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윤사무엘 목사 (로이 교회 담임) 

 4/16/2023.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믿음” (눅7장) 


KakaoTalk_20230415_090045074.jpg


제목: 여호와는 나의 목자(15):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믿음” (눅7장) 
                “A woman anointed Jesus’ feet with nard” (Luke 7)
본문: 누가복음 7:1-50
요절: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눅 7:50)
주제: 바리새인의 집에 초청받으실 때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다
교독문: 134번(부활주일2), 예배의 부름: 고전 15:57-58
찬송: 161장(통 159장), 164장 (154장 없음), 134장(통 84장)
일자: 2023년 4월 16일 주일 (부활절 후 첫째 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로이 교회 담임) 
      인천광역시 연수구 센트럴로 263, IBS Tower, 11층 11호
      (지하철: 인천1호선 국제업무역, 출구 5번, 좌측 7분 거리 빌딩)
  [예배시간: 매일새벽기도(월-금) 오전6시, 주일예배 오전 11시, 오후 1:30]
 
오늘은 지난 주일에 이어 누가복음 7장을 강해하겠습니다. 6장에서 천국 복음의 말씀을 모은 것을 평지 설교(Sermon on the plain)이라 합니다. 마태복음 5-7장을 산상 수훈(Sermon on the mount) 이라 부르는데 이 산상 수훈의 에끼스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시며, 나인성의 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십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보다 환우를 회복하는 사건을 세밀하게 기록함은 누가가 의사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례[침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을 하시고,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청을 받아 가실 때 불청객인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고 향유를 바르고 입을 맞추는 돌발적인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죽을 자와 죽은 자를 살리심 Jesus Heals a Centurion's Servant  & Raises a Widow's Son(눅 7:1-17)
(1)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3)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4) 이에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기를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6) 예수님께서 함께 가시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씀드리기를 “주님,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제 집에 들어오심을 저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제가 주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는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제 종을 낫게 하소서.(8) 저도 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 군인에게 가라 하면 가고 그에게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9)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그로 말미암아 놀라워하시며 돌이키사 좇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렇게 큰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10)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11) 그 날 뒤에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도시로 들어가시니 제자와 허다한 사람들이 동행하더니(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머니의 외아들이요 어머니는 과부라. 그 도시의 많은 사람도 그녀와 함께 하거늘(13) 주님께서 그녀를 보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사 그녀에게 “울지 말라” 하시고(14) 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그를 나르던 자들이 멈추어 서니라.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니(15) 죽었던 그가 앉아서 말하기 시작하니 그분께서 그를 그의 어머니에게 넘겨주시니(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기를 “큰 선지자[대언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 보셨다” 하더라.(17) 예수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그 주변 온 지역에 두루 퍼지니라.
1-3절. 예수님께서는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주기를 마치신 후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가버나움(Kαφαρναούμ כְּפַר נַחוּם '위로의 마을')은 베드로의 집에 있던 마을로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 센타였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예수님의 마을 Town of Jesus”라고 부릅니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마태(레위)가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나 제자로 부름을 받은 곳입니다. 한달 반전에 성지순례 갔을 때도 방문했는데, 가버나움 회당에서 기도회를 가졌고, 회당 앞에 있는 베드로 장모의 집터 위에 건축된 배 모양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날 마침 사순절이 시작되는 수요일 예배가 진행되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대부분을 이곳 중심으로 전도를 하셨기에 많은 기적도 행하시며 설교와 교육과 기도를 많이 하신 곳입니다.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고, 죽었던 야이로의 딸 소생시키며, 마귀들린 자를 치유하고, 중풍병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환우들이 이곳에 모여들었는데 예수님은 한사람씩 안수(ἅπτω = háptō 합토)하시니 모두 회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인구가 1500명 살았던 작은 마을입니다.
