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무엘 목사
(로이교회, Loi Presbyterian Church)
2023년 11월 5일 주일
마가복음 11:1-33
제목: 여호와는 나의 목자(43)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 (막11장)
“Jesus who arrives at Jerusalem.” (Mark11)
본문: 마가복음 11:1-33
요절: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
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막 11:9-10)
주제: 십자라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자
교독문: 60번(시 139편), 예배의 부름: 마 20:27-28
찬송: 546장(통 399장), 380장(424장), 545장(344장)
일자: 2023년 11월 5일 주일 (성신강림절 후 스무세번째 주일) 성찬주일
설교자: 윤사무엘 목사 (로이교회, Loi Presbyterian Church)
[예배시간: 새벽기도(월-금) 오전6시, 주일예배 오전 11시, 오후 12시 반]
[교회주소: 인천광역시 연수구 인천타워대로 323 (송도동 송도센트로드 B동)
33층 7호, 우편번호: 22007,
지하철 인천1호 국제업무지구역 2번 출구, 오른쪽에 있는 연수세무서 빌딩
다음 건물(Office B)]
[이번 주일 오전 11시 예배에는 설교자: 심평종목사(세기총 직전 대표회장, 로턴한인장로교회, 은퇴)께서 말씀을 전하십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마태 21:18-22). 본 설교문은 오후 1시 예배에서 전합니다]
11월 달은 “감사의 달”로 지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In every thing give thanks.”(살전 5:18) 말씀을 실천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for this is the will of God in Christ Jesus concerning you.(살전 5:18). 감사는 예배의 주제이며, 복음의 진수입니다. 이번달 셋째주일(11월 19일)에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올해도 감사의 열매를 가득 채운 감사의 바구니를 주님께 드립시다. 오늘은 성찬식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 주님께서 여리고를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십니다. 여리고는 지중해 보다 250미터 낮고, 예루살렘은 해발 750미터여서 1000미터를 등산해야 하는 쉽지 않는 길입니다. 24km여서 약 8시간 걸립니다. 하루길입니다. 시편 120-134편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 Songs of degree”입니다. 이 찬미를 부르며 올라갑니다. 참고로 가버나움에서 예루살렘까지는 35시간 도보로 와야 합니다(260km).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군중들이 예수님과 일행을 환영했습니다. 성전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일단 둘러보시고 날이 저물매 베다니로 가서 쉬셨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길가에 있던 무화과나무(Fig Tree)에 열매가 없음을 보고 저주하시니 곧 말라버린 사건과 성전을 청소하신 일을 차례로 묵상하겠습니다.
1.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다 The Triumphal Entry.
막 11:1-11, 마 21:1-11; 눅 19:28-40; 요 12:12-19)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올리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a colt)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돌려보내리라 하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하니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님께서 타시니(슥9:9, 마21:7)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요12:14)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이시여.(시118:26, 사62:11) (10) 찬송하리로다. 오시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시148:1) (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 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마21:12).
1-3절. 예수님과 일행이 유다 광야를 지나 올리브산(감람산)을 오르실 때 거룩한 죽음을 준비하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때가 임박해 오고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이 고발하고, 가룟유다가 팔고, 빌라도가 제판을 하는 수순을 밟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벳바게에 두 제자를 보내시면서 나귀 새끼(a colt)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고 심부름을 시키십니다. 벳바게(Beth-phage)는 '무화과나무의 집'이란 뜻을 갖고 있고 무화과나무가 많이 자라는 동네입니다. 현재 벳바게는 올리브산 정상에서 동쪽 베다니쪽으로 10분 정도 걷게 되면 닿을 수 있습니다. 이곳 벳바게는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째 베다니로 가실 때, 마르다와 마리아가 마중 나왔던 곳입니다. 프랜시스코 교단에서 지은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벽에 나사로의 부활 모습, 예수님의 입성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성당안 제단 옆에 크기가 1m정도되는 큰 바위가 있는데, 예수님이 나귀를 타실 때 발을 디뎠던 바위라고 주장합니다. AD 4세기부터 종려주일 행진이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적 능력으로 그것을 보고 계셨고 제자에게 명하셨습니다(마17:27, 요1:48). 이 사건은 구약성경의 스가랴 9:9(“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와 창세기 49:11(“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에 나타난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나귀는 메어 있었고 주인도 예수님께서 이른 대로(주님께서 쓰시겠다)라고 말하여 허락하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유재산권을 인정하지만, 실상 세상의 참 소유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창조자요 참 주인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24:1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고 합니다.
4-6절. 복음서들에는 예수님을 ‘주님 Kyrios’라고 표현한 구절이 200회 가량 나오며 사도행전에만 108번 가량 나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 베드로는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님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고 증거합니다(행 2:36). 바울은 “네가 네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하며 하나님께서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롬 10:9).
