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무엘 목사
2022년 5월 1일 주일 (어린이주일)
하나님께 더 가까이(18)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리스도” (행9장)
제목: 하나님께 더 가까이(18):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그리스도” (행9장)
“Christ whom Saul met On the way to Damascus”
본문: 사도행전 9:1~43
요절: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5)
주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바울(사울)이 부활의 증인이 되다
교독문: 96번(어린이주일), 예배의 부름: 마 18:3-4
찬송: 566장(통 301장), 565장(통 300장), 563장(통 411장)
일자: 2022년 5월 1일 주일 (어린이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대한예수교 장로회 겟세마네 교회, 합동,
인천광역시 연수구 센트럴로 263, IBS 타워, 11층 6호)
5월은 가정의 달로 지키면서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에 보니, 자녀와 부모가 함께 예수님 안에서 영적으로 건강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에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The child is father of a man)이라고 했습니다. 어른이 될수록 퇴색한 순진함, 영리함, 순수성, 정결함, 정직함을 회복합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나라의 보배입니다. “예수께서 오실 때에 그 귀중한 보배, 하나라도 남김없이 다 찾으시리. 샛별같은 그 보배 면류관에 달려 반짝 반짝 빛나게 비치리로다” (찬 564장).
에베소서 6장 4절에 보니 부모들에게 권면한 말씀이 있습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훌륭한 부모 밑에 효자 효녀가 나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 22:6)는 말씀대로 믿음의 부모는 반드시 행할 일을 자녀들에게 훈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향한 마음의 소원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 18:19).
<자녀들 돌보기 위한 십계명> by 막스 프랑크
1. 언제나 변치 않는 사랑으로 돌보자
2. 부모의 시간과 이해심을 아낌없이 베풀어라
3. 새로운 경험을 갖게 하고 끊임없는 이야기를 나누어라.
4. 혼자서 또는 다른 자녀들과 함께 할 다양한 놀이를 제공하라
5. 결과보다는 그 결과를 위해 땀 흘린 노력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라
6. 자녀가 성장함에 따라 단계적으로 증가되는 책임감을 부여하라
7. 모든 자녀들은 저마다의 개성이 있음을 명심하라.
8. 자녀의 기질, 나이, 이해 수중에 맞추어 부모의 불만을 절제하라.
9. 자녀에 대한 사랑을 중지하거나 금하겠다는 위협을 삼가라.
10. 자녀에게 완벽한 감사의 마음을 기대하지 말라
오늘은 사도행전 9장을 강해합니다. 특히 사울(혹 바울, 행 13:9)의 부르심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저자인 누가는 사울에 대해 이미 몇 번 언급하였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쳤던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었다든지(행 7:58),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다든지(행 8:1),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며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는(행 8:3) 등의 언급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제 본격적으로 이 사람 사울의 회심에 대해 기록합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이 사람은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는 후에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은 선교사가 되어 소아시아와 유럽의 여러 지역들을 다니며 전도할 주의 귀한 종이 되었습니다.
(1) 사울이 주님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2)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요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3)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갑자기 하늘로서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4)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말씀하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5)대답하기를 “주님 뉘시오니이까?”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채찍에 발길질하는 것이 힘드니라.(6)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사람이 있느니라” 하시니(7)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8)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9)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부 끊었더라.
1-2절. 사울은 주님의 제자들,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이는 만일 그 도[기독교]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었습니다. 그는 후에 한 서신에서 자기의 행동이 무지에서 비롯되었음을 회고하였습니다(딤전 1:13). 그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심지어 당시 유대인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회당들에 갈 공문을 요청하였습니다. 다메섹(Damascus)은 시리아의 수도로서, 세계에서 현존하는 도시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18킬로미터(136 마일)나 떨어진 곳입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 공회는 그곳의 회당들에까지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처럼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갈릴리를 넘어서서 심지어 이방나라 다메섹에까지 가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잡아오려고 열심을 내었습니다. 무지에서 나온 잘못된 열심은 이렇게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죽이는 극히 악한 일에 몰두하게 만들었습니다.