가버나움 회당을 지어 준 백부장(로마 군인)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그분께서 오셔서 자기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백부장(百夫長 centurion)은 로마의 군대 조직의 한 지휘관이었는데 군사 100명을 지휘하는 장교입니다. 그는 로마 사람입니다. ‘사랑하는’(엔티모스 ἔντιμος)이라는 원어는 ‘소중히 여기는(dear)’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상관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것은 충성스런 종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기의 맡은 일에 충실한 것이 충성입니다. 충성된 부하는 상관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 백부장의 종이 병이 들었습니다. 약간 아픈 정도가 아니고 거의 죽게 될 정도로 아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이 백부장은 좋은 점들을 가진 사람입니다. 첫째로, 그는 자기의 종을 사랑하였습니다. 물론 그 종도 백부장에게 충성했겠지만, 이 백부장은 자기 종을 사랑하였습니다. 종이 병에 걸렸을 때 그는 그를 잘 돌보았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종이 거의 죽게 되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그를 살리기 위해 유대인의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낸 것입니다.
4-5절. ”이에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기를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백부장의 좋은 점 두 번째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회당을 짓는 것은 돈과 시간과 힘이 드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지위와 자기 재력을 활용하여 지역 유대인들을 위해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회당을 짓기 위해 자기의 돈과 시간과 힘을 그렇게 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6-8절. 예수님께서 당장 심방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실 때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말했습니다. “주님,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제 집에 들어오심을 저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제가 주님께 나아갈 자격이 없는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제 종을 낫게 하소서.저도 남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 군인에게 가라 하면 가고 그에게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백부장의 좋은 점 세 번째는 그가 자신이 심히 부족함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으며 자기가 그분에게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심히 부족하고 보잘 것 없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부족함이 별로 없어 보이고 높은 마음을 가질 만했던 그 백부장이 자신의 부족함과 보잘 것 없음을 깨닫고 고백한 것입니다. 백부장의 좋은 점 네 번째는 그가 예수님의 지극히 크심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예수님께 대한 바른 지식과 바른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주님! (Κύριε 키리에)’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참된 주인으로, 그것도 신적 권세를 가진 주인, 즉 신적 존재로 인정하는 뜻이 있습니다. ‘말씀만 하사 제 하인을 낫게 하소서’라는 원문의 전통본문은 ‘말씀만 하소서, 그리하면 제 하인이 낫겠나이다’입니다. 자기가 군인으로서 아랫사람에게 무엇을 명령하면 그가 순종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말씀만 하소서’라는 그의 말은 결국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병을 지배하고 병에게 명령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 한마디로 빛을 창조하셨던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말씀 한마디로 병을 고치실 수 있습니다.
9-10절. 예수님께서는 들으시고 그로 인해 놀라사 주위를 돌아보시며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렇게 큰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외적인 영광을 보고 경탄하신 적은 없으셨지만, 백부장의 이 큰 믿음을 보고는 놀라십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렇게 큰 믿음을 만나지 못하였다’는 말씀을 보면, 그 백부장은 이방인(로마사람)입니다. 이방인인 그가 이렇게 큰 믿음을 소유하였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기를 원하시는 자에게는 누구에게나 은혜를 주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아팠던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습니다. 본문이 증거하는 중심인물은 백부장이나 그의 종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이 가진 지식과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바로 그 주님이십니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병(disease)에게 명령하실 수 있고 병을 고치실 수 있고, 과연 고치셨던 신적 구주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백부장의 집에 가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분은 그의 단만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은 그 죽을 병에서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 종은 백부장의 믿음으로 회복되어 강건하여졌습니다.
11절. 그 후에 예수님께서 나인(Nain Ναΐν “사랑스러운” “기쁨의” 뜻)이란 마을로 가실 때 그의 많은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였습니다. 나인성은 갈릴리 지방 남부 이스르엘 평원의 한 작은 마을인데, 가버나움에서 동남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으로 나사렛 마을에서는 10km 떨어진 곳입니다. 예수님 곁에 있는 사람들을 ‘그의 많은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로’ 표현한 것은 그 둘을 구별하는 뜻이 있어 보입니다. 예나 오늘날이나 예수님 곁에는 항상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분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영생의 진리를 구하는 관심을 가졌거나 혹은 단순한 호기심을 가지고 따르는 무리입니다.
