, 성도는 그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없습니다. 그는 감사를 잘하였을지라도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방언에는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합니다.
18-19절. “(18) 내가 너희 모두보다 타언어[방언]들을 더 많이 말하므로 내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9) 그러나 교회에서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언어[방언]로 만 마디 말을 하느니 차라리 이해하면서 다섯 마디 말을 하여 내 목소리로 다른 사람들도 가르치리라.” 바울은 방언 즉 여러 나라 언어들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방언[언어]들로 말하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내가 이해하면서’라는 원어(디아 투 노오스 무 διὰ τοῦ νοός μου)는 ‘생각을 가지고, 이해력을 가지고’라는 뜻입니다.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한다’는 원어는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생각을 가지고 말하는 것과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대조함으로써 방언에 대한 결론을 내립니다. 그 둘의 가치의 차이는 ‘다섯 마디의 말’과 ‘일만 마디의 말’의 대조로 완전히 분명해집니다. 교회에서는 방언으로 하는 일만 마디 말이, 생각을 가지고 하는 다섯 마디 말보다 못합니다.
(20) 형제들아, 이해하는 일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 너희가 오직 악한 일에는 아이가 될지라도 이해하는 일에는 어른이 될지니라. (21)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써서 이 백성에게 말하리라.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타언어[방언]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 대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 (23) 그러므로 온 교회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모두 타언어[방언]들로 말하면 배우지 못한 자나 믿지 않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가 미쳤다고 하지 아니하겠느냐? (24) 그러나 모두가 대언을 하면 믿지 않는 자나 배우지 못한 자가 들어와서 모든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를 깨달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자기 마음의 은밀한 것들이 이렇게 드러나게 되므로 그가 얼굴을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또 진실로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고 전하리라. (26) 형제들아, 그런즉 어찌하리요? 너희가 다 같이 모일 때에 너희 각 사람에게 찬송시도 있고 교리도 있으며 타언어[방언]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 통역도 있나니 모든 것을 남을 세우기 위하여 할지니라. (27) 만일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순서대로 하고 한 사람은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그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니라. (29) 대언자들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판단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 계시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할지니 (31) 모든 사람이 배우고 위로 받게 하기 위하여 너희가 다 한 사람씩 대언해야 하느니라. (32) 대언자들의 영은 대언자들에게 통제를 받나니 (33) 성도들의 모든 교회에서처럼 하나님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요, 화평의 창시자시니라.
20절. “형제들아, 이해하는 일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 너희가 오직 악한 일에는 아이가 될지라도 이해하는 일에는 어른이 될지니라.” ‘이해’라는 원어(프레신 φρεσίν)는 ‘생각, 깨달음’이라는 뜻입니다. 지혜, 생각, 깨달음에 있어서 미숙한 아이가 되지 말고 성숙한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합니다. 악은 알아서 좋을 것이 없습니다. 악은 모를수록 좋습니다. 사람 속에는 악의 경향성이 많으므로 악을 알면 알수록 악에 쉽게 빠지기 쉽습니다. 알코올 중독, 게임 중독, 핸드폰 중독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생각과 깨달음에는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은 사람의 인격을 형성하며 그의 말과 행동을 결정합니다. 잠언 23:7은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사람됨(爲人)도 그러한즉”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어리면 미숙한 인격자이며, 생각이 성숙하면 성숙한 인격자입니다. 바른 생각, 깊은 생각, 원만한 생각, 완전한 생각은 성숙한 인격의 증거입니다.
21-22절. “(21) 율법에 기록된바, 내가 다른 언어들과 다른 입술들을 가진 사람들을 써서 이 백성에게 말하리라.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으니 (22) 그러므로 타언어[방언]들은 믿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 아니요,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로되 대언은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라.” 바울은 이사야서를 율법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율법은 구약성경의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의 율법서나 역사서나 대언서[예언서]나 시편은 권위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책이며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딤후 3:16). 또 바울은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이며, 대언은 믿는 자들에게 표로 주신 은사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들은 방언을 구할 것이 아니고 대언을 구해야 하며, 성도가 방언으로 무엇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대단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3-25절. 교회에는 방언보다 대언이 있어야 유익이 됩니다. 방언으로 말하면 믿지 않는 자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을 것이지만, 대언은 사람의 죄를 책망하고 숨은 잘못을 드러나게 함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며 그를 경배케 만들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지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이미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더욱더 하나님을 알게 할 것입니다.