3-5절. 사울이 다메섹에 곧 도착할 지점에 갑자기 하늘로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그 빛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입니다. 그것은 해보다도 더 밝은 빛입니다. 그 강한 빛으로 인해 사울은 말에서 내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이 그에게 들렸습니다. 그가 묻기를 “주님, 뉘시오니이까? Who art thou, Lord?” 하니 그분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채찍에 발길질하는 것이 힘드니라 I am Jesus whom thou persecutest: it is hard for thee to kick against the pricks.”고 대답하십니다. 전통사본에 나오는 “네가 채찍에 발길질하는 것이 힘드니라”를 개정개역이나 현대역(King James 성경 이외 모든 영어역)에서 삭제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보충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의 무지한 열심의 걸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그분께서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그를 거꾸러뜨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그의 생이 끝난 분이 아니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고 지금도 하나님 오른편에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라는 증거입니다. 유한한 피조물인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보통 인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본체 하나님이시며 메시아로 이땅에 오신 것임을 증거합니다.
살아계신 주님께서는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교회가 그분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그분께서 보낸 전도자를 영접하는 것이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고(마 10:40), 또 사도 바울은 훗날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에게 죄를 짓는 것이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8:12).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였다”고 하였습니다(갈 1:13).
6-9절. 주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습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음식을 먹지 못하였습니다. 그 3일은 사울에게 기도하고 묵상하며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시간이며 그의 삶에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였다고 고백하며 그 시간을 늘 기억했습니다(고전 15:9; 딤전 1:15).
(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님께서 환상 중에 불러 말씀하시기를 “아나니아야” 하시니 대답하되 “주님, 제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11)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12)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환상중에 보았느니라” 하시니(13)아나니아가 대답하기를 “주님, 이 사람에 대하여 제가 여러 사람에게 들었는가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습니다 하며(14)여기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습니다” 하니(15)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가라. 왜냐하면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기 때문이라.(16)이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기 때문이라” 하시니(17)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말하기를 “형제 사울아 주님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신님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18)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 일어나 세례[침례]를 받고(19 상)음식을 먹으니 건강이 회복되니라.
10-12절.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Ananias)라 하는 주님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환상 중에 그를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사도 시대에 직접 제자들에게 역사하십니다. 본문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니’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10, 11, 15절). 스데반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듯이(행 7:55), 주님께서는 환상 중에 제자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십니다. 환상은 하나님께서 구약시대나 사도 시대에 자신을 계시하신 방법입니다. 오늘날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알려 주십니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일어나 직가(Straight)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주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장소와 사람 이름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며 지시하십니다. 다메섹시에 “직가”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서울에 “을지로”와 같은 거리입니다. 사울은 3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한 죄를 회개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에게도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구약시대나 사도 시대에 하나님의 뜻은 환상 중의 구체적인 예언을 통해 전달되고 또 그 예언의 성취를 통해 확인되곤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가 사울에게 가서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고 지시하는 뜻도 있습니다.
13-14절.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해 많은 사람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고 또 나름대로 판단하고 사울의 박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들은 바에 의하면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치고 이제는 이곳 멀리까지 와서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체포하러 온다고 들었습니다. 사울 자신이 먼 훗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 법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회고하기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그들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라고 진술했습니다(행 22:4-5).
15-16절. 아나니아의 불만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단호하였습니다. “가라. 이는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임이니라. 이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일 것임이니라.” 그것은 11절의 처음 명령을 그대로 반복하신 것입니다. 마치 니느웨에 가서 외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였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온 대언자[선지자] 요나에게 두 번째 내린 하나님의 명령이 처음 명령과 똑같았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며 그의 긍휼과 너그러움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사울에게 가야 할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 사람 사울이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해 택한 주의 그릇(a chosen vessel)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원수 같은 사울을 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긍휼과 사랑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롬 5:8). 둘째는 그가 주님의 이름을 위해 많은 해를 받을 것을 그에게 보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 많은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과연 그는 그런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4:11-13에서 말하기를,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17-19절] 아나니아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사울에게 안수하며 말했습니다. “형제 사울아, 주님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신님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그는 사울에게 ‘형제 사울아’라고 부릅니다. 그는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지 않고 주님의 지시대로 형제로 받아들입니다. 또 그는 주님께서 그를 보내어 사울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신님으로 충만하게 하신다고 전합니다. 18절에 주님께서 사울에게 주셨던 환상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물고기의 비늘(scales)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세례[침례]를 받고 음식을 먹었고 건강이 회복하여졌습니다. 세례[침례]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표시입니다. 그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고 그분과 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것을 확증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했던 사울은 이제 그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랍고 은혜로운 사건입니다.