12-13절. 예수님께서 성문에 가까이 오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는 장례 행렬이 있었습니다. 이 죽은 아이는 그 어머니의 외아들이었고 어머니는 과부입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 장례는 매우 슬프고 불행스런 일이었습니다. 그 외로운 과부에게 위로와 소망과 의지이었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장례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긍휼과 능력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그 광경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습니다.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이 불행스런 장례식에 동정하는 마음으로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예수께서 행하실 놀라운 기적을 볼 것이며 그 기적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기적은 한적한 곳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서 저자인 누가가 예수님을 ‘주님’(호 퀴리오스 ὁ κύριος)라고 표현한 것은 그분께서 행하실 기적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습니다. ‘주’라는 말은 당시 로마 황제에게 쓰는 칭호로 세상의 주권자 곧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오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신성(神性)을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슬프게 울고 있는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죽음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형벌로 왔으나, 예수님은 죽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분은 그 과부에게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물론 말로만 그녀를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녀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인간들의 눈물을 그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신적 구세주께서만 그렇게 할 수 있으십니다.
14-15절. 그분은 가까이 오셔서 그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환우들을 한사람씩 만져주시듯이 이 관에도 만져주셨습니다(ἅπτω = háptō 합토). 당시의 관은 오늘날의 것과 같은 관이 아니고 일종의 침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 관 혹은 침대에 손을 대시자 그것을 멘 자들이 멈추어 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년아(Young man),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arise)”고 하십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구약시대에 엘리야나 엘리사도 죽은 자를 살린 적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 앞에 기도함으로써 그 기도의 응답으로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위로, 말씀 한마디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이에 그 죽었던 청년은 일어나 앉고 말도 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되돌려 주셨습니다. 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엘리야와 엘리사 시대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과 나사로를 살리신 것은 그 후의 일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살아난 청년이 ‘말도 하였다’는 것은 그가 확실히 살아났음을 증거합니다.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적 구주이심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한 것이 아니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단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신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이런 일을 행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16-17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큰 선지자[대언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말하였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고 합니다. 그 과부의 기쁨과 받은 위로는 두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소생함을 받았다니...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심으로 우리의 부활의 보장이 되셨습니다. 그분은 죽은 그 청년에게서 죽음을 내쫓으시고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 사건은 장차 주님께서 죽은 자들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보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죽은 자를 살리셨을 뿐 아니라 죽은 지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부활에 대한 보장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이나 그 과부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불행을 행복으로 변화시키시는 구주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와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셔서 영광스런 영생의 천국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은 죄와 슬픔,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건져주셨고, 우리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신적 구주이십니다!

2.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답하심 Messengers from John the Baptist(눅 7:18-35)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님께 보내어 묻기를 “오실 그분이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니(20)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묻기를 “세례[침례자]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 분이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21) 마침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22)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23)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대언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대언자]보다도 나은 분이니라. (27)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2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침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31) 또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33) 세례[침례자]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니 너희 말이 마귀가 들렸다 하더니(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니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35)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8-20절. 요한의 제자들은 이 모든 일들, 즉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종의 죽을병을 고쳐주신 일과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신 일 등을 그에게 고하였습니다. 그때 요한은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힘을 들으시고 전도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마 4:12). 세례[침례자] 요한은 감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들을 듣고(마 11:2) 그의 제자들 중 둘을 불러 예수님께 보내어 말하기를, “오실 그분이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나아가 그대로 전했습니다. ‘오실 그분’은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세례[침례자] 요한이 왜 제자들을 보내어 이런 의심어린 질문을 하게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요한이 의심이 생긴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 제자들의 믿음을 굳게 해주려고 한 것뿐일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혹은 자기가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아시는 그분께서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의문이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의 내용이 두 번이나 반복된 것과, 22절에 ‘너희는 가서 요한에게 고하라’는 말씀과, 23절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말씀을 볼 때, 예수님의 말씀은 요한의 제자들에게보다 요한에게 주어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요한은 옥중에서 예수님에 대해 일시적으로 의심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통하여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신분에 대해 의심했을지도 모릅니다.
