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2021년 11월 7일 주일그리스도의 복음(45): “사랑의 교제” (고전16장)

by wgma posted Nov 0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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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2021년 11월 7일 주일

그리스도의 복음(45)

 “사랑의 교제” (고전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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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ellowship of Agape

본문: 고전 16:1~24

요절: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고전 16:1, 14)

주제: 교인 가운데 어려운 분들을 위한 구제 헌금을 사랑으로 드리자

교독문: 23번(시 43편), 예배의 부름: 시 113:1-3

찬송: 585장(통 384장), 442장(통 499장), 589장(통 308장)

일자: 2021년 11월 7일 주일 (성신강림절 후 스물 네번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지난 한 주 동안 개혁의 신앙으로 매일 살아오셨나요? 공교회는 한번 개혁된 상태(reformata)로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항상 개혁 되어야 합니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라는 모토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매주 살아갑시다. 11월 달은 “감사의 달”로 지킵니다. 한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오늘도 매월 첫주일 성찬식을 가집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은 고린도전서 16장을 강해합니다. 고린도전서로 마지막 장입니다. 사랑의 교제 즉 성도를 위한 연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다음 주일부터는 로마서를 강해합니다. 저희 겟세마네 교회에서는 2019년 4월 28일부터 성경 강해를 매주 주일설교로 하고 있습니다. 66권의 마지막 책부터 거꾸로 한권씩 매주일 한 장씩 강해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요한계시록[주님 어서 오시옵소서, 강해 설교집 출판, 2020년, 쿰란출판사], 유다서, 요한 삼서, 요한이서, 요한일서, 베드로후서, 베드로전서, 야고보서, 히브리서, 빌레몬서, 디도서, 디모데후서, 디모데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전서, 골로새서, 빌립보서, 에베소서, 갈라디아서, 고린도후서를 강해했습니다. 이렇게 창세기까지 강해설교를 매 주일 하며 이 모든 설교들을 출판할 수 있도록 기도와 후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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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제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지시한 바와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2)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자기 곁에 모아 두어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 (3) 내가 가면 너희가 너희의 편지로 인정하는 자들이 누구든지 내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어 너희의 너그러운 선물을 가지고 가게 하리라. (4) 또한 만일 나도 가는 것이 합당하거든 그들이 나와 함께 가리라.

고린도후서 8장 강해설교할 때 설명한 대로 헌금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고 연보는 이웃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1절. ‘연보’라는 원어(로기아 λογία)는 ‘모금’(collection)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를 위하는’이라는 말은 헌금의 목적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부탁하였습니다(행 24:17; 고후 8, 9장). 성경에 계시된 교회의 헌금의 목적은 예배와 전도와 구제를 위한 것입니다. 헌금의 지출에서 전도와 구제를 위하는 항목이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지시한 것같이’라는 말씀은 갈라디아 지방(한국으로 말하면 도, 미국으로 말하면 주에 해당)에 있던 교회들에게 성도들을 위한 연보(구제헌금, 선교헌금)을 뜻합니다.

2절. ‘매주일 첫날’은 주일(主日 Lord’s Day)를 말합니다. 이 날 각 사람이 이익을 얻은 대로 헌금하여 저축하라는 부탁은 초대 교회가 이 날 공적인 집회로 모여 헌금했음을 말합니다. 성신님께서 주일에 강림하셔서 예루살렘 교회의 예배가 시작된 이후 토요일 안식일도 지키지만 성도들은 주일에 모여 예배와 성만찬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사도시대 직후인 소위 속사도들의 글들에 보면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에 회집하여 주일예배를 성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예를 들어, 주후(AD) 100년경의 바나바 서신은 “그러므로 또한 우리는 예수께서 부활하신 제8일을 기뻐하기 때문에 그날을 지킨다”고 말했고, AD 107년경 익나시우스의 마그네시아 사람들에게 보낸 서신도, “만일 옛 습관들로 살았던 자들이 새로운 소망에 이르러, 더 이상 안식일들을 지키지 않고 주님의 날을 따라 그들의 삶을 형성한다면 ... 만일 그러하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를 떠나 살 수 있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AD 135년에 하드리안(Hadrian) 황제의 칙령 이후 더 이상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지 않았고 주일에 공적 예배를 드렸습니다. AD 150년경 순교자 저스틴도, “일요일에 모든 도시의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 사도들의 글을 읽으라. 이 날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이다”라고 했습니다.