7-10절. 나귀새끼를 예수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니 예수님께서 타셨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무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존경하고 숭앙하고 환영하는 표시이었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기를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군중들의 찬송은 호산나 찬송이었습니다. 군중들이 보여준 행동은 왕이나 메시야에 대한 영접입니다(왕하 9:13). 나무 가지는 나뭇잎인데 요 12:13에 ‘야자수나무가지’로 나오며 요계 7:9에 “손에 야자수 나무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처럼 하나님의 아드님에 대한 존경과 환영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호산나는 아멘, 할렐루야처럼 신앙의 감탄사로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본래 호산나Hosanna는 히브리어 “호쉬안나 Hosianna” (우리를 구원하소서 Save us!)란 단어로 시 118:25에 있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인간 세상에는 여러 가지 죄악된 일들과 불행한 일들, 즉 질병들, 자연 재해들, 전쟁, 기아, 그리고 마침내 죽음 등의 일들이 많고 인간은 이 모든 문제들로부터의 구원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책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오직 세상의 창조주요 섭리자이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인간의 구원의 갈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예수님은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호산나 하며 주님을 환영하고 우리 마음에, 우리 가정에, 우리 교회에, 우리 나라에 영접합시다.
11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니 날이 저물었습니다. 아무 일을 하지 않으시고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베다니에 나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의 대속(代贖)의 죽음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제 예수를 믿는 자는 그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2. 무화과나무에게 이르시다 Jesus Curses the Fig Tree.
(막 11:12-14, 마 21:18-19)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시장하신지라 (마21:18)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2-14절. 이 비유는 이스라엘에 관한 실물 비유로 보아야 합니다. 13절에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예수께서는 무화과가 나오지 않는 철이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하여 무화과나무로 다가가셨습니다. 무화과는 없었고 14절의 명령을 나무에게 내리십니다. 이스라엘의 상징은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입니다. 이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예수님의 입장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이제 그분께서 다른 일을 하실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시점에서 자신을 죽이는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무화과나무를 통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A.D. 70년에 있었던 실제적인 심판은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눅 19:41-44은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했고, 마 11:15-19에서는 무화과나무 비유와 연결되어서 성전을 청결케하는 비유가 나옵니다. 성전에서도 이 열매는 없었기 때문에 마가복음13:1-2의 예언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습니다.
3.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다
(막11:15-19, 마 21:12-17; 눅 19:45-48; 요 2:13-22)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렘7:11, 마21:45, 눅19:47)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님을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분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분을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15-19절. 이 사건은 네 복음서 기자가 모두 다루고 있는데 요한복음의 경우 초기 공생애의 부분에 삽입해 넣었습니다. 공관복음서 중에는 누가가 제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으며, 마태와 마가는 나름대로 충실히 적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것은 베드로의 증언이 곁들여 있어 이 부분에 관한 제일 충실한 기록을 남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보고 기자들이 임의로 적절한 곳에 삽입해 넣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본서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15절.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바리새인들은 성전 안에서 어린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찬송하는 것을(마21:15) 가증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인들과 환전상들의 고함 소리로 성전이 아수라장이 된 것에는 아무 느낌이 없습니다. 일반화폐를 성전화폐로 환전해야 헌금을 드릴 수 있기에 환전상이 성전 주변에 있어야 하나, 이들이 기도하는 방으로 들어와 환전하는 것은 주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또 예배용의 짐승을 매매하는 자들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한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안나스와 대제사장들의 가족에게 고용되었거나 결탁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거나 주위에서 장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성전은 주전 19년에 헤롯 대왕에 의해 건축되기 시작하였고, 그가 죽은 후에 계속해서 작업이 이루어져 A.D. 55년에 완공되었지만 A.D. 70년에 로마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성전의 넓이는 121,410㎡이며, 길이가 333m, 넓이가 433m나 되는 큰 성벽으로 둘러싸였습니다.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들이 바치게 되는 반 세겔의 성전세(출30:13-16, 마17:24-27)를 히브리나 두로의 돈으로만 받았는데 순례자들은 헬라, 애굽, 로마 등의 나라에서 통용하는 돈을 가지고 있었기에 환전하지 아니하면 성전 세를 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곳 사정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바가지를 씌울 수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 속에 비친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의 성전이라기 보다는 대제사장들과 특정 층의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십니다. 마가복음서만이 만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마가 자신이 이방인들을 위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만을 위해서 필요한 성전이 아니라는 것을 꼬집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전에 대한 생각은 "가르치는 곳"(눅2:46), "내 아버지의 집"(눅2:49), 그리고 "기도하는 집"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렇게 가르치시는 것을 대 제사장들은 물론 허락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권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8절. 기이히 (엑세플레세토)는 "깜짝 놀라다, 매우 놀라다, 경악하다, 무서워하다" 뜻의 동사로 볼 때, 그들에게는 두려운 말씀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강력한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9절 매양 저물매는 "그 날의 늦은" [황혼이 질 때]를 가리킵니다. 이미 해가 서쪽 지중해 바다로 져버렸습니다.