21-23절. 마침 그때에 예수님께서 질병과 고통과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신 일들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된 것들 외에도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23, “예수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요한복음 21:25, “예수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사야는 메시아 시대에 소경의 눈이 밝으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사 29:18; 35:5-6). 예수님께서 중풍병, 나병,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등의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일들은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충분히 증거합니다. 그분의 행하신 기적들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세례[침례자] 요한과 그 제자들에게 확신을 줄 만한 증거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치 않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24-25절. 요한의 보낸 자들이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들판의 갈대를 가리킬 수도 있으나 마음에 믿음이 없이 의심하는 사람을 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세례[침례자] 요한은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침례]를 전파했고 많은 사람들은 그곳으로 나아가 그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그때에 요한은 확신이 없거나 의심하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확신에 넘친 자이었습니다. 또 그는 외모를 치장하거나 남의 칭찬을 구하는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지냈습니다. 당시 에세네파의 금욕생활을 그래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옥중에서 잠시 연약하여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고난의 현실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26-28절.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대언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대언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침례자] 요한보다 큰 선지자[대언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예수님께서는 세례[침례] 요한이 ‘선지자[대언자]보다도 나은 자’요 큰 선지자[대언자]라고 증거하십니다. 요한은 구약 말라기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께서 메시아 앞에 보내실 그 사자이었습니다. 세례[침례자] 요한은 구약 선지자[대언자]들 중에 가장 큰 선지자[대언자]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하였고 그에게 세례[침례]까지 베풀었고 백성들에게 그가 어떤 분인지 소개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는 구약의 선지자[대언자]들이 가지지 못했던 특권을 가진 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연히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12-13, “세례[침례자]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폭력을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모든 선지자[대언서]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여기의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다니엘 2장의 예언이나 예수님의 천국 비유 등에 비추어 볼 때 신약교회를 가리킵니다. 세례[침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분기점에 서 있었습니다. 신약교회의 지극히 작은 성도가 세례[침례자] 요한보다 크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지식과 믿음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신약 성도들은 이 점에 있어서 구약 성도들보다 그리고 세례[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29-35절.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침례]를 받았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였으나,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침례]를 받지 아니하였고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세례[침례자]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니 너희 말이 마귀가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니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주님께서는 이 세대 사람들을 장터에서 친구들과 노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그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우리가 너희를 향해 피리를 부는 데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는 데 너희는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심히 자기중심적인, 주관적인 판단과 불평과 원망이며 부당한 비난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세례[침례자] 요한에게나 예수님에게 그런 부당한 판단과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불평과 비난만 일삼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하십니다. 지혜는 잠언 8:22-31의 비유처럼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고 그의 모든 자녀들은 신약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신약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과 평가를 가질 것입니다.