3-4절. 바울은 헌금을 취급할 때 교인들의 시험과 오해가 없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직접 관계하지 않고 그 교회가 인정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들을 보내도록 처리하였습니다. 한글개역에는 ‘인정한 사람’이 단수명사이지만, 원문에는 ‘인정한 사람들’로 복수명사입니다. 헌금관리는 두 사람 이상에 의해 바르고 깨끗하게 취급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일꾼이 마귀의 시험을 받아 거룩한 헌금을 오용, 도용한다면 그것은 범죄입니다. 헌금은 공예배의 한 중요한 순서입니다. 헌금 없는 예배는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게 했습니다. 십일조와 헌물은 신약시대에도 헌금의 모범이 됩니다. 우리의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있습니다. 헌금의 용도는 예배와 전도 및 구제를 위한 것으로, 전도자들과 교회의 전임봉사자들의 생활비를 위해 사용되고, 또 교회 안의 물질적 어려움을 당한 성도들을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 헌금을 관리하는 일은 매우 덕스럽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은 한두 사람에 의해 이루어짐으로 사람들의 의혹을 일으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재정의 투명성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 재정은 교회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을 세워서 투명성 있게 관리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바쳐진 헌금으로 범죄치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재정을 지혜롭게 관리하는 사람은 달란트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맡은 종처럼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칭찬을 듣고 자녀손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재정을 정직하게 사용하지 못하고 죄를 짓는다면 가룟유다처럼 말로가 비참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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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제 내가 마케도니아를 지나가므로 마케도니아를 지나갈 때에 너희에게 나아가 (6) 너희와 함께 머물며 참으로 겨울을 날 것(過冬) 같기도 하니 이것은 어디든지 내가 가는 곳으로 너희가 나를 보내 주게 하려 함이라. (7) 이제는 내가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려 하지 아니하며 오직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 것을 확신하노라. (8) 그러나 내가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고자 함은 (9) 크고 효력 있는 문이 내게 열려 있고 대적들도 많기 때문이라.

5-7절.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교제하기를 간절히 원하였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길에 그들에게 잠시 들리기를 원치 않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함께 지내며 겨울도 지나기를 원했고, 또 그들이 그를 그의 갈 곳으로 보내어 주기를 원했습니다. 성도와의 교제는 얼마나 아름답고 사모할 만한 것입니다(시 133:1). 거짓과 미움과 이기주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참된 교회처럼 진실과 사랑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뜻을 행하는 자들에게서만 그런 교제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8-9절. 여기서 바울은 이 서신을 쓴 대략적 시기와 장소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사도행전 19장에 해당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은 에베소에서 회당에 들어가 석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강론하며 권면했으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그 가르침(도道)을 방해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기를 2년 동안이나 했고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는 그의 사역이 에베소에서 큰 열매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크고 효력 있는 문이 내게 열려 있고’라는 말씀은 그의 전도 사역에 큰 열매가 있었음을 뜻합니다. 사도행전 19:19-20은,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5만이나 되더라.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고 증거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의 은혜로 전도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날도 힘있는 말씀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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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이제 디모데가 이르거든 주의하여 그가 두려움 없이 너희와 함께 거하게 하라. 그가 나처럼 주의 일을 행하느니라. (11) 그러므로 아무도 그를 멸시하지 말고 평안히 그를 안내하여 내게로 오게 하라. 그와 또 형제들을 내가 기다리느니라. (12) 우리 형제 아볼로에 관하여는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갈 것을 내가 그에게 간절히 청하였으되 지금은 그가 갈 뜻이 전혀 없거니와 그에게 적절한 때가 오면 그가 가리라.