(19 하)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때(20)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21)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22)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23)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24)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니 (25)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19하 절.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에 오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아나니아에게 세례[침례]를 받은 사울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었습니다. 일부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바뀌었다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사울은 디아스포라(해외로 흩어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기에 집과 유대인들에서는 ‘사울’(그는 베냐민 지파사람, 그 뜻은 ‘질문하다’임)이라 불렸고 헬라인들은 그를 ‘바울’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계 선교 시작할 때부터 주로 ‘바울’이라고 불립니다(행 13:9이후). 그때까지 계속 그는 유대인 사회에서 ‘사울’이라고 불리며 또 행 20장부터 그가 유대인 법정에서는 ‘사울’이라고 불립니다. 다메섹에 머물던 사울에게는 이제 새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유대교의 랍비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교제이었습니다. 성도들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는 영적 교제입니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 성도의 교제는 성경 말씀의 뜻을 묵상하고 깨달은 바를 서로 나누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20-22절. 사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확신하였고 즉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유대인들이 자기처럼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듣는 사람들은 다 놀라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박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케 했습니다. ‘굴복케 하다’는 원어의 뜻은 ‘당황케 하다, 논파하다’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기적들과 부활, 특히 길에서 그에게 나타나심을 통해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였을 것입니다.
23-25절. 다메섹에 살던 유대인들이 사울의 전도를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살해하겠다는 계획이 사울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밤에 그를[전토통사본] 광주리에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렸습니다. 다메섹에는 용감한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훗날 고린도후서에서 간증하기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고 했습니다(고후 11:32-33). 여리고에 들어갔던 두 명의 정탐군들이 기생 라합을 통해 죽음을 피하였듯이, 다윗이 미갈을 통해 사울의 칼날을 피하였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종들과 성도들에게 고난 중에서도 피할 길을 주십니다.
(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분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님을 만난 것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28)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29)또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니(30)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31)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이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님을 경외함과 성신님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26절.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스데반 순교를 지휘했고,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체포하였던 사울이었기에 갑자기 태도를 달리하니 당연히 놀라고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7절] 사울의 간증을 인정하고 믿어준 사람은 바나바라고 불리우던 구브로(Cyprus) 출신 요셉(행 4:35, 37)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주신 친구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요즘말로 ‘권사’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 자기의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둘 정도로 진실히 주님을 믿고 따른 자입니다. 또 행 11:24는 그가 착한 사람이요 성신님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증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건하고 선한 인물을 사울에게 친구로 주셔서 그로 하여금 사울과 사도들의 교량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님을 본 것과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사울을 이해하고 그를 주님의 제자와 형제로 받아들이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바나바는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세상 친구가 아니고, 주님 안에서 사울을 위하고 그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준 믿음의 좋은 친구입니다.
28-29절.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어 교제하며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또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습니다. 사울에게는 예수님께서 주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담대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또 그는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였습니다. ‘헬라파 유대인’이란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힘썼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신앙적 충돌에 기인했습니다. 더욱이 한 때 유대교에 열심이 있었던 사울이 배신자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 그들의 마음은 더욱 격분했을 것입니다.
[30절] 형제들은 위급함을 알고 그를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바울의 고향이며 오늘날 터키의 소아시아 길리리아주의 수도인 다소로 보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사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습니다(갈 1:21). 길리기아 다소는 사울의 출생지입니다(행 22:3). 나중에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거기서 함께 1년간 큰 무리를 가르쳤습니다(행 11:25-26).