3. 많은 죄를 사함 받은 한 여인 A Sinful Woman Forgiven (눅 7:36-50)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38)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39)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대언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니(40)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시몬아, 내가 네게 할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말하기를 “선생님 말씀하소서”(41)그분께서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43) 시몬이 대답하기를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옳게 판단하였도다” 하시고(44) 여인을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여인을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올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46) 너는 내 머리에 올리브 기름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이 여인의 많은 죄가 용서 받았느니라. 왜냐하면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기를 “이분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50)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36-39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기 집에서 자기와 함께 음식 드시기를 초청하였습니다. 남에게 식사 대접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습니다. ‘앉으셨다’는 말은 ‘기대어 누우셨다’는 뜻으로 옛날에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는 것을 가리킵니다. 식사 초청을 받을 때에 거절하지 않고 응하는 것도 사랑의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죄인인 한 여자’라는 말은 그가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인물이었음을 보입니다. 형사상 죄인이라기 보다는 종교적으로 죄인으로 여겨지는 여인이라 보면 됩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an alabaster box of ointment)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온 것은 자신의 부족을 생각하고 부끄러워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녀가 무슨 죄를 지은 자인지는 모르나, 그는 양심에 거리끼는 종교적인 죄를 지었고 종교인 바리새파인들의 지탄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의 기적 행하신 일들과 중풍병자의 죄를 사해주신 일 등을 듣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구주이심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신 것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회개하는 표이었습니다. 또 눈물로 적신 예수님의 발을 자기의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은 자신을 지극히 낮추고 예수님을 지극히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자기 죄를 철저히 뉘우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즉 신적 구세주로 믿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결코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이 광경을 보고 마음 속으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대언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그는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그 여자가 어떤 자인지 모르고 계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40-43절. 신적 구주이신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 대해서도 또 시몬의 속마음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그가 말하기를 “선생님, 말씀하소서.” 그가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을 보면, 그는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깨닫지 못하고 선생님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에게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500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50데나리온을 졌다고 합니다. 각각 크게 차이 나는 액수의 빚이란 사람들의 죄의 크기와 정도가 각기 다르다는 것을 보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한 노동자가 하루 벌수 있는 액수로 알려지는데, 500데나리온이라면 약 1년 반동안의 노동자 임금에 해당하는 큰 돈이며, 50데나리온은 약 두 달 모은 임금에 해당됩니다. 모든 죄가 사람을 지옥에 들어가게 할 만하지만, 죄의 크기와 정도는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으며,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습니다(창 13:13; 요 19:11). 죄들 중에는 무지해서 실수로 짓는 죄가 있고(자범죄, self-offense, 레 4:2, 22) 고의로 뻔뻔스럽게 짓는 죄(고범죄 故犯罪, presumptuous sin)도 있습니다(민 15:30). 후자는 전자보다 훨씬 큰 죄입니다. 죄들 중에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성령훼방죄)나 사망에 이르는 죄(불순종, 신성모독)도 있습니다(마 12:32; 요일 5:16).
“500데나리온 빚진 자와 50데나리온 빚진 자가 모두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는데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는 주님의 질문에 시몬이 대답하기를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그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옳게 판단하였도다” 하십니다.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의 빚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물론 죄의 크기에 따라 용서의 크기도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죄 용서의 크기에 따라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크기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큰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죄가 본질상 지옥 형벌을 받을 만한 것일진대 우리의 죄 용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옥 갈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분의 긍휼의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의 불못에 던지워 고통을 당해야 마땅했습니다. 영원한 지옥 불못으로부터의 구원의 값을 그 무엇으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44-47절.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여인을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 올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너는 내 머리에 올리브 기름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인은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이 여인의 많은 죄가 용서 받았느니라. 왜냐하면 그녀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주님께서는 식사 자리에 초청한 시몬과 그 여인을 비교하십니다.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 초청하고도 당시의 예절대로 발 씻을 물을 주지 않았으나, 그 여인은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께 존경과 사랑의 표로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그 여인은 주님께서 들어와 앉으셨을 때부터 그분의 발에 계속 입맞추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께 그 흔한 올리브 기름도 붓지 않았지만, 이 여인은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한 시몬과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그 여인의 행위는 너무 차이가 컸습니다. 나드(nard)와 같은 향유는 히말라야 산맥에서 사람의 손에 닿을 수 없는 높이에서 자라는 식물에서 채취한 것으로 매우 고액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것이고 적은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적게 사랑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여인이 주님을 향해 극진한 존경과 사랑을 보인 것은 그의 많은 죄가 용서함을 받았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나 죄 용서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주님을 적게 사랑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죄사함의 원인은 아니나 증거가 됩니다.