4. 무화과나무가 마르다
(막 11:20-26, 마 21:20-22)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마21:21, 눅17:6)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요3:22)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리라.(But if ye do not forgive, neither will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forgive your trespasses.)
20-26절. 이제 베다니로 돌아가시면서 예수님의 일행은 아침에 성전에 올 때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뿌리로부터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뿌리로부터는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질문을 “무화과나무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서 21절 베드로같이 나서기 좋아하는 제자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죽은 사실만을 예수님께 고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도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적인 예수님의 행동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무화과나무의 죽은 것으로 인해 그 이유가 아니라 그대로 된 것에 대한 관심입니다. 현장의 경험들을 바탕으로 믿음을 가질 것을 권면 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3-24절)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믿음을 가지고 기적을 행할 수 있음을 가르치시면서 “기도의 능력”을 보이십니다.
25절의 말씀은 언 듯 이 사건과 교훈에 연결되지 않는 것 같이 보이나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는 무화과나무의 저주를 본 제자들이 혹시 잘못 이해하여 개개인의 잘못의 용서를 하는데 오해할 소지가 있어 덧붙인 말씀으로 보입니다. 우리의 저주는 가볍고 개인적인 흥분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입니다(약3:10). 개역 성경에서 26절이 없음으로 표기하는데 개혁자들의 성경에는 다 있는 말씀이니, 25절을 다시 반복하는 용서에 대한 말씀을 반드시 회복해야 합니다. “만일 너희가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리라. But if ye do not forgive, neither will your Father which is in heaven forgive your trespasses.”
영국의 철학자요 수학자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는 수리 논리학(기호논리학)과 과정철학의 대성자 중 한 사람으로, 러트란트 러셀과 함께 신학자 존 캅과 같은 과정신학 학자들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63세때(1924년) 하버드 대학교 철학 교수로 초빙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영국 성공회 신부지만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아니했답니다. 이유는 무화과나무 철이 아닌데도 열매를 구하지 못하여 화가 나서 이 나무를 저주한 예수님에 대해 실망했기 때문이랍니다. 화이트헤드가 정말 똑똑한 사람이라면 본문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말씀의 결론은 주님께서 배가 고파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23-24절에 나오는대로 십자가 지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믿음의 기도의 위력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5. 예수의 권위를 두고 말하다
(막 11:27-33, 마 21:23-27; 눅 20:1-8)
(27)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도착하니라. 그분께서 성전에서 거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28) 이르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런 일 할 권위를 주었느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30) 요한의 세례[침례]가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 내게 대답하라” (31) 그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로부터라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니 (32) 그러면 사람으로부터라 할까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요한을 참 선지자[대언자]로 여기므로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하는지라(마3:5, 마14:5, 막6:20) (33) 이에 그들이 예수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전3:19)
27-33절. 예수님께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셔서 성전에 걸어다니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나아와 이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그대로 볼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이 모두 나와서 예수님께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상당히 흥분된 상태에 있었고, 누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신들 마음대로 성전을 누비며 다니고 있는 주님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권력 기관에 속해 있어서 이런 종류의 질문에 익숙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장로(Presbyteros)란 각 성읍의 총회나 회의에 모였던 대표성격을 띤 어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턱수염과 백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장로들은 히브리 민족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바로에게(창50:7), 미디안 족속과 모압족속에게(민22:7), 기브온족속(수9:11)에게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장로들은 유목민 때부터 존재했으며 이집트의 종살이 때도 있었습니다(출3:16, 출4:29). 모세는 제사드리는 일을 분담하기 위해 70인의 장로를 뽑았고 모세의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했습니다(민11:16-17). 장로들은 때때로 제사장과 함께 기록되었습니다(왕상8:3, 왕하19:2). 숙곳에는 77인의 장로들이 있었습니다(삿8:14). 신약성경에서 장로들은 구약의 관계를 연장하여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나이많은 사람, 연장자의 의미이자 지도자의 의미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지방교회 감독자의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신약에서 장로직관 관련된 용어는 70회 이상 나옵니다. 이중에 반정도가 유대교의 장로직에 대해서 언급합니다(마15:2, 마26:47, 막8:31, 막14:43, 눅7:3, 눅22:52, 행4:5, 행25:15). 