31절. ‘그리하여’라는 말(운 oun)은 주로 핍박자 사울의 변화를 염두에 둔 말인데, 개역개정이나 현대역에서는 ‘교회’를 단수로 번역하는데 전통사본에서는 ‘교회들’ 복수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교회들의 형편을 요약하여 증거합니다. 사울은 교회에 대한 핍박의 한 대표적 예인데 하나님께서 핍박자 사울을 꺾으셨습니다. 비록 교회들에 대한 핍박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증거가 너무 뚜렸하였고 이로 인해 교회들은 더욱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복음의 불길은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붙었고 많은 교회들이 곳곳에 세워졌고 그 교회들은 평안 가운데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교회들의 형편을 네 마디로 표현합니다. 첫째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들은 평안하였답니다. 특별한 열심을 가지고 기독교회를 핍박했던 사울이 변하여 예수를 믿는 자가 되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을 때 유대인들의 핍박은 한 풀 꺾였던 것 같습니다. 교회들에게 상당한 외적 평안이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요 14:27), 둘째로, 교회들은 든든히 서가고 있었습니다. 원어의 뜻은 ‘집을 세운다, 증진시키다, 성장시키다’입니다. 이것은 영적 건립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집과 같습니다.(고전 3:9, 3:16-17), 이 건축은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당 건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성도들의 성화(聖化), 즉 성도들의 인격과 삶이 지식과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있어서 자라가는 것을 말합니다.(엡 2:20-22) 셋째로, 교회들은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들이 건전하게 진행하며 발전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진행한다는 말은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주님과 주님의 말씀 즉 주님의 종들을 통해 성실하게 증거되는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교회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건전한 교회입니다. 또 그들에게는 성신님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치 않을 때 하나님의 근심과 책망이 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할 때 성신님의 위로가 풍성히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교회들은 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교회들의 수도 또 교인들의 수도 많아졌을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32)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33)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년이라.(34) 베드로가 말하기를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하니 곧 일어났다.(35)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32-33절.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 하므로 형제들이 사울을 다소로 보냈을 때에, 베드로는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갔습니다. 룻다(Lydda Λύδδα)는 오늘날 텔아비브 남동쪽으로 15km (9.3 마일), 예루살렘에서는 약 35km 떨어진 곳으로, 현재 인구는 78만명이 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믿는 자들을 ‘형제,’ ‘제자,’ ‘믿는 자,’ ‘성도’ 등의 말로 표현합니다. ‘성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이라는 뜻으로 사도 바울이 그의 서신들에서 자주 사용한 명칭입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 지 8년이나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하셨을 때도 모든 병자들이 다 고침받은 것은 아니었겠지만, 애니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즈음 병상에 눕기 시작한 듯합니다. 그는 그에게 병고침 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 베드로를 통해 병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34절. 베드로가 “애니아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고 쉽게 말하자, 그는 곧 일어났습니다. 치유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이전에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 앉은뱅이된 40세 가량된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나 지금 사건이나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뿐입니다. 기적은 사도들의 신분증과 같았습니다(고후 12:12). 사도 시대에는 심지어 집사들도 기적을 행한 자가 있었습니다(행 6:8). 성경은 많은 기적들 중 극히 일부분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의 목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하기 위한 것입니다.
35절. 애니아의 병고침을 보고 룻다와 사론(Saron, Sharon)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믿지 못했던 자들이 이제는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병고침의 기적을 본다고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주셔야 사람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36)욥바에 다비다(Tabitha)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Dorcas)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37)그 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38)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 말고 오라고 간청하니(39)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도착하니 그들이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니 (40)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말하기를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41)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42)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님을 믿더라.(43)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Simon a tanner)에서 유하니라.
36-37절.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Dorcas = gazelle, 영양 羚羊)입니다.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열심히 하던 주님의 여제자였습니다. 선행과 구제는 참된 경건의 증거입니다(약 1:27, 요일 3:23). 그런데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고 그녀의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었습니다. 경건한 성도도 병들어 죽기도 합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출생도 하나님의 정한 때에 있고 죽음도 하나님의 정한 때에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죽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천국에서의 안식이 있고 또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성실히 살고 죽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38-39절. 룻다에서 서북쪽으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해안도시가 욥바입니다. 욥바에 있는 제자들은 베드로가 룻다에서 8년 동안 중풍병으로 침상에 누워 있었던 애니아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빨리 와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가서 도착하자 그들은 그를 데리고 다락에 올라갔습니다. 모든 과부들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였습니다. 그당시 옷은 귀한 것입니다. 그 옷들은 다비다의 선행의 흔적들입니다. 모든 과부들의 눈물과 그들이 보여준 옷들은 다비다가 어떻게 진실하고 선한 성도이었는지를 잘 증거합니다.