48-50절.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고 선언 하십니다. 죄사함의 선포는 주님의 가장 은혜로운 사역입니다. 죄는 사람을 고생과 불행, 죽음과 영원한 멸망으로 이끕니다. 또한 죄인이 가지는 죄에 대한 양심의 가책은 그를 우울하게 만들고, 기쁨과 평안, 용기와 힘을 가지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의 선포는 죄인에게 가장 큰 복입니다. 죄사함의 확신은 성도의 기쁨과 평안, 용기와 힘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 즉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기초와 원동력이 됩니다. 식사 자리에 함께 앉은 자들은 속으로 말하기를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의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사람의 죄의 용서는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고유한 일입니다. 하나님 외에 그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는 전에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에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십니다(눅 5:24).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은 바로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지신 구주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그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그 여인이 받은 죄사함의 구원에 대해 증거하십니다. 사람의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 여인에게는 이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그녀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 나아와 회개와 감사의 많은 눈물을 흘리게 했고 자신을 낮추도록 했고, 하나님과 구주를 극진히 높이며 사랑하게 했습니다. 또 죄는 사람에게 슬픔과 불행과 죽음을 가져왔지만, 죄사함의 구원은 참 평안과 무궁한 생명을 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참 평안은 주님께로부터만 옵니다(마 11:28; 요 14: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무명의 이 여인은 죄를 깨달은 죄인이고, 시몬은 아직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한 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죄문제를 심각하게 느낄 때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시는 구주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죄사함을 많이 받은 사람은 주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불순종은 하나님 대신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이며, 탐심도 돈을 섬기는 우상숭배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이며 마음으로라도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입니다. 또 우리는 죄의 형벌이 죽음이요 영원한 지옥에 던지움이라는 사실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럴 때 이 여인과 같이 주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용서함 받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지난 한 주 동안 부활의 증인으로 살지 못했음을 용서하옵소서. 말씀으로 멀리 떨어져 죽어가던 백부장의 종을 고치시며, 죽은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신 주님, 이 시간 저희를 만져주시고 합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옵소서. 저희들의 자범죄, 고범죄를 인해 자복하고 눈물로 회개하며 주님의 말씀만 순종하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성경 공부를 위한 질문들]
1. 가버나움 회당을 건축한 사람은?
2.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에 주님은 어떻게 하셨나?
3.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소생케 하신 예수님이 행하신 일을 설명하라
4. 세례요한에게 보낸 메시지 가운데 주님께서 메시야라는 증거는?
5. 왜 세례요한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로 여김을 받는 이유는?
6.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불청객 여인이 주님께 한 행동은?
7. 시몬과 여인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
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금주기도제목:
(1) 부활의 달에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주옵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부활절 후 기간동안 주님의 겸손과 온유, 순종을 배우게 하소서!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1장을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합심기도

4월 17일 월 찬 165장(통 155장) 히 5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18일 화 찬 166장(통 156장) 히 6 타락한 자는 회개의 기회 박탈
    19일 수 찬 167장(통 157장) 히 7 멜기세덱 반차
    20일 목 찬 170장(통 16장)  히 8 새 언약의 대제사장