공관복음에서의 유대교의 장로들이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함께 예수님께 대항하는 무리로 언급되었지만, 이후의 장로에 대한 언급은 다시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딤전4:14)라고 말합니다. 또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딤전5:17) 디도서 1:5에는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으며, 베드로는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벧전5:5)고 쓰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는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계4:4)고 표현함으로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공의회 회원의 일부 유대교 장로들에게 문제가 있었지만 이후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장로제도는 운영되었고 존귀한 연장자이며 지도자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에게 즉답을 피하시고 다시 그들에게 물으시기를 “요한의 세례[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내게 대답하라”고 다그쳤습니다. 누가복음 20:6에서는 "그들이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고 말함으로 군중들의 생각을 외면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질문에 그들은 답변하지 못하고 주저했습니다. 어느 답변을 하든지 모두 걸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에게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는 “대답할 가치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성전을 개혁하시며 무화과나무에 일어난 일로 믿음의 기도의 위력을 가르치셨습니다. 용서가 실천되지 않는 기도도 응답이 없고 “우리가 죄를 서로 용서하듯이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의 주기도문 정신을 다시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하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허락에서 나오심을 지도자들에게 수사적인 질문으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의 귀한 사역이 오늘도 일어나며, 감사의 계절에 구원에 대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어떤 환경과 처지를 만나도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감사와 감격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호산나 찬송으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시며, 주님께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성전임을 깨닫고 주님을 모신 성전을 이루게 하옵소서.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게 하시며,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비젼을 세우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마란-아타. 아멘
[성경공부를 위한 질문들]
1. 벳바게에서 예루살렘 황금문까지 주님께서 타신 짐승은? (7-8절) (슥9:9)
2. 호산나의 뜻과 구약성경의 출처? (9-10절)
3. 이튿날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시면서 행하신 일은? (14절)
4. 성전에 올라가셔서 하신 일과 그 이유는? (15절_
5. 저주받은 무화과 나무가 오후에 다시 가보니 어떻게 되었나?(20-21절)
6.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의 교훈은? (23-24절)
7. 용서에 대한 교훈을 각자 말해보자(25-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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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예배를 드립시다. 하루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서 1명 이상.
[개회찬송, 기도, 성경읽기(1장), 말씀 묵상, 찬송, 나눔, 합심 기도, 주기도문]
◉금주기도제목:
(1) 감사의 달에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는 축복을 주옵소서!
(2)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여 성경책을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소서!
(3) 매일 주님의 겸손과 온유, 순종을 배우게 하소서!
예배순서: 찬송, 기도, 성경 1장을 읽고 요절 및 중심단어 찾아 묵상, 찬송,
주기도문, 합심기도
11월6일 월 찬 250장(통 182장) 레 27 하나님께 봉헌한 헌물에 대한 규례
7일 화 찬 251장(통 137장) 민 1 첫 번째 인구조사
8일 수 찬 252장(통 184장) 민 2 열두 지파와 우두머리들
9일 목 찬 254장(통 186장) 민 3 아론의 자손들, 장차 대제사장들
10일 금 찬 255장(통 187장) 민 4 고핫의 자손들, 모세의 가문
11일 토 찬 257장(통 189장) 민 5 부정한 자들을 격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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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새벽기도회(월-금, 오전 6시부터) (Zoom으로 동시 중계)
<겟세마네TV & 로이교회의 예약된 Zoom 회의에 귀하를 초대합니다.>
https://us06web.zoom.us/j/9991131127?pwd=YVFycnhvOEhNSmpiWFZJUTA0N0Rhdz09
회의 ID: 99 9113 1127
암호: 123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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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신학교 Gethsemane Mission Seminary
◉ 2023년도 가을학기 개강(2023년 8월 28일 월)
종강(2023년 11월 27일 월 오전 10시 ~ 오후 5시 30분)
개교 35주년 학술대회 (2023년 11월 29일 수 오전 10시 ~ 오후 3시)
여전도회관(종로5가) 2층 [강사: 윤사무엘, 류재이, 박호용, 박신배]
◉ 2023년 11월 6일 월 수업(가을학기 9주차)
1교시(세계교회사), 원우회의, 점심 및 친교, 2교시(소선지서/중독회복),
3교시(한국신학), 4교시(성경변증, 원어성경강독)
◉장소: 본교 채플실, 네이버에 “겟세마네신학교” 검색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장안로 398번길 11, 향기나는 나무교회]
◉연락처: 032-832-0691, 010-9113-1127
[본 신학교의 신앙노선은 성경이며, 청교도의 신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바탕을 두며, 세계 선교를 힘쓰며, 재림하실 예수님을 준비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며,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진리, 생명임을 믿고, 말씀과 기도로 성화생활하며 구원의 서정을 이루는데 힘쓴다]
◉등록금납부 은행구좌번호: 농협 3019113112731 겟세마네신학교 한국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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