디모데는 바울처럼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이 그를 존중하고 예우하라고 부탁합니다. 여기에 복음사역자들에 대한 성도들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하는 일입니다. 바울은 또 말합니다. 아볼로에 대하여는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로 가라고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갈 것임을 알려줍니다. 바울은 아볼로에게 무엇을 명령하거나 그의 마음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사역자들은 겸손히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또 주님의 일은 자원적으로 행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우리는 성도의 교제를 귀하게 여깁시다. 또 복음사역을 위해 기도하고 복음사역자들을 존중합시다. 또 우리는 자원함으로 주님의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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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너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행동하며 강건한 자가 되라. (14) 너희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15)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이 아가야의 첫 열매인 것과 또 그들이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전념해 온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16) 너희는 그런 사람들과 또 우리와 함께 도우며 수고하는 모든 사람에게 복종하라. (17)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가 온 것을 기뻐하노라. 너희 편에서의 부족한 것을 그들이 제공하였나니 (18) 그들이 내 영과 너희의 영을 시원하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런 사람들을 인정하라.

본문에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몇 가지 권면을 추가합니다.

13절. 네 개의 명령어로 되어 있다: (1) 깨어라(그레고레이테 γρηγορεῖτε), (2) 믿음에 굳게 서라(스테케테 στήκετε), (3) 남자다워라(안드리제스데 ἀνδρίζεσθε), (4) 강건하여라(크라타이우스데 κραταιοῦσθε).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하는 군병의 모습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악하고 마귀와 악령들은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백방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깨어 있으라고 교훈하십니다(마 24:42). 그것은 믿음, 소망, 사랑의 정상적 신앙생활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세속적 쾌락에 빠지면 영적으로 해이해지고 잠이 드는 것입니다. 또 성도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엡 2:8).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우리로 낙심하고 믿음을 잃고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려 합니다. 또 우리는 남자답고 강건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고 의와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담대하고 강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십니다(요 16:33).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너희가 주님 안에서와 그분의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라”고 권면합니다(엡 6:10).

14절. “너희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고린도교회에 필요한, 그리고 모든 시대에 모든 교회들에 필요한, 중요한 덕은 사랑(아가페)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함으로 일치단합하여야 했다. 사랑은 이상적인 인격의 덕입니다. 우리 속에 참된 사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에게 덕을 세우며 유익을 끼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15-18절. 스데바나의 집은 성도들을 섬기는 일에 바쳐진 가정이었습니다. 스데바나, 브드나도, 아가이고 등은 교회를 섬기는 헌신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찾아왔고 정신적으로 또 아마 물질적으로 그를 돕고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바울과 또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첨하는 칭찬이 아니고 진심에서 나온 인정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같은 자들에게와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고 또 이런 자들을 알아주며 인정하라고 권면합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님의 복음의 일을 위해 또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헌신한 봉사자들을 존중하고 알아주고 인정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세우셨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위해 헌신된 자들을 세우셔서 자기의 양들을 지키시고 양육하게 하시고 교회가 진리 안에서 바르고 질서 있게 진행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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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문안과 축복(고전 15:19-24)

 

(19)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자기 집에 있는 교회와 함께 주님 안에서 너희에게 많이 문안하느니라. (20) 모든 형제가 너희에게 인사하니 너희는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라. (21)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라. (22) 어떤 사람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그는 주님께서 임하심으로 저주를 받을지어다. (2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24)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너희 모두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서신을 빌립보에서 써서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와 디모데 편에 보내다.]

 

19-21. 성도들은 하나님의 집의 가족들로서 서로 진심으로 그리고 거룩한 사랑으로 교제하고 문안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함을 얻고 성령의 역사로 복음을 믿어 구원 얻은, 온 세계의 성도들은 한 교회를 이룹니다. 거기에는 아시아의 교회들과 유럽의 교회들의 차별이 없습니다. 사도시대에는 또 성도의 집에 있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외적으로 훌륭한 건물이 있어야만 교회가 아니고 집에서 모이는 교회(house church)도 참된 교회일 수 있습니다. 교회의 교회다운 점은 성도들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섬기며 순종하고 서로 사랑으로 교제하는 데 있습니다.

 

22-24. 바울은 마지막으로 두 가지 내용을 언급합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사랑 없이 내뱉은 경박한 저주의 말이 아니라,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선택 사항이 아니고 모든 성도에게 필수적 사항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 외에 이 세상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분 외에 아무 곳에서도 우리는 삶의 참된 의미와 위로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십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죄인이었지만,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해주셨습니다. 이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자라면 주님을 이전보다 어느 누구보다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둘째는 주님께서 임하시느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원어로 마란-아타’(Μαράν θα)인데, 이것은 아람어(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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