    21일 금 찬 171장(통 없음)  히 9 온전한 성도, 개혁 때까지
    22일 토 찬 168장(통 158장) 히10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
◉ 매일 새벽기도회(월-금, 오전 6시부터) (Zoom으로 동시 중계)
us06web.zoom.us/j/7049077483?pwd=UzNvdldBM04xMFlWQSswVWxDT3YvQT09,  회의 ID: 704 907 7483 / 암호: 123456
-------------------------------
겟세마네 신학교 Gethsemane Mission Seminary
◉2023년도 봄학기 개강(2023년 2월 27일 월 오전 10시 ~ 오후 5시)
                  종강 2023년 5월 22일 월 오전 10시 ~ 오후 5시
◉2023년 4월10일 월 수업 일정표
   1교시 10:00-11:30 조직신학(윤사무엘), 요한계시록(박호용)
   점심과 체조, 친교 시간 (11:40-1:00)
   2교시 (1:00-2:30)  중독회복(김도형/이미숙), 복음신학(송인성)
   3교시 (2:50-4:20)  목회신학(이성환). 성경학(오선화), 논문지도(윤사무엘)
   4교시 (4:30-5:20)  원어강독(윤사무엘) 
◉장소: 수원 향기나는나무 교회(이태환목사 시무), 본당과 디모데관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로 398번길 11 [네이비에 ‘겟세마네신학교’ 검색]
  연락처: 010-3288-2878, 010-9367-7605, 010-9722-4548


5e6dea321595528f49ffc8b654c7c8bd.png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214 [로이교회] 23.04.16 주일오전예배 - 예수님의 발에 옥합을 붓는 믿음 (누가복음 강해 7장) file wgma 2023.04.16
» 윤사무엘 목사 (로이 교회 담임) 4/16/2023.“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믿음” (눅7장) file kim 2023.04.15
212 [로이교회] 23.03.12 주일예배 - 예수님의 성육신 (눅2장) file wgma 2023.03.12
211 윤사무엘 목사 (로이 교회) 여호와는 나의 목자(5): “예수님의 수난과 재판” (요18장) 2023년 2월 5일 주일 file wgma 2023.02.03
210 [생방송/로이교회] 23.01.29 주일1부예배 - "예수님의 대제사장적 기도" (요한복음 17장) file wgma 2023.01.29
209 윤사무엘 목사 (로이 교회) 여호와는 나의 목자(4):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 (요17장) 2023년 1월 29일 주일 (주현절 다섯째 주일) file wgma 2023.01.26
208 [로이교회] 23.01.22 주일1부예배 - 보혜사 성신님의 하시는 사역 (요한복음 16:1-33) file wgma 2023.01.22
207 [로이교회] 신년축복성회 23.01.15 주일1부예배 - 심평종 목사님 (세계한국인기독교연합회 직전회장) file kim 2023.01.16
206 윤사무엘 목사 [로이교회] 23.01.08 주일1부예배 -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님 (요15) file wgma 2023.01.09
205 [로이교회] 23.01.01 주일예배 - 길과 진리와 생명 (요14:1-31) file wgma 2023.01.01
204 [로이교회] 2022/12/11 주일예배 -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예수님 (요11장) file wgma 2022.12.12
203 로이교회] 20221204 주일예배 - 선한 목자 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10장) file kim 2022.12.05
202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담임) 2022년 11월 6일 주일 하나님께 더 가까이(45):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 (요6:30-72) file wgma 2022.11.05
201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담임) 2022년 10월 9일 주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 (요3장) file wgma 2022.10.07
200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담임) “첫번째 행하신 표적” (요2장) 2022년 10월 2일 주일 file wgma 2022.09.29
199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담임) 2022년 9월 25일 주일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file wgma 2022.09.22
198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담임) 2022년 9월 18일 주일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1장) file wgma 2022.09.13
197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담임) 2022년 9월 11일 주일 하나님께 더 가까이(37): “제4차 세계선교 여행(2)” (행28장) file kim 2022.09.10
196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담임) 2022년 9월 4일 주일 제4차 세계선교 여행(1)” (행27장) file wgma 2022.09.01
195 윤사무엘 목사 (겟세마네 교회 담임) 2022년 8월 28일 주일 “제3차 세계선교 여행(8)” (행26장) file wgma 2022.08.2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4 Next
/ 14

브라우저를 닫더라도 로그인이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로그인 유지 기능을 사용할 경우 다음 접속부터는 로그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 게임방, 학교 등 공공장소에서 이용 시 개인정보가 유출될 수 있으니 꼭 로그아웃을 해주세요.

TAL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