40절. 베드로는 사람들을 다 내어보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데 방해를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도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엘리야는 머리를 무릎 사이에 넣고 일곱 번이나 계속 기도하였습니다(왕상 18:42-44). 우리는 환우를 위해서 믿음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약 5:14-18,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님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베드로는 기도를 마친 후 돌이켜 다비다의 시체를 향해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말하니 다비다는 소생해서 눈을 떠 베드로를 보았고 일어나 앉습니다. 베드로는 룻다에서처럼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만 의지하고 그녀를 살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42절). 물론 성도들은 주님의 사도 베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또 두려워하기까지 했을 것입니다.
41-43절,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다비다를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들여 그의 산 것을 보였습니다. 온 욥바 사람들은 그 일을 알고 많이 주님을 믿었습니다. 다비다를 살린 자는 베드로가 아니고 그와 함께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베드로를 통해 이루어진 기적은 베드로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은 그 사건을 통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일 후 그 곳을 곧 떠나지 않고 욥바에 여러 날 있어서 시몬이라는 피장[구두장이, 제혁업자]의 집에서 유숙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다음 주일에 살필 10장 즉 가이사랴에 있는 백부장 고넬로의 가정집회를 준비시켰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 같이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변화합시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한 자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계속 이적과 기적을 행하여 8년된 중풍병자도 낫게 하며, 죽은 여제자 다비다(도르가)를 살리는 권능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도행전의 기적이 오늘도 계속 되기를 간구합니다.
[오늘의 기도]
부활과 생명의 하나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교회 어린이들, 청소년들, 자녀들에게 풍성하신 은총과 복을 내리어 주옵소서. 주님의 말씀과 훈계로 자녀 교육하게 하시며,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녀로 기르게 하옵소서. 사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 변화된 것 같이 오늘 이시간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우리의 삶이 온전히 변화되게 하옵소서. 우리 가정도 임마누엘의 복된 가정이 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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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1) 가정의 달에 매 순간 주님과 더 가까이 나아가는 축복을 주옵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하나님께 더 가까이 하는 믿음, 소망, 사랑의 가정이 되게 하소서!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1장을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합심기도
금주기도제목: (1) 부활의 달에 영원한 말씀으로 매일 24시간을 주님과 동행하게 하소서!
(2) 속히 코로나 재앙이 물러가게 하시며 보혈의 능력으로 무장하게 하소서!
(3) 하나님께 더 가까이 믿음, 소망, 사랑이 부요롭게 하소서!
5월2일(월) 찬 558장(통 없음), 559장(통305) 호 5장(우상 숭배를 경고하다)
3일(화) 찬 558장(통 없음), 559장(통305) 호 6장(백성들의 불성실한 회개)
4일(수) 찬 563장(통411장), 564장(통299) 호 7장(이스라엘과 여러 민족)
5일(목) 찬 563장(통411장), 564장(통299) 호 8장(우상 숭배 책망하시다)
6일(금) 찬 565장(통300장), 566장(통301) 호 9장(형벌의 날 보응의 날)
7일(토) 찬 565장(통300장), 566장(통301) 호10장(하나님의 심판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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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신학교 봄학기 수업(내일) 일정: 4월 25일 월요일
1. 10:00-11:40 설교학(류재이), 2. 11:40-12:00 기도회(원우회)
3. 12:00-1:30 점심시간 및 교제 4. 1:30-2:40 요한복음(박호용)
5. 2:50-4:10 테필린(김인자) 6. 4:10-5:00 무궁신학(이종훈),
7. 5:00-5:30 분반. 박사원(윤사무엘), 학,석사반(오선화)
◉장소: 수원 향기나는나무 교회(이태환목사 시무), 디모데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로 398번길 11 [네이비에 ‘겟세마네신학교’ 검색]
◉연락처: 010-9113-1127, 010-4907-7483. 010-7307-35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