26절. “형제들아, 그런즉 어찌하리요? 너희가 다 같이 모일 때에 너희 각 사람에게 찬송시도 있고 교리도 있으며 타언어[방언]도 있고 계시도 있으며 통역도 있나니 모든 것을 남을 세우기 위하여 할지니라.” 사도시대 교회의 집회 순서는 주로 찬송과 설교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찬송시(프살모스 ψαλμὸ̀ς)는 시편 찬송을 가리키며, ‘교리’란 설교에 해당합니다. 계시와 방언과 통역도 교훈적 성격을 가집니다. 계시와 방언과 통역의 순서가 당시 교회의 공예배의 순서들로 다 덕을 세우는 내용입니다. 물론 공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차적 의미를 가지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영적인 유익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집회는 사람들에게 유익도 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회개와 구원이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집회들은 이것을 위하여 유익한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것입니다.
27-28절. 교회 집회시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있으면 두 사람이나 혹은 세 사람이 순서를 따라 하며 한 사람이 통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집회에서 방언으로 말하는 자가 세 사람을 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만 공집회에서 허용됩니다. 만일 통역자가 없으면 교회의 공집회에서는 잠잠하고 개인기도할 때에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29-31절. “(29) 대언자들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판단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것이 계시되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할지니 (31) 모든 사람이 배우고 위로 받게 하기 위하여 너희가 다 한 사람씩 대언해야 하느니라.” 방언과 비슷하게, 교회의 공집회시 대언도 둘이나 셋이 말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판단해야 합니다. ‘판단한다’는 말은 참되고 그릇됨을 분별함을 말합니다. 대언은 한 사람씩 순서대로 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권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권면한다’는 원어(파라칼레오/파라칼론타이 παρακαλῶνται·)는 ‘위로하다, 격려하다’는 뜻입니다. 권면과 위로를 통해 교회는 유익을 얻습니다.
32-33절. 방언이나 대언은 무질서하게 이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집회는 질서 있는 집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지러움과 혼돈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질서와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 건건한 인격자는 무질서하지 않고 질서 있게 행동하며 또 그런 행동을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건전한 인격자의 완벽한 모습이십니다. 창세기 1장에 증거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창조의 일을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주와 인간의 한 신비는 그 질서정연한 법칙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도 질서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혼돈과 싸움과 분열을 버리고 질서와 덕과 화평과 사랑을 존중해야 합니다.
3.여성은 교회에서 잠잠하라 (고전 14:34-40)
(34) 너희의 여자들[아내들]은 교회 안에서 잠잠할지니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허락되지 아니하였고 또 율법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느니라. (35) 만일 여자들이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들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니라. (36) 도대체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나왔느냐? 혹은 그것이 너희에게만 임하였느냐? (37)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를 대언자나 영적인 자로 생각하거든 그는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들이 주님의 명령인 줄 인정할지니라. (38)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알지 못하거든 알지 못하게 둘지니라. (39) 그러므로 형제들아, 대언하는 것을 사모하고 타언어[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막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할지니라.
34절. 34~38절에서 바울은 아내들 혹은 여자들이 교회에서 잠잠하고 복종하라고 가르칩니다. 첫째로, 그는 이 교훈이 모든 교회에서 지켜지는 규례임을 증거합니다. ‘모든 성도의 교회’라는 말은 ‘성도의 모든 교회’입니다. 이 교훈은 모든 교회의 보편적 규례입니다. 둘째로, 바울은 이 교훈이 성경에 근거한 것임을 증거합니다. ‘율법에 이른 것같이’라는 말은 이 진리가 율법 즉 성경에 근거하였다는 말입니다. 아내들은 순종하도록 명령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35-37절. 셋째로, 바울은 이 교훈이 인간의 생각이 아니고 ‘주님의 명령’임을 증거합니다. 딤전 2:11-14에서 가르친 말씀과 동일합니다.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그렇다고 바울이 여성들의 지도력을 무시하거나 금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도 여성 지도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사라, 다말, 미리암, 라합, 드보라, 룻, 훌다, 마리아, 베드로의 장모, 막달라 마리아 등을 사용하십니다. 사도 바울도 여성 동역자들이 여러명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뵈뵈, 로이스, 유니게, 유오디아, 순두게, 루포의 어머니(구레네 시몬의 아내) 등. 덕과 질서를 위해 교회에서 방언보다는 대언을 강조하다가 보니 여성들이 공예배에서 방언을 하는 것보다는 대언의 은사를 받기를 권면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38-40절. 대언하기를 사모하라고 교훈한 것은 대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덕의 문제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방언으로 일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한(19절)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26절에서는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의 구원과 신앙적 유익을 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또 바울은 질서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말합니다. ‘품위있고’라는 말은 ‘바르게’라는 뜻입니다. 교회 생활에서 중요한 한 원리는 질서입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평화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모임들과 활동들은 질서 있게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저희들에게 대언의 은사를 주옵소서. 사도 바울도 많은 방언의 은사를 받았지만 개인 기도할 때 사용했고 공예배에서는 대언의 은사를 사용한 것을 기억합니다. 화평의 하나님, 교회에 질서와 덕과 사랑으로 잘 다스려 주님께만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 오직 말씀으로 개혁하게 하시며 주님의 일에 헌신하시는 여성 목회자들, 모든 지도자들을 축복하시고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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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1) 개혁의 달에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주옵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예수님을 닮는 믿음, 소망, 사랑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10월25일(월) 찬 585장(통 384장), 528장(통 318장) 사 39장(바벨론 사자들)
26일(화) 찬 585장(통 384장), 528장(통 318장) 사 40장(위로하라)
27일(수) 찬 585장(통 384장), 492장(통 544장) 사 41장(여호와의 응답)
28일(목) 찬 585장(통 384장), 492장(통 544장) 사 42장(이방의 빛)
29일(금) 찬 585장(통 384장), 489장(통 541장) 사 43장(구원의 약속)
30일(토) 찬 585장(통 384장), 489장(통 541장) 사 44장(우상의 허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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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신학교 가을학기 수업 중
◉ 2021년 10월 25일 월 수업일정, 오전 10시~오후5시
찬양의 시간(9:50-10:10) - 이태환
1,2교시(10:10~12:10) 설교학 – 류재이
3교시(12:15-1:05) 복음신학 - 송인성
점심식사(오후 1:10~2:00)
찬양의 시간(2:00-2:15) - 이태환
4교시(2:20~3:30) 복음신학 – 송인성
5교시(3:30~5:00) 특강 (킹제임스 성경의 신학)
◉ 겟세마네 신학교 개교 33주년 기념 학술대회 및 동문재상봉
일시: 2021년 11월 22일 월 오전 10시~오후 4시
주제: 포스트 코로나 한국교회 개혁의 방향
강사: 정성구 박사 (전 총신대 총장, 현 칼빈연구소 소장)
박호용 박사 (현 대전신학대 교수)
윤사무엘 박사 (현 겟세마네 신학교 총장)
일정: 오전 10:00~10:20 찬양 (인도: 이태환 목사)
오전 10:20~10:50 감사예배 (설교: 이성환 목사)
오전 11:00~11:40 정성구 박사
오전 11:45~12:25 박호용 박사
오후 12:30~1:00 윤사무엘 박사
오후 1:00~2:00 만찬 및 친교
오후 2:00~3:00 동문 재상봉 및 총회
◉연락처: 010-9113-1127, 010-4907-7483. 010-